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생트의 정원 문지 스펙트럼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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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보리솔을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본문을 읽기 시작하면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에 놀라게 된다. 햇볕을 담뿍 받고 있는 농가의 모습, 여름에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돌로 된 야외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농가 사람들의 모습, 적당한 크기의 창문이 나 있는 집은 글을 읽어내려가는 즉시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문장을 읽고 있으면 농가의 옥수수와 과일 냄새가 나고, 공간을 마주하고 느끼는 상쾌한 기쁨이 느껴지는 듯하다.

생생히 그려낸 풍경만이 이 책의 매력이 아님을 말하는듯 비단결처럼 유려한 앙리 보스코의 문장은 순식간에 내 마음을 빼앗았다. 그야말로 글자를 눈으로 쓰다듬으며 읽었다. 놀라운 그의 상상력 덕에 427쪽을 지루하지 않게 시간에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책을 덮고나면 긴 여행을 떠나는 신비로운 꿈을 꾼 느낌이 든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섬세한 상상력으로, 꿈의 모험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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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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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에 있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피는 조해진 작가의 글을 사랑한다. 최근에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고 예전에 사두었지만 아직 펼쳐보지 않았던 <여름을 지나가다>를 역순으로 읽었다. <겨울을 지나가다>보다 비교적 어두운 말들이 가득한 이 책에서 조해진 소설가는 저마다의 이유로 소외된 사람들을 주목한다. 자꾸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감추고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손길을 건네며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제안한다. 책 속의 인물들은 그 손길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미래를 향해 무더운 여름 한가운데를 묵묵히 걸어나간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나도 또다른 미래가 기다릴 내일을 향해 한 걸음 걸어갈 힘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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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를 위한 루바토
김선오 지음 / 아침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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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바토Rubato는 템포를 의도적으로 느리게, 혹은 빠르게 연주하는 것을 이른다. 그리고 연주자가 곡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가 돋보이는 구간이다. 연주자가 순간 느끼는 감정을 마음껏 표현해내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내 방식대로 연주하듯 해석하며 읽었다. 작가의 마음을, 마음속으로 시인을 꿈꾸던 작가의 학창 시절을, 누하동에서 네 살이었던 자신을 만난 작가의 마음을. 글을 읽고 있으면 공기 중을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침착하고 단정한 글 같아 보이지만 안에 든 감정은 폭풍우처럼 몰아쳐 마음을 세게 때린다. 그리고 3부에 걸쳐 읽는 사람의 마음을 점차적으로 활짝 연다. 비슷한 사유를 하고 닮은 고민을 하는 타인이 있다는 사실은 때때로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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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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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생각하면 어두워요.” 이 책의 첫번째 소제목이다. 평범하게 자란 사람이 생각하는 어두운 미래와 가난한 사람이 생각하는 어두운 미래는 과연 같은 깊이를 지닐까. 어린 시절의 어둠은 자라는 동안에도, 몸이 완전히 성장한 뒤에도 영향을 준다.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된 이 책에 등장하능 아이들은 아직도 깊은 외로움과 무기력함과 결핍을 갖고 있음이 그 단편적인 예다. 저자는 감정에 호소하지 않으며 지켜본 그들의 성장 그대로를 보여준다. 객관적인 기록과 주관적인 감상이 한데 섞여 담담한 문장을 이루어낸다. 빈곤을 오로지 사회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좋은 정책만으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역으로, 긍정적인 마음가짐 하나로 가난을 이겨낼 수 있을까. 금전적인 문제로 기회를 박탈당하고 몇번이나 마음이 꺾이는 일이 생기더라도 한번 울고 털어버릴 수 있을까. 이 책은 빈곤을 사회 문제만으로도, 개인의 문제만으로도 치부하지 않는다. 정부와 사회의 제도만을 해결책으로 보지 않고 개인의 내면의 강함을 키우는 일을 여러번 강조하며 무너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 사색하고 스스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하는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가질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소개된 8명의 청년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눈앞의 기회를 떠나보냈을지,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주어진 환경 때문에 포기하고 단념하는 데 익숙해지고 자신을 탓하고 있을지 우리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가난으로 인해 누적된 실패와 불안감은 그들이 더욱 단단해지지 못하게 마음을 억눌렀을 것이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바르고 성실한 영성이 말한다. 우리는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의 어려운 소리를 찾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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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최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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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애를 밴 채 쫓겨난 어린 소녀, 프랑스 대사관과 부영사에 얽힌 백인들이 등장하여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전혀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 집단은 ‘상실’이라는 주제로 한데 묶인다.

대부분의 고전이 그러하듯 이 책은 한 번 읽는 걸로는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의도된 듯한 불분명함과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모호함 탓에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딘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 모호함이 우리를 책 속으로 이끌기도 한다. 뒤라스의 손길에 이끌려간 우리는 책 속에서 험난한 ‘그녀’의 여정에 동참하게 되며 그의 배고픔과 고독에 동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부영사>를 읽으며 뒤라스의 매력을 한 단계 깊이 느낄 수 있게 된다. 뒤라스 특유의 모호성이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글을 더욱 감각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결코 퍼즐을 맞추듯 이야기를 끼워 맞춰나가며 읽기는 불가능하지만, 퍼즐 조각을 찾는 과정에서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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