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마음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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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나무에 오르고, 먼 곳이 보인다! 하며 기쁘게 소리치고, 기쁨의 피루엣을 비롯한 춤을 추다 결국 쿵! 나무에서 떨어져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코끼리가 있다. 그 코끼리가 살고 있는 숲속, 나무에 오르는 코끼리를 익히 알고 있는 다양한 존재들이 '내가 코끼리라면' 하고 가정해보는 이야기. 그리고 매일같이 나무에 오르고 떨어지길 반복하다 '잠 못 이룬 밤에 코끼리가 끄적거린 일기'가 본문의 이야기다. 이번 책의 그린이도 김소라 작가로 그녀만의 귀여운 동물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좋은 동물들(비버, 멧돼지, 고슴도치 등)과 자신이 너무나도 싫은 동물들(바퀴벌레, 해파리)의 극과 극에 달하는 상상이 재밌었고, 숲속 동물들뿐 아니라 찻잔, 중력, 나무좀, 맘모스 등 생각지도 못한 서술자들의 등장이 신선했다. 각 동물들의 너무나도 다른 성격과 관계를 파악해가는 것도 좋았는데 예상치 못한 찐한 관계성을 가진 짝꿍들을 가진 동물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전의 작품에서도 등장했던 두 짝꿍 지렁이와 두더지, 달팽이와 거북이가 그들인데 대화를 가만히 읽어보면 친구 같기도 가족 같기도 절절한 연인 사이 같기도 하다. 코끼리가 나무에 오르고 떨어지는 일에 대한 생각을 나누다 이어진 둘의 대화는 아주 애틋했다.

둘은 서로에게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두더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지렁이는 그런 생각 자체가 의문스러웠다.

그러다 결국 한 번은 땅속 깊은 곳에서 심하게 부딪쳤다. "그렇다면 네가 갑자기 쓰러져서 더 이상 구멍도 못 파고, 그래서 내가 너를 떠나거나 너를 잊는 일도 때로는 가능하다는 거야?"

두더지는 두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야, 너는 쓰러질 리 없고,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너를 잊는 일도 절대 없을 거고." 지렁이가 말했다. "알아, 지렁이야. 나도 잘 알아." 두더지도 말했다.  

- 본문 중 35p

내가 코끼리라면, 하는 가정에 대한 여러 동물들의 대답 중 가장 공감했던 건 향유고래의 답이었다. 자신은 향유고래이며, 코끼리가 아니고, 코끼리가 될 이유도 없다는 것. 그래서 코끼리가 된다면 무엇을 할지에 대한 대답은 정말 모르겠다는 한마디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잊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잊고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헤엄치는 것에만 집중하는 향유고래의 모습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다르지만 뚝심 있게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코끼리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몸이 아프고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고민을 하게 되지만 결국 꿋꿋하게 나무를 오른다. 이런 코끼리의 행동은 버릇, 고집, 뚝심, 신념 어떤 말로 표현해야 맞는 걸까. 그리고 그 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도드라지는 다람쥐의 특별성.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상냥한 성격으로 등장하는 다람쥐는 가만히 코끼리의 고민과 질문들을 들어주다 그저 "응"하고 긍정의 대답을 해준다. 코끼리에게 진심이 담긴 편지도 쓰지만 그 편지를 보내기도 전에 코끼리가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달려나가 애타는 한숨을 내쉬는 장면도 귀여웠다.

 

 

떨어지는 것은 부스러기 같은 거야.

아픔도 그래.

계획도, 약속도, 상식도, 후회도, 수치심도

다 부스러기와 같아.

그러나 나무에 오르는 건 안 그래.

춤을 추는 것도,

이른 아침 나무 꼭대기 위에서

멀리 반짝이는 바다를 보는 것도.

 

- 본문 <잠 못 이룬 밤에 코끼리가 끄적거린 일기> 중 195p

나는 옳은 결정을 좋아하지 않아. 

이제야 알겠어.

현명하고, 신중하고, 숙고 끝에 내린 결정들.

 

나는 잘못된 결정이 좋아.

즉흥적으로 내린,

매일 되풀이하는 그런 결정들.

 

 - 본문 <잠 못 이룬 밤에 코끼리가 끄적거린 일기> 중 197p

 

 

코끼리의 일기는 혼잣말 같기도 하고 가끔은 마치 시 같기도 한데 그 내용은 온통 나무에 오르고, 춤을 추고, 떨어지는 이유와 그 안에서 얻는 아픔과 행복에 대해 고찰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삶의 모든 것이 단 한 가지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건 과연 어떤 삶일까. 이 책은 만약이라는 가정법과, 질문들로 가득 찬 책이었다. 제목으로 내세운 '코끼리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참 어렵다. 많은 동물들이 대답을 하지만 그 대답은 일반론도 정론도 되지 못하고, 그저 자신과 코끼리에 대한 즉각적인 생각을 뱉어낸 것으로 독자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계속해서 생각하게끔 만들 뿐이다. 내가 코끼리라면, 그것도 온몸에 멍이 들고 뼈가 부러져도 계속해서 나무에 오르는 코끼리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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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씽 인 더 워터 아르테 오리지널 23
캐서린 스테드먼 지음, 전행선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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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체를 묻고 있는 여자가 있다. 그녀가 묻으려 하는 시체는 3시간 전에 죽은 그녀의 남편이다. 누가 그녀의 남편을 죽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그 시체를 유기하려는 자는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다소 차분하고 세세한 데다 남편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그녀의 서술은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조금 섬뜩하기도 하다. 이야기의 결말을 미리 보여주고 그 결말을 맞이하기까지의 과거를 풀어내는 방법은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흔한 구성이지만, 작가의 필력과 이야기 진행의 완급조절 실력은 수준급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신혼여행을 가 우연히 발견한 캐리어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돈과 다이아몬드를 가지기로 마음먹은 에린과 마크. 그들이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그 가방 안의 물건들을 영국으로 가져와 처분하는 과정이 이 이야기의 주요 줄거리라고 할 수 있겠다. 에린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본문은 그 주요 줄거리 외에 그녀가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이야기(교도소에서 출소를 앞둔 세 사람을 출소 전부터 그 이후까지를 관찰, 인터뷰하는 내용)를 번갈아 들려준다. 초조한 마음으로 겉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척 굴면서 돈과 보석에 관한 처리를 진행하는 이야기는 스릴러에 걸맞은 재미도 주지만 그 과정 자체는 조금 뻔한 면도 있어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데, 그 사이에 들어가는 에린의 다큐멘터리 이야기가 전체 이야기의 완급조절을 해주는 동시에 두 이야기가 나중에 어떻게 합쳐질 것인지 호기심을 당겨주는 역할을 잘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크와의 관계와 돈에 관해 집중한 본 이야기보다 다큐멘터리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세 인물과 나누는 이야기들은 저마다 제각각이면서 출소 후 '새로 시작할 인생'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에린과 공통점이 있는 게 재미있었다.

내 말은, 나를 보라는 것이다. 9일 만에 내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나는 거짓말쟁이이자 도둑이 되었다. 앞으로 5년 후에 내가 어디 있을지, 어떤 사람으로 변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감옥에 들어가 있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본문 중 287-8 p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꺼운 양의 책을 몰아치듯 다 읽고 나서 천천히 다시 책을 훑어보고 메모한 페이지를 다시 눈여겨보자 책 전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뉘앙스가 있었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인용된 장 폴 사르트르의 <닫힌 방> 속 한 문장 '내가 미소 지으면, 그 미소가 당신의 눈동자 속으로 잠겨들 텐데, 그게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는 하늘만이 아시겠죠.'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홀리가 홀연히 모습을 감춘 후 그녀의 방을 보면서 에린이 한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인데 에린과 마크가 느닷없이 돈과 보석을 발견해버린 것처럼 이 스릴러 속 주인공들이 또 언제 어떤 격변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준다. 그리고 이런 긴장감이 스릴러, 미스터리 같은 장르의 책을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에 이 책의 저자가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작가는 배우로도 활동한 적 있는 캐서린 스테드먼인데 내년에도 출간 예정인 책이 있다고 하니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이미 영화화가 확정되었다고 하는데 에린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책이 과연 어떤 식으로 영화화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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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블루스
마이클 푸어 지음, 전행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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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고 누가 그랬던가,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 혼자서 9,995권의 책을 쓴 사람이 있다. <환생 블루스>의 주인공 마일로는 수많은 환생을 거쳐 그 환생의 수만큼의 책을 축척해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수천 권의 종합본이나 요약본의 장점은 역시 방대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마찬가지로 각각의 생이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소 정신 산만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책안의 세계에서 한 영혼이 환생을 거듭하는 이유는 이상적인, 완벽한 생을 살아냄으로써 우주(오버소울)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 마일로는 9,995번의 생을 살고서도 완벽한 생이란 것을 이루어 내지 못한 모질이일지도 모른다. (마일로는 '오랫동안 완벽함에 저항'해 온 거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

 

"대체 누가 완벽한 삶이 이상적이라고 한 거야? " 그가 물었다.

"무슨 뜻이야?"

"내가 나의 불완전한 삶을 좋아한다면 어떻게 되는 건데?" 마일로가 물었다.

(본문 중 79p) 

 

과연 어떤 삶을 '완벽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에 쓰인 완벽한 삶은 너무나도 인간 중심적인 관점인 것 같아 사실 그리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마일로가 귀뚜라미로 태어난 생에서 자신을 사로잡아 나무 새장에 가둔 인간 여자아이를 위해 귀뚤귀뚤 울어주고 소녀의 사랑을 얻어낸 생이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라 평가되어 그는 구원을 받았다. 이 이야기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은 생이라면 조금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수지)이 그에게 보여준 완벽한 생의 한 가지 예는 가축으로 태어나 제 발로 아주 가난한 가족에게 찾아가 식량이 되어주는 삶이었기에 조금 혼란이 왔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아무 계산 없이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이 완벽한 삶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두 이야기에서 희생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였고, 그 어떤 존재의 희생을 통해 행복이나 사랑 등 그에 준하는 것을 얻는 존재는 인간이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엔 왠지 찜찜했다. 

   

"완벽함에는 사랑이 있어야 해."

"내게도 사랑이 있어!" 마일로가 항변했다. "당신과 사랑에 빠졌잖아."

" '사랑'과 사랑에 빠지는 게 항상 같은 건 아니야. " 수지가 말했다.

"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인간적인 거라고. 일종의 화학작용이야. '사랑'은 우주적이지. 나도 역시 당신을 사랑해."                                  (본문 중 102p)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두 가지 궁금증이 계속됐다. 마일로와 수지의 러브스토리는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일로는 1만 번의 생을 다 써버리기 전에 완벽함에 다다를 수 있을까? 마일로가 거쳐간 여러 가지 생의 이야기나 잠시 사후세계에서 머무는 동안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어가면서도 이 두 가지 질문에 대답이 궁금해 계속 책장을 넘긴 것 같다. 이미 완벽에 대한 정의나 그에 다다르기 위한 룰이 정해진 세상에서 그에 구애받지 않고 마이웨이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려 고군분투하는 마일로는 참 독특한 존재였다. 가벼운 러브 판타지를 생각하고 읽었는데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보단 좀 더 방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한 책이었다.

두께는 있지만 이야기는 술술 읽히는 편이고 다양한 마일로의 생에 경악하기도 하고 안쓰러워하기도 하며 그럭저럭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책 속 세계의 설정들을 나에게 빗대어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한 영혼이 완벽함을 이루어내 오버소울의 조각이 되기까지 만 번의 삶이 가능하다면, 과연 지금 내 영혼은 몇 번째 생을 살고 있는 걸까. 아주 망쳐버린 생이 아닌 이상은 다음 생에 어떻게 태어날지를 본인 스스로가 정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완벽한 생이란 것을 바로 이루어내지 못하는 걸까. 이전 생은 지금에 가까운 현재였을까 아니면 과거? 혹은 미래? 나라면 다음 생에서 어떻게 태어나면 좋을까. 이번 생이 끝나고 내가 얻게 될 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등등. <환생 블루스>는 죽음과 사후세계, 그리고 환생에 대한 유머러스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담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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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왕
김설아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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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두 번째 작품에서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이 꽤나 뚜렷했기에, 잇따르는 단편들을 읽기에 좀 편했다고 해야 하나 같은 결을 가진 이야기로 읽혀서 이 소설집의 성향이 한 방향으로 도드라지게 드러나있다고 느꼈다. 첫 번째 작품은 <외계에서 온 병아리>로 인간의 말을 하며 말을 건 사람의 사연을 알고 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아리들의 등장으로 '병아리 신드롬'을 겪는 사회의 이야기를 한다. 교감, 이해, 욕구, 욕망. 이 단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이와 같다.(물론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병아리가 아닐까 싶지만, 확인해 본 바는 없다.) 사람들이 갈망하는 무언가 중에서 누군가의 관계에 가장 바라는 게 교감과 이해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 특이한 건 그 완벽한 교감과 이해를 해주는 존재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병아리라는 것뿐. 게다가 이런 특이 현상이 한 명의 특정 대상(주로 소설이라면 등장할법한 주인공)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 즉,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는 익명의 사회구성원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러자 이 병아리의 비밀을 파헤치려 조사단이 꾸려지고, 다양한 입장의 해석이 언론을 통해 퍼지기 시작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종로를 중심으로 한 거리 여기저기에 병아리만을 바라보고 드러누워버린 사람들을 집으로 그리고 사회로 되돌려보내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이 펼쳐진다.

 

두 번째 작품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는 애지중지하던 다이아반지가 켈리의 현신으로 나타나 대화를 주고받는 한 여자 '소라'의 이야기다. 처음 소라가 보게 된 켈리는 이야기한다.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를 볼 수 없어. 앞으로는 현재 만을 생각하면서 살도록 해. 미래도 기다리지 마. 모든 기다림과 희망을 버릴 때 진정한 광채를 볼 수 있을 거야. 그게 바로 영원이야." (본문 중 47p, <모든 것은 빛난다>)

 

 

 

이 두 가지 단편만을 봐도 이 소설집에서 초현실이나 환상적인 기법을 통해 현실을 보여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쾌락, 욕구)과 지향해야 할 것(현재)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보여준다. 김설아 작가의 환상성은 그녀의 등단작인 <무지갯빛 비누 거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주인공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를 하는 학생이라는 것 외에는 정말 거의 모든 문장이 마치 환상동화 같다.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 진행되는 표현들은 장면 묘사도 다른 등장인물의 소개도 자신의 내면 서술조차도 참 평범하지가 않다. 

 

"봐라,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다. 뭘 하건 모든 것은 죽고 사라지고 멸망하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죽기 위해서지. 그것 말고 이 세계는 아무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 그러니까 부디 네 멋대로 살라고."     

- 본문 중 151p, <우리 반 좀비>

 

개인적으로는 <우리 반 좀비>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한번의 죽음을 겪고 진구스가 되어 나타난 진구가 주인공을 붙잡고 이야기한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네 멋대로 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태어난 목적인 죽음으로 완전히 이루기 위해 주인공을 보채는 데, 인간 본성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폭력적이고 섹슈얼한 행동을 일삼고 사회적으로는 부적절하다 지적받을지라도 사람들 내면에 은근히 바라던 일차원적인 욕구들을 제멋대로 해치워버리는 사람, 그에 대한 은근한 동경. 금기시돼있는 것에 대한 은근한 동경과 시기,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을 십 대 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 나이대 특유의 발랄함과 약간 가벼운 분위기를 더해 술술 이야기해버린다고 할까, 앗 하는 사이 이야기가 진행되고 위기에 빠지고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서 마치 소년만화를 보는 느낌으로 순식간에 읽었던 것 같다.

각 단편의 주인공들마다 그 세대의 특징들을 잘 잡아낸 것 같다. 십 대의 혼란스러움이나 미숙함에도 숨길 수 없는 통통 튀는 매력이라던가, 일찍이 자본주의의 생태를 깨닫고 안락함을 추구하거나 물질적인 면에 집중 혹은 집착하는 이십 대, 어느 정도의 불합리함을 감수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면 쉽게 변화하지 않는 단단한 구조의 사회에 스며들게 되는 사회인들의 모습은 작품 속의 특징적인 분위기와는 별개로 공감하기 쉬운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능수능란한 문체와 다양한 분위기의 글을 써낼 줄 아는 매력 있는 작가를 한 명 알게 된 것 같다. 김설아 작가의 장편소설이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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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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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중 120p)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에 더 감정적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책 속의 서술은 결코 감성적이지 않았다. 매번 서술자가 달라지는 짧은 이야기 속에 주인공들은 순수한 의문을 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었다. 그날의 광주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시청에 남았던 사람들의 마지막 밤 그전에 이미 벌어진 참혹하고 어리둥절했던 죽음들. 중학생 동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직은 살아있었던 사람, 그전에 죽었던 사람,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그 후 이야기까지. 어떻게든 연관이 있고 그날 광주에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담담한 어조로 이어지는데 자꾸만 내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끔씩 눈물이 나기도 했다.

중학교 역사 시간에 관련 영상을 보고 그저 충격에 빠진 채, 왜 눈물이 나는지 정확한 이유도 모르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들이 왜 죽었어야 했는지, 군인들은 왜 그렇게 사람들을 때리는지, 쓰러진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질질 끌어다 짐짝처럼 트럭에 가득 싣고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시민들은 왜 시민군이 되어야 했는지, 이미 죽은 시체를 수습하러 왜 총알 세례 속으로 뛰어들고 또 뛰어드는지, 모두가 죽을 거란 걸 예상하면서도 왜 그날 시청에 남았는지... 그 영상 안에 있었던, 실제 그날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은 과연 이런 질문의 대답을 알고 있었을까.

실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직 관련 생존자들과 그 일에 가장 큰 결정권자였던 사람이 남아있는 시대에서 이렇게 용감하게 글을 쓴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읽고 나서도 뭐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사건에 대해 그 사람들에 대해 아주 진지하고 정중한 자세로 바라보며 여러 생각과 상상을 거쳐 쓰인 글이라는 게 느껴졌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영화나 소설 등에서 여러 번 다루어졌지만 보통 명확한 입장을 가진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책에서는 시점과 인물을 다양하고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낸 게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 글을 읽는 우리는 그 일의 희생자도 가해자도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민주화를 비롯한 지금 사회에 과거보다 나아진 점들이 있다면 그것들 하나하나를 이룩하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일을 바르게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 감사함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의 목숨을 비롯한 많은 희생과 슬픔과 분노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억울한 죽음과 슬픔의 세월을 반복해 견뎌내야 할지도 모른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는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 ... )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본문 중 12, 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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