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선악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계를 원한다.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욕망 위에 수립된다. 이것들은 소설의 상대적이고 애매한 언어를 자기네들의 명확한 교조적 담화로 바꾸지 않고서는 소설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누군가는 옳다고 주장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옹졸한 폭군의 피해자이거나 부도덕한 여인의 피해자다. 또는 아무 죄도 없는 K가 공정하지 못한 재판에 억눌리거나, 그 법정 뒤에 신의 정의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K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또는 - 또는’에는 인간 현상의 본질적인 상대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무력감, 지고의 심판관이 부재함을 직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담겨 있다. 소설의 지혜(불확실함의 지혜)를 수용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무력감 때문이다.
-1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