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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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견고한 각본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의 가장 첫 문장이다. 저자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딸 또는 아들로서의 역할을 기대받고, 성인이 되면서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 며느리와 사위 등의 역할을 맡는다”고 말하며 성별에 기반한 가족 언어와 행위를 비판하며 이를 낱낱이 파헤친다. 남자 며느리,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성별에 따른 역할, 동성애와 저출생 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우리가 문제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한다.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나서부터 여성으로 태어나서 받는 차별과 불편함, 그리고 억압받는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외부의 영향이 있다면 내가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찾을 수도 있다. 이처럼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가 미처 간과했던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뒤집어 엎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들고 이 문제를 옳게 고칠 수 있는 방향을 찾게 된다. 저자가 물어온 것처럼 나도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제 우리, 가족각본을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요?

📎 성별에 따라 정해지는 이 모든 가족질서는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인위적으로 정교하게 기획해놓은 틀에 사람을 끼워 맞춘 것이지, 사람의 본성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질서라고 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왜 가족제도가 남성을 중심으로 발달해야 했을까? 전세계적으로 나타난 이 현상에 대해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현재로서는 명확한 답이 없다”고 말한다. 남성이 힘이 더 세다거나 공격적이라는 것은, 실제로 사회적 능력이 신체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험적 증거라기보단 신화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왜 여성이 복종하는 지위에 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합당한 설명이 없다. 유교에서 남존여비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였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말로,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했다. 그러니 여자는 남자를 따라야 한다며,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의 도덕규범이 나왔다. 이제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원칙으로 하는 시대에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규범이다.

📎 2016년 행정안전부는 전국의 가임여성 분포를 보여주는 가임여성 지도‘를 발표했다. 지역별 저출생 대책을 도모하는 취지라고 했다. 하지만 가임여성을 숫자로 전시하는 이 지도는 암묵적으로 출산을 종용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의도는 아니었다지만, 마치 여성이 인구 생산의 임무를 가진 것처럼 ’당신이 아이를 낳아야 모두가 산다‘고 하는 무거운 압박을 느끼도록 했다. 한 개인의 삶에서 출산이란 인생을 조망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어려운 일인데, 그런 결정을 두고 애국심 내지 시민의식을 시험하는 듯한 부담을 주는 정책의 단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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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페이지 저자, 송섬별 역자 / 반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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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표지처럼 강렬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엘리엇 페이지는 이 책에 자신이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을 담았다고 한다. 그 실타래는 어찌나 단단히 엉켜있었던지, 책을 읽는 내 마음이 힘들어질 정도였다. 솔직하게 써내려간 글은 그와 정반대의 성향에 있는 나의 공감까지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가 겪은 혼돈을 함께 겪는 기분이었다.

엘리엇 페이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성별을 원망하기도, 주변의 질타에 힘들어하기도 하면서도 결국엔 자신을 지켜냈다. 두 발짝 앞으로 나섰다가,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물러서야 할 때임을 인지하고 잠시 물러설 줄 아는 것도 커다란 용기다. 물러섰다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공간은 더 많이 남아 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갈 엘리엇 페이지의 발걸음을 응원한다.

📎 아버지를 용서하기는 그만큼 쉽지 않았다. 당장 토론토로 가서 네 엉덩이를 걷어차 주마. 자기 자식이 보호를 필요로 했을 때, 자기 자식이 사랑을 필요로 했을 때, 그는 폭력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미성년자인 내가 겁도 없이 성인 남자와 인터넷으로 교류했다는 이유로 노여워했다. 그 순간에 내게 돌봄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 순간에 내게 안전과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영영 그런 것을 얻을 날은 없지 않을까? 아버지의 그 한마디 말은 그 남자의 위협보다, 그의 집착보다, 내 팔을 던 그의 손가락보다 내 몸속에 더욱 오래 머물렀다.

📎 2014년의 커밍아웃은 선택했다기보다는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 것이었지만, 맞다,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한 일들 중 가장 중요한 일 중 하카였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노출되고 취약해지는 일이 잇따랐다 한들, 커밍아웃은 그 모든 걸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나는 숨어서 고통받느니 살아 있으면서 고통을 느끼고 싶었다. 어깨를 활짝 펴고, 심장을 환히 드러낸 채, 나는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손을 잡고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공허함이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익숙한 낮은 목소리. 그 속삭임은 여전히 선명하게 내 귓가에 맴돌았다.

📎 내게는 혼자만의 시간,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거나, 무엇에게 누군가로 존재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온 힘을 다해 생각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이렇게 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속이느라 나는 지쳐 버렸다. 하지만 답은 침묵 속에 있었다. 내가 귀를 기울이겠다는 선택을 해야만 들을 수 있는 답이었다.

📎 기적의 샘물처럼 우연히 솟아난 일이 아니었다. 길고 힘든 여정을 거쳐 왔으므로. 그러나, 스스로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순간은 이토록 단순했다. 내 여정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고, 나는 몇 번이나 잘못된 길을 택했지만, 바라보는 관점을 바꾼다면 잘못된 길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고통스럽고 구불구불한 길이었으나, 그 길은 나를 내게로 데려다주었다. 드디어 눈앞에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안으로 들어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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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시대 - 단절의 구간
박세진 지음 / 마티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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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패션의 변화와 결합의 흐름을 다룬다. 패션계의 큰 파장을 불러왔던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구찌 디렉팅을 시작으로 발렌시아가, 버질 아블로 등 큼지막한 유행, 그리고 패션과 사회, 패션산업으로 이어져 패션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산업이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다양성의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타인과 다름을 표방하는 것 자체가 메이저가 되어버린 시대다. 변화는 혼자 하지 않는다.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큰 목소리는 고정적 성관념에 대한 반대, 인종주의 반대, 비만혐오 반대 등 다른 목소리로 이어졌고 이 목소리는 다양한 디자인, 치수, 성별의 구분 없는 옷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패스트 패션을 문제 삼는 환경 문제의 대두는 친환경 소재로 옷을 제작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에 패션은 겉모습 뿐만 아니라 가치관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다양함이 다양해져서, 그 다양함이 범주화되고 곧잘 조롱 받는 세상이다. 무시 받아야 할 패션이란 게 따로 존재할까? 저자의 말처럼 ’다양함에 대한 두려움을 치우‘며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더욱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이 책을 일독해야 한다. 분명 패션을 바라보는 시야가 더욱 넓어질 것이다.

📎 고급 패션 브랜드들은 예전에는 별생각 없이 재미있다고 여기며 인종적 편견과 농담, 남녀 성역할에 대한 편견, 다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을 패션과 광고를 통해 드러냈다. 이제는 이런 사고를 치면 전 세계적인 반발과 함께 불매 시위가 일어날 수도 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산업은 거의 다 비슷한 상황인데 케이팝의 경우에도 인종적, 성차별 이슈가 종종 도마에 오르는 걸 볼 수 있다. 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통제할 방법은 없겠지만 그 생각이 머리 바깥으로 나오고, 그게 제품화되어 ー 혼자 운영하는 양장점도 아닌 ー 회사 바깥으로 나오는 동안 아무도 통제하지 않았다는 건 조직 구조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 모호함이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패션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옷뿐만 아니라 손에 닿는 모든 것에 취향을 반영하는 일상은 세련된 현대인의 지표가 되었다. 언뜻 개인의 취향 자체가 이미 타인 의존적인 속성을 가지기에 SNS 같은 거대한 창 속에서 ‘개인의 취향 존중’은 외려 서로 같아지는 길로 가는 듯 보이기도 한다. ’나는 남들과 달라‘하는 이들끼리 서로 비슷해지는 거다.

📎 서로 다른 각자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남한테 전혀 상관하지 않는 태도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목표는 아니다. 낯선 모습을 보면 일단 적대감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흔하다. 2018년에 여성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눈이 나쁘면 당연히 안경을 쓴다. 그럼에도 뉴스 진행자처럼 권위가 필요한 자리에서 여성은 대개 안경을 쓰지 않았다. 여전히 구시대적 비판과 반감이 존재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개개인의 도전과 시도가 나아가기 어려운 한 칸을 내딛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 패션의 매력과 즐거움 모두를 관통하는 건 다양함에 대한 두려움을 치우는 거다. 어차피 옷은 옷이다. 아무리 이상한 걸 입어도 웃기는 정도에 그친다. 생명을 위협하지도 않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많이, 다양하게 보고 입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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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를 날리면 - 언론인 박성제가 기록한 공영방송 수난사
박성제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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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중립이란 무엇인지, 객관성이란 무엇인지, 현재 언론은 중립과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판치는 가짜뉴스와 편파적인 보도로 인해 사람들은 매체를 100% 믿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들은 것, 본 것에 의지한다. 하지만 이럴수록 내 곁의 가짜는 더욱 진짜처럼 느껴지며 옳고그름을 가름하는 눈을 잃게 된다. 올곧고 균형있는, 진실된 보도가 가장 절실한 시대인 것이다. 주관에 의지하여 객관을 잃어버린, 강자와 약자가 분명한 상황에서도 중립을 외치는 자들에게 이 책을 읽게 하고 싶다.

이 책을 통해 보는 박성제는 새로운 것에 빠르게 적응할 줄 알고 과감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새것을 수용하는 자세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올드 플랫폼인 공영 방송계에 꼭 필요한 정신, 나아가 사회와 기업에 꼭 필요한 정신이다.

📎 “언론인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범죄가 아닌, 보도의 내용을 문제 삼아 수사하는 것은 언론탄압입니다. 경찰이 소환장을 보내더라도 응하지 말 것을 사장으로서 지시합니다. 압수수색에도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자들은 차라리 체포되어 끌려갈지언정 제 발로 출두하지 마십시오. 만약 체포영장이 집행되어 기자들이 끌려가면 전부 촬영하여 뉴스로 내보냅시다.”

📎 굳이 ‘기계적’이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중립성‘은 피상적일 뿐 아니라 비현실적인 개념이다.

📎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언론에 ‘중립‘이나 ’객관성‘을 강조할 때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 말이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은 언론인들에게도 유효하다. ’진실 앞에 중립은 없다.‘

📎 가해자와 피해자, 피고와 원고, 합리와 불합리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대등하게 다루는 보도는 결코 '좋은 보도'가 아니다. 좋은 언론인은 중립과 객관성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시청자와 독자의 판단을 위해 시시비비를 가려줘야 한다. 어느 쪽 입장이 더 진실에 부합하는지, 더 합리적인지, 더 상식적인지 끊임없이 취재하고 기사에 반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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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 허의 내 갈 길 가는 에세이
안톤 허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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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 안톤 허

이 책이 어크로스 인스타그램 계정에 출간 예고를 통해 드러났을 때부터 호기심이 일었다. <저주토끼>, <대도시의 사랑법> 두 도서는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이라면 무조건 들어봤을테고, 심지어 읽어본 사람도 많을 것이다. 안톤 허 번역가는 이 두 도서의 번역가이며 이 책들을 세계에 알린 한국문학 번역가이다. 그리고 이 두 도서는 동시에 부커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에는 이 두 작가에게 에이전시도 없었기 때문에 안톤 허 번역가 스스로 고군분투하며 책을 만들어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을 당시의 그 뿌듯함과 벅참이 배가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한국문학 번역가는 손에 꼽을만큼 적은 수라고 한다. 이런 소수의, 희귀한 한국문학 번역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여정, 어린 시절의 이야기, 번역가로 살아가는 즐거움과 애환이 이 책에 모두 담겨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의 솔직한 언어들에 통쾌함마저 든다. 그의 언어를 통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호전적인 삶의 자세를 배웠다.

📎 누가 뭐라고 해도 번역은 무의식에서 이루어지는 듯하다. 특정 문구를 이러저러한 말로 번역한 이유는 문법이나 어학, 수사학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건 단순한 설명에 그칠 뿐 번역 자체는 오롯이 무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 부모님 말은 절대 들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기 인생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실수를 해도 자신의 실수를 하는 것이 낫다. 인생을 망쳐도 내 손으로 망쳐야 한다.

📎 가끔 작가들이 묻는다. 어떤 식으로 써야 차후 그 작품을 영역할 때 수월한지를. 진정한 작가라면 절대 번역을 인식하는 글을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작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비전을 가장 잘 현실화한 작품을 써내는 것이다. 독자는 잘 읽으면 되고 번역가는 제대로 번역하면 된다. 독서가 독자의 일이듯 번역은 번역가의 일이다. 이렇게 각자의 역할에 매진할 때 앞으로도 찬란한 한국문학의 향연을 모두 함께 만끽할 수 있으리라.

📎 그리고 그게 바로 번역의 매력이 아닌가 해요. 다른 번역가들, 다른 문학인들과 더불어 문학으로 다져진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 혼자 작업한다 해도 번역가는 근본적으로 작가의 텍스트와 공동 작업을 해야 하므로 번역부터 출판까지 문학 공동체 속에서 작업하고 생활하는 특권을 누립니다.

📎 그리고 잊지 마세요. 대학은 구성원을 학생과 교수로 구분하지만 교수도 일종의 학생이라는 사실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됩니다. 가르치는 행위야말로 학습의 한 형태가 아닐까요? 본인이 배운 것을 구사하거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만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이건 특히 번역가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입니다. 번역가야말로 궁극의 학습자, 궁극의 독자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번역가는 자신이 배운 것을 자신의 언어로 구사하니까요. 번역가의 모든 지식과 무지는 번역에서 드러납니다.

📎 번역을 할 때 제 영혼의 작은 파편이 번역에 실리게 되고, 독자는 그 파편에 반응하는 듯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좋아하고, 제가 의도했던 리딩을(정확히 말하면 제가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하는 리딩을) 그대로 쫓아가는 독자들을 보면 번역가로서 말로 형언하기 힘든 뿌듯함을 느낍니다. 물론 독자들은 스스로의 희망, 불안, 편견을 이런 ‘부재’의 공간에 투여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문학의 범주에 속하며 문학은 누군가 생각하듯 그렇게 나약하지는 않습니다. 훌륭한 문학은 깊은 독서와 번역을 통해 더 풍요로워지지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 수많은 번역가들 역시 번역가가 된 것을 후회합니다. 저 역시 이런 후회를 자주 하지만 이조차 정상적인 번역가의 자세라고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후회란 제 스스로가 얼마나 타락에 가까운지, 무지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 제가 스스로를 얼마나 모르는지 그리고 삶이란 얼마나 의미와 가능성으로 풍요로운지 상기시켜 주는 소중한 감정이니까요.

📎 번역가의 일은 결국 사전이 제공하지 못하는 의미를, 사전보다 더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언어는 불변의 존재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진정한 동족어’란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언어의 단어 간의 관계는 그 언어가 아무리 서로 가까워도, 아니 설령 사투리와 표준어 사이에서도 모두 가짜 동족어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언어 안에서의 특정한 단어가 다른 언어에서 100퍼센트 같은 뜻과 정서적 울림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번역은 단어에서가 아니라 단어 사이의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의미는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그 방향으로 손짓할 수밖에 없는 무엇입니다. 이런 절박한 손짓이 바로 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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