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검은 기름때가 덕지덕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체구가 작은 엄마한테는 좀 크고 갑옷처럼 무거워 보이는 옷이었다. 여자는 그날 처음 엄마가 어떤 모습으로 공장에서 일하는지 알았다. 노동환경이 그리 좋은 공장이 아니란 사실도, 일이 많이 어렵고 힘들었겠다는 것도, 엄마의 손톱 밑에도 더러운 기름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그 또한 여자는 처음 봤다. 그 검은 손으로 엄마는 쌀을 씻고 열무를 다듬고 나물을 무쳤다. 여자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냉장고 속을 감돌던 냉기처럼 차갑고 싸늘한 손이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잘 살라는 말이었겠지. 이것저것을 다 합해도 삶은 사는 것밖에는 아니고, 거기서 ‘잘‘ 살면 성공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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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교환을 끝낸 여자는 창문을 닫고 부엌으로 들어온다. 마침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린다. 냉장고는 울어야 제 일을 해낼 수 있다. 한참 서서 가만히 소리를 듣고 있던 여자가 냉장고 문을 연다. 가로등을 닮은 노란 불이 켜지고 안에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온다. 여자는 냉장고 속 깊숙이 상체를 숙여 자신을 집어넣는다. 그러고 소리 내 울어본다. 한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문제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제 일을 해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번에는 냉장고가 아니라 여자가 자신의 눈물을 허용한다. 울자 차가운 눈물이 흐르고 여자의 몸은 따뜻해진다. 따뜻해지기 위해서는 차가운 게 필요하고 차가워지기 위해서는 따뜻한 게 필요하다. 오늘 밤 여자는 잠이 안 오고, 허기는 가시지 않으며, 외로움이 괴로움으로 바뀌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눈 오는 새해니까. 살아가는 날들 중에는 부끄러운 것들이 훨씬 많으니까. 여자는 울음을 그치고 냉장고 문을 닫기 위해 허리를 편다. 그때 냉장고가 좀 더 크게 소리 내 물어본다. 잘 살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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