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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마음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2월
평점 :
매일같이 나무에 오르고, 먼 곳이 보인다! 하며 기쁘게 소리치고, 기쁨의 피루엣을 비롯한 춤을 추다 결국 쿵! 나무에서 떨어져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코끼리가 있다. 그 코끼리가 살고 있는 숲속, 나무에 오르는 코끼리를 익히 알고 있는 다양한 존재들이 '내가 코끼리라면' 하고 가정해보는 이야기. 그리고 매일같이 나무에 오르고 떨어지길 반복하다 '잠 못 이룬 밤에 코끼리가 끄적거린 일기'가 본문의 이야기다. 이번 책의 그린이도 김소라 작가로 그녀만의 귀여운 동물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좋은 동물들(비버, 멧돼지, 고슴도치 등)과 자신이 너무나도 싫은 동물들(바퀴벌레, 해파리)의 극과 극에 달하는 상상이 재밌었고, 숲속 동물들뿐 아니라 찻잔, 중력, 나무좀, 맘모스 등 생각지도 못한 서술자들의 등장이 신선했다. 각 동물들의 너무나도 다른 성격과 관계를 파악해가는 것도 좋았는데 예상치 못한 찐한 관계성을 가진 짝꿍들을 가진 동물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전의 작품에서도 등장했던 두 짝꿍 지렁이와 두더지, 달팽이와 거북이가 그들인데 대화를 가만히 읽어보면 친구 같기도 가족 같기도 절절한 연인 사이 같기도 하다. 코끼리가 나무에 오르고 떨어지는 일에 대한 생각을 나누다 이어진 둘의 대화는 아주 애틋했다.
둘은 서로에게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두더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지렁이는 그런 생각 자체가 의문스러웠다.
그러다 결국 한 번은 땅속 깊은 곳에서 심하게 부딪쳤다. "그렇다면 네가 갑자기 쓰러져서 더 이상 구멍도 못 파고, 그래서 내가 너를 떠나거나 너를 잊는 일도 때로는 가능하다는 거야?"
두더지는 두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야, 너는 쓰러질 리 없고,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너를 잊는 일도 절대 없을 거고." 지렁이가 말했다. "알아, 지렁이야. 나도 잘 알아." 두더지도 말했다.
내가 코끼리라면, 하는 가정에 대한 여러 동물들의 대답 중 가장 공감했던 건 향유고래의 답이었다. 자신은 향유고래이며, 코끼리가 아니고, 코끼리가 될 이유도 없다는 것. 그래서 코끼리가 된다면 무엇을 할지에 대한 대답은 정말 모르겠다는 한마디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잊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잊고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헤엄치는 것에만 집중하는 향유고래의 모습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다르지만 뚝심 있게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코끼리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몸이 아프고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고민을 하게 되지만 결국 꿋꿋하게 나무를 오른다. 이런 코끼리의 행동은 버릇, 고집, 뚝심, 신념 어떤 말로 표현해야 맞는 걸까. 그리고 그 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도드라지는 다람쥐의 특별성.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상냥한 성격으로 등장하는 다람쥐는 가만히 코끼리의 고민과 질문들을 들어주다 그저 "응"하고 긍정의 대답을 해준다. 코끼리에게 진심이 담긴 편지도 쓰지만 그 편지를 보내기도 전에 코끼리가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달려나가 애타는 한숨을 내쉬는 장면도 귀여웠다.
떨어지는 것은 부스러기 같은 거야.
아픔도 그래.
계획도, 약속도, 상식도, 후회도, 수치심도
다 부스러기와 같아.
그러나 나무에 오르는 건 안 그래.
춤을 추는 것도,
이른 아침 나무 꼭대기 위에서
멀리 반짝이는 바다를 보는 것도.
- 본문 <잠 못 이룬 밤에 코끼리가 끄적거린 일기> 중 195p
나는 옳은 결정을 좋아하지 않아.
이제야 알겠어.
현명하고, 신중하고, 숙고 끝에 내린 결정들.
나는 잘못된 결정이 좋아.
즉흥적으로 내린,
매일 되풀이하는 그런 결정들.
- 본문 <잠 못 이룬 밤에 코끼리가 끄적거린 일기> 중 197p
코끼리의 일기는 혼잣말 같기도 하고 가끔은 마치 시 같기도 한데 그 내용은 온통 나무에 오르고, 춤을 추고, 떨어지는 이유와 그 안에서 얻는 아픔과 행복에 대해 고찰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삶의 모든 것이 단 한 가지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건 과연 어떤 삶일까. 이 책은 만약이라는 가정법과, 질문들로 가득 찬 책이었다. 제목으로 내세운 '코끼리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참 어렵다. 많은 동물들이 대답을 하지만 그 대답은 일반론도 정론도 되지 못하고, 그저 자신과 코끼리에 대한 즉각적인 생각을 뱉어낸 것으로 독자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계속해서 생각하게끔 만들 뿐이다. 내가 코끼리라면, 그것도 온몸에 멍이 들고 뼈가 부러져도 계속해서 나무에 오르는 코끼리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