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검은 빗살들로 내 엉클어진 머리를 벗기는
태양
너와 헤어지던 날의 일기 따위
물을 체로 길어 나르며 벌받는 영원한 하루들에 대한
그들은 나를 이 페이지에서 저 페이지로
옮겨 적지 않을 거라고 한다
건조기 속을 영원히 돌아가는
더러운 빨래처럼.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물 한 방울 없이 바싹 마른 채로.
나는 밑줄을 긋는다 노란 형광펜으로
무감동하게 조용히.
빛은 건조한 혼이다. 가장 현명하고 가장 뛰어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라는데 믿기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거짓됨에 비해,
진실과 영혼은 너무 가볍구나
모시옷처럼
등 뒤에 듣는 날개처럼
양팔 저울의 접시에 고이는 네 눈물
너의 별 쪽으로 더 기울어지려고
광장 위 가을 하늘이 자꾸만 태어났다 쏟아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나에게는 끄적거린 시들이 남아 있고 그것들은 따듯하
고 축축하고 별 볼 일 없을 테지만 내게는 반쯤 녹아버린
주석주전자가 남아 있고 술을 받을 순 없지만 그걸 바라
보는 내 행한 눈이 있고 그 속에 내가 있고 회색 담벼락
에 머리를 짓이긴 붉은 페인트 붓처럼 희끗해진 머리카
락을 헝클어놓은 네가 있고, 젖은 바지들의 옷. 아침의 기
슭에 면도한 얼굴로 말끔하게 희망이, 오후가 되면 거뭇
거뭇 올라오는 수염 같은 절망이 남아 있고 또다시 아침.
부서질 마음의 선박과 원자로들이, 잘 묶인 매듭처럼 반
드시 풀리는 나의 죽음이 남아 있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꿈속의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 여자는 나였다가, 호연이었다가,
해변에서 옥수수를 구워 파는 노파였다가, 멍키포레스트 거리의어느 호텔에서 연인에게 안겨 나오던 사랑에 빠진 화사한 여자였다가, 해변에서 커다란 초록색 천을 털어대던 일본인 여자였다가,
이 되었다. 보건소 같은 덴 내일 가도 상관없다. 급할 게 하나도없다. 중얼대는 R의 얼굴에 신비스러운 미소가 번져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내 인생의 근본적인 결함이자 모든 트러블의 원인이었다. 앞엣것은 일을 키우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해 대개는 일주일 안에 나에게 상처로 돌아오고, 뒤엣것은 손쓸 수 없이 시간이 흘러간 뒤에 비가역적인 운명이 되었다. 두 개의 어긋남 중 더 심각한건 당연히 뒤늦게 알아채는 아둔함이었다. 이르면 한 시간 뒤나일주일 뒤에, 늦으면 삼 년이 걸리기도 했지만, 어떤 일은 십 년이흘러서야 알아챈 적도 있었다. 내 인생에선 늘 그랬다. 그래서 삶은 늘 어긋나고 미끄러지고 뒤엉켰다.
최후의 순간까지 내가 입안에 물고 갈 말과 마지막 순간에야 알아챌 어떤 진실이 내 인생에 숨어 있을 것을 생각하면 두피가 싸늘하게 식곤 했다. 그건 두려움과는 다른, 자신과생 자체에 대한좌절이고, 완전히 좌절한 뒤에야 눈을 뜰 외경심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