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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왕
김설아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7월
평점 :
첫 번째, 두 번째 작품에서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이 꽤나 뚜렷했기에, 잇따르는 단편들을 읽기에 좀 편했다고 해야 하나 같은 결을 가진 이야기로 읽혀서 이 소설집의 성향이 한 방향으로 도드라지게 드러나있다고 느꼈다. 첫 번째 작품은 <외계에서 온 병아리>로 인간의 말을 하며 말을 건 사람의 사연을 알고 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아리들의 등장으로 '병아리 신드롬'을 겪는 사회의 이야기를 한다. 교감, 이해, 욕구, 욕망. 이 단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이와 같다.(물론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병아리가 아닐까 싶지만, 확인해 본 바는 없다.) 사람들이 갈망하는 무언가 중에서 누군가의 관계에 가장 바라는 게 교감과 이해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 특이한 건 그 완벽한 교감과 이해를 해주는 존재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병아리라는 것뿐. 게다가 이런 특이 현상이 한 명의 특정 대상(주로 소설이라면 등장할법한 주인공)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 즉,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는 익명의 사회구성원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러자 이 병아리의 비밀을 파헤치려 조사단이 꾸려지고, 다양한 입장의 해석이 언론을 통해 퍼지기 시작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종로를 중심으로 한 거리 여기저기에 병아리만을 바라보고 드러누워버린 사람들을 집으로 그리고 사회로 되돌려보내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이 펼쳐진다.
두 번째 작품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는 애지중지하던 다이아반지가 켈리의 현신으로 나타나 대화를 주고받는 한 여자 '소라'의 이야기다. 처음 소라가 보게 된 켈리는 이야기한다.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를 볼 수 없어. 앞으로는 현재 만을 생각하면서 살도록 해. 미래도 기다리지 마. 모든 기다림과 희망을 버릴 때 진정한 광채를 볼 수 있을 거야. 그게 바로 영원이야." (본문 중 47p, <모든 것은 빛난다>)
이 두 가지 단편만을 봐도 이 소설집에서 초현실이나 환상적인 기법을 통해 현실을 보여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쾌락, 욕구)과 지향해야 할 것(현재)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보여준다. 김설아 작가의 환상성은 그녀의 등단작인 <무지갯빛 비누 거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주인공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를 하는 학생이라는 것 외에는 정말 거의 모든 문장이 마치 환상동화 같다.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 진행되는 표현들은 장면 묘사도 다른 등장인물의 소개도 자신의 내면 서술조차도 참 평범하지가 않다.
"봐라,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다. 뭘 하건 모든 것은 죽고 사라지고 멸망하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죽기 위해서지. 그것 말고 이 세계는 아무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 그러니까 부디 네 멋대로 살라고."
- 본문 중 151p, <우리 반 좀비>
개인적으로는 <우리 반 좀비>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한번의 죽음을 겪고 진구스가 되어 나타난 진구가 주인공을 붙잡고 이야기한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네 멋대로 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태어난 목적인 죽음으로 완전히 이루기 위해 주인공을 보채는 데, 인간 본성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폭력적이고 섹슈얼한 행동을 일삼고 사회적으로는 부적절하다 지적받을지라도 사람들 내면에 은근히 바라던 일차원적인 욕구들을 제멋대로 해치워버리는 사람, 그에 대한 은근한 동경. 금기시돼있는 것에 대한 은근한 동경과 시기,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을 십 대 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 나이대 특유의 발랄함과 약간 가벼운 분위기를 더해 술술 이야기해버린다고 할까, 앗 하는 사이 이야기가 진행되고 위기에 빠지고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서 마치 소년만화를 보는 느낌으로 순식간에 읽었던 것 같다.
각 단편의 주인공들마다 그 세대의 특징들을 잘 잡아낸 것 같다. 십 대의 혼란스러움이나 미숙함에도 숨길 수 없는 통통 튀는 매력이라던가, 일찍이 자본주의의 생태를 깨닫고 안락함을 추구하거나 물질적인 면에 집중 혹은 집착하는 이십 대, 어느 정도의 불합리함을 감수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면 쉽게 변화하지 않는 단단한 구조의 사회에 스며들게 되는 사회인들의 모습은 작품 속의 특징적인 분위기와는 별개로 공감하기 쉬운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능수능란한 문체와 다양한 분위기의 글을 써낼 줄 아는 매력 있는 작가를 한 명 알게 된 것 같다. 김설아 작가의 장편소설이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