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전까지 문학계라는 곳이 무척 폐쇄적이고 권위적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문인들이 ‘몇 년도에 등단한 누구‘라는식으로 자기소개를 하고는 서로 누가 더 선배인지 따지지 않을까, 멋대로 공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군더더기 없이 ‘나누어떤 분야의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곧 나도
"소설 쓰는 장강명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설명하게 되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자기규정도 서서히 바뀌었으려나?
이동진 평론가의 독서 에세이 『밤은 책이다』에는 그가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뿔테 안경을 사게 된 계기가 나온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울적하게 지내다가 동네 안경점에 가서 빨간 테 안경을처음으로 걸치게 되는 이야기다. 그는 "변화의 순간은 일종의 의식(儀式)을 필요로 할 때가 많은데, 내게 그 의식은 빨간테 안경을 사는 일이었다"고 썼다.

막 집어 든 관계의 과학의 저자 소개 문구도 대단히 훌륭하다. 김범준 교수는 자기소개를 책 뒷날개까지 이어지도록 길게썼다. 이런 식이다. "논문 출판을 걱정했던 연구로는 「혈액형과성격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 윷놀이에서 업는 것과 잡는 것중, 어떤 것이 더 유리한지 살펴본 연구 등이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마무리한 연구 결과를 모두 학술지에 출판할 수 있었다."
저자에 대한 신뢰와 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면서, 통계물리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에 대한 부담은 줄어드는 일석이조의 소개다.
내가 드러내고 싶은 나의 모습과 출판사에서 원하는 문구가다른 경우도 있다. 특히 장르소설을 내거나 앤솔로지에 참여할때 그렇다. 나는 책날개에 있는 문장도 책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본문 내용과 어울리게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편집자들은 그보다는 무슨 문학상을 받았고, 무슨 문학상도 받았고 하는 내용을넣으려 한다. 그 심정도 이해는 간다. 그 편이 손톱만큼이라도 책판매에 더 유리하리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그런 문구가 자신에 대한 규정이 되어버릴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발랄한 상상력‘ 같은 딱지를 누가붙인다면, 글쎄, 나는 싫을 것 같다. 운신의 폭이 좁아지지 않을까. ‘발칙한 상상력‘은 더 나쁘다. 그 상상력의 수준이 감당할 수있는 범위에 있음을 거꾸로 암시한다. 발랄이고 발칙이고 간에30대 중반이 넘어가면 어색해지는 수식어다. 오래도록 소설을쓰고 싶은 야심 있는 젊은 작가라면 그런 문제를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다.

작가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아마 작품이 곧 자기소개가되는 경우이리라. 무슨무슨 소설을 쓴 사람으로 소개되는 것.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성공이 있을까.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작가와 작품이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난 요즘 하루키를 읽고 있어"
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다. 나도 내 소개가 될 수 있는 소설, 피와살이 있는 인간 장강명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기자일 때는 전화도 늘 "장강명입니다"라고 말하며 받았다. 그게사람을 넓게 많이 만나야 하는 작업 종사자의 비즈니스 매너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그냥 ‘여보세요‘ 하여 받는다. 10년 넘게인 습관을 바꾸려니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다.

최민석 작가의 에세이 『꽈배기의 맛』을 읽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도대체 왜 한국 소설가들은 프로필 사진을 찍을 때 옆으로 얼굴을 돌려 찍는 걸까, 다들 담합이라도 한 걸까"라는 대목에서다.
최 작가의 말이 옳다. 정말 한국 소설가들은 프로필 사진도 그렇고 인터뷰 사진도 그렇고, 측면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다. 90도까지는 아니고, 45도 정도로 얼굴이 돌아간 옆모습이 대세다. 고개는 살짝 들고 있고,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다. 소설가들은 사진 속에서 약간 슬픈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아련한표정을 짓고 있다.

이제는 저작권이 문제 되지 않는 다른 고화질 이미지 파일이 생겨서, 과도하게 보정한 그 프로필 사진은 쓰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정말 다행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가하자는 대로 따르는 편인데, 저 과도한 보정 사진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태도가 꼭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나한테 어울리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라고 고집부리는 게 바람직한것 같지도 않고,

한국소설가들의 생활은 팍팍한 게 맞다. 졸업 후 바로 전업 작가가 되겠다는 계획은 한사코 말린다. 다만 공포에 짓눌려 꿈을포기하거나 세상을 원망하는 예비 작가가 있다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다른 일면도 보여주고 싶다. 2020년대 한국 소설가는소한 한가지 점에서는 다른 나라 소설가나 20세기의 선배들보다 처지가 낫다. 21세기 한국이 세계적인 영화·드라마 강국인덕분이다. 빛과 그늘이 있는 사안일 텐데, 밝은 부분만 먼저 적어본다.

닭이 글은 2020년에 썼다. 2021년과 2022년에 영화나 드라마로joten만들어진 한국 소설은 다음과 같다. 정소현 작가의 단편 너를김영하 작가닮은 사람 구상희 작가의 『마녀식당으로 오세요의 단편 「아이를 찾습니다. 김혜정의 판타스틱 (KBS 드라마안녕? 나야!」의 원작), 김해원 작가의 장편 동화 오월의 달리기』(KBS 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원작), 강미강 작가의 옷소매 붉은 끝동, 정은궐 작가의 홍천기, 김언수 작가의 뜨거운 피 정한아작가의 친밀한 이방인(쿠팡플레이 오리지널 드라마 안나의 원작).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흥행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 영상물에대한 해외 제작사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덩달아 한국 소설의 영상판권 시장도 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형제정부의 탄압은, 음………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박근혜가 탄핵된 뒤 문화예술계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가 열심히 조사해 발표해준 덕분이다. 그 위원회가 출범하도록 힘을 보태고 그 안에서 민간 위원으로 활동하며 노력하신 선후배 예술인들께 감사드린다.
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몇몇 지원 사업에서 배제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이 싫어서』와 『댓글부대』가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지. 처음부터 ‘얘는 빼라‘는 지시가 있었던 경우도 있었고, 나중에 심사 표를 조작해 적격 판정을 부적격으로 바꾼 사례도 있었다. 정말 쪼잔하고 유치하다. 치사하고 기괴한 정권이었다.

그에 비하면 알지도 못했던 지원 사업에서 배제되어 입은 손실은 솔직히 하찮다. 정부가 이런저런 지원을 해주면 고맙지만그런 도움을 받는 게 작가로서 나의 당연한 권리라고 여기지도않았다. 그런 정부 지원에 정치적 개입이 이뤄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당위와 별개로 말이다.
그래서 나 역시 화가 났음에도 "영혼을 말살하는 행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라든가 "문학의 존재 근거를 흔드는 것" (한국작가회의 대변인) 같은 말을 들으면 좀 머쓱했다. 그대로 넘기면 결코안 되는 불의이고, 그런 표현이 나온 앞뒤 맥락도 있지만, 그래도머쓱했다. 내 영혼은 아직 멀쩡하다.
그 무렵부터 문학계나 문인 단체의 수사(修辭)에 신경을 쓰게됐다. 정부 지원 사업 관련 문제에 대해 문학계의 언어는 너무 당당하거나, 반대로 너무 비굴했다. 정부는 당연히 우리를 도와줘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굶어 죽는다는 식이었다. 그런 때 지원의이유로 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보는 기분은 착잡해졌다.

근본적으로는 철학의 문제다. 나는 적극적 복지에 순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배고픈 사람을 먼저 도와야 하고, 노약자와 장애인이 건강한 젊은이보다 우선이다. 그런데 배고픈예술인과 배고픈 비예술인도 구분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직업에 관계없이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창작 지원에 찬성한다. 거기에 더해 많은 예술인이 프리랜서로 일하니 고용보험 같은 사회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특수성을 더 살펴주면 좋겠다. 반면 자기 부담금 없는 예술인 연금같은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주저하는 마음이 든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누구나 웹소설 플랫폼에 글을 올려 작가 호칭을얻을 수 있는 시대에 예술인의 자격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국가가 그 기준을 정하는 게 바람직한가?

위에는 이런 고차원의 딜레마가 있고, 아래에서는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힌다. 그러다 보니 문화 지원 정책이 실행된 결과물을 보면 비판할 지점들이 늘 여러 각도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 사업을 추진하는 공무원들도 참 답답할 것이다. 나는 최근에국립한국문학관에 대해 그런 감정을 느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러니 좁힐 수 없는 시차를 두고 태어난 어떤 이를 사랑할 때, 행복한 순간 미안해지는 사람이 있을 때, 당신에게도 고쳐 쓸 편지 한 통이 있기를, 여기에서 만난 적 없는 서로의 젊음을 거기에선 나란히 겹쳐보기를. 편지를거듭 고칠수록 두 개의 삶이 다 애틋해지기를. 아마도 그사람과 당신은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인숙과 내가그러하듯이.

그 후로 누군가 미워지려고 할 때마다 속으로 마법의 문장, "그런 게 사람이죠"를 중얼거려보았다.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일제히 뛰기시작하는 사람들. 그런 게 사람이죠. 오늘 얼마나 피곤했으면 앉아 가고 싶을까. 라면 사리도, 공짜 귤도, 얼마나먹고 싶었으면, 불쑥 욕심이 났으면 그런데 그런 게 사람이죠.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곳에 제자리처럼 깃드는 것. 그게 내가 아는 문학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단행본 한 권 가격이 요즘 15,000원 안팎이다. 책이 한 권 팔릴 때 저자가 받는 돈, 즉 인세는 대부분 책값의 10퍼센트다. 그러니 한국문학의 기대주는 인세 외에 다른 수입이 없으면 기초생활 수급자 신세고, 한국 소설의 미래도 인세만으로는 먹고살수 없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계산기 두들기며 겨우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겠다. 대세 작가라도 집 사고 싶으면 강연과 방송에 열심히 나가야 하고.

이야기를 다시 앞으로 돌리면, 출판사 입장에서는 다음 책이손익분기점을 넘을 작가를 알아보는 일이 중요하다. 1만 2만부가 팔리는 작가는 자기 인세로는 외식 즐기기도 빠듯한 주제에출판계에서는 벌써 인기인이다. 출간 계약은 이미 여러 건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계약을 맺지 않은, 원고를 금방 받을 수있는 다음 기대주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눈에 띄는 신인에게지난번 책 얼마나 팔렸나요? 2쇄 찍었나요?" 하고 묻게 된다(여기서 팁 한가지. 신인이고 2쇄를 찍었다면 주변에 자랑하고 소문을 내라. 그래야 다음 책을 낼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작가들이 잘 모른다. 우선 출판사마다 인세를 입금하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어느 책이 다른 책보다 더 많이 팔렸는지 아닌지를 베스트셀러 순위로 가늠하는 일조차 힘들다. 크고 작은 서점에서 팔린 전국적인 도서 판매량 순위를 집계하는 기관은 없다. 여러 대형 서점에서 각각 주간 판매 순위를 발표하지만 서점 규모도 다르고잘 팔리는 책의 종류도 다르다. 심지어 순위 기준도 제각각이다.
어느 서점은 예약 판매를 순위에 포함시키고, 어느 서점은 지난4주간의 누적 판매량을 순위에 반영한다.

독서 문화의 베스트셀러 쏠림 현상은 더 심해질까 약해질까?
소규모 출판 혹은 1인 출판 사업자들은 이 시스템을 통해 예측분석이 가능해지면 모험을 더 많이 벌일까, 아니면 이 땅의 척박함을 확인하고 몸을 사릴까? 값싼 기획물은 늘어날까 줄어들까?
출판사는 사재기 유혹에 더 시달릴까 아닐까? 장기적인 영향과별도로 단기적인 충격이 크지는 않을까?

2021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출판유통통합전산망을, 대한출판문화협회는 도서판매정보공유시스템을 만들었다. 두 시스템 모두 도서 판매량을 전체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출판사와 저자에게만 제공하기 때문에, 위 글에서 내가 궁금히 여겼던 효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현 상태에서 도서 판매량을 전체 공개하면 순작용보다 부작용이 더 클 것 같다.
출판유통통합전산망과 도서판매정보공유시스템 공히 아직까지는 시스템 자체에 부족한 점이 많고, 이 문제를 둘러싼 출판계 내부 갈등도 심하다. 그래도 방향은 이 길이 맞는다. 서둘지 않고꾸준히 개선해나가면 좋겠다. 각종 공연 입장권 판매량을 집계하는 공연예술통합전산망도 정착에 시간이 꽤 걸렸다.

분위기가 훈훈했건 흉흉했건 강연을 마치면 녹초가 된다. 나는 서배스천 영거보다 더한 새가슴이라 강연을 마치고도 몇 시간이나 심장이 쿵쾅거려 밤에 잠을 못 이룬다. 어느 날 퀭한 몰골로 돌아온 나를 보고 아내가 전국을 누비는 약장수 같다며 짠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강연이 좋아졌다. 그런 길 위의 삶을 오래도록 남몰래 존경하고 또 동경했기에 약장수, 각설이, 풍물패, 서커스단, 엿장수, 두부장수, 칼갈이, 거기에 소설가도 추가요.

서글프게도 그런 손톱만 한 우위를 악용하는 이들이 있다. 강연료를 묻는 순간 연락이 끊기는 섭외자들이 꽤 많다. 공짜 강연을 바랐을 확률이 매우 높다. 강연장에 와서야 그 강연이 재능기부 행사였음을 알게 됐다는 작가나 번역가도 있다. 끝까지 강연료를 묻지 못했는데 나중에 입금된 금액을 보고 너무 소액이라 속앓이를 했다는 이는 부지기수.

이런저런 사연을 길게 적었으나 요즘은 이 문제를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매니지먼트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편하고깔끔하다. 강연 중개 시장도 형성되는 것 같고, 쉽고 자연스럽게양측 요구를 확인하고 의논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만들어진다는소식도 들린다. 이렇게 발전하나 보다.

슬프게도 강연료나 고료 입금이 늦어지거나, 담당자의 ‘착각‘으로 금액이 적게 입금되거나, 인세 지급이 누락되는 일을 꾸준히겪고 있다. 지난해도 겪었다. 한데 담당자의 ‘착각‘으로 돈을 더리 받는 경험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낑낑대며 추천사를 써줬더니 마음에 안 든다며 어느 부분을고쳐달라거나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초보 작가도 있다.
애프터서비스를 요구하는 이도 있다. 내 SNS 계정으로 자기 책을 홍보해달라는 것이다. 힘드는 일도 아닌데 그 정도쯤 못 도와주나 싶은 모양이다.
기분 좋게 추천사를 실은 적도 몇 번 있긴 하다. 내가 내 뜻대로 써서 어딘가에 올린 감상문을 보고 출판사가 연락해 온 경우다. 글 일부를 SNS에 활용하거나 2쇄부터 띠지에 넣고 싶다고했다. 그런 때에는 기쁜 마음으로 동의한다. 그런 상황을 제외하고는 앞으로 추천사 요청은 어지간하면 거절하려 한다.

내 경우 2010년대 중반에 맺은 출간 계약서부터 작가와 출판사가 2차 저작권 수입을 일정 비율로 나눈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작가 몫을 높게 책정한 출판사는 자신들이 작가의 이익을 그만큼 우선시한다고 말했다. 비율을 다르게 설정한 출판사에서는 그들이 소설 판권을 더 열심히 세일즈하고, 영화사와 협상할때 더 유리한 조건을 받아낸다고 설명했다. 다른 소설가들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듣기도 했는데 무슨 말이 옳은지는 알 수 없었다.

최근에는 자기 판권을 전문 매니지먼트 회사에 맡기는 작가들이 생겼다.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저작권 상담 센터나 예술인복지재단의 법률상담 카페에서는 창작자들에게 무료로 저작권 관련상담을 해주는데, 이런 공공서비스가 훨씬 더 확대되면 좋겠다.
우리 사이에 무슨 계약서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작가건 아니건.

2021년 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지원부 워크숍에 초청받아, 작가들에게 저작권 교육과 상담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얼마 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한국저작권위원회와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문학 분야 저작권 교육과 상담 프로그램을추진하기로 했다. 내 강연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뿌듯했다.

내가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는지를 잘 모르겠다. 전에나는 표지에 대해 목소리 내기를 가급적 꺼렸다. 까다로운 작가,
‘진상 저자‘가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은 표지가 시간이 지난다고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볼 때마다 ‘이건 아닌데‘ 싶고, 나중에는 화가 나기까지 하는 표지도 있다. 심해지면 그 책 자체가 싫어진다. 내가 별난 예외는 아닌 듯하다. 심지어 언론 인터뷰 중에 "이 책 표지 마음에안 들어요" 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작가도 있을 정도니.

몇 가지 편견을 더 풀어놓자면, 나는 한국 작가가, 특히 문학작가가 자기 책 제목을 영어 단어로 정하는 게 어째 어색하다.
『뤼미에르 피플』을 낸 사람이 떳떳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문장형 제목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이건 정말 논리적인 이유를 댈 수 없는 개인 취향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럼에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내 인생 책이고…………어떤 제목이 좋은 제목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는 설명이 있다. 첫눈에 눈길을 끌되 소설 내용을 다 알 듯한 느낌은 피해야 하고, 다 읽은 뒤에는 ‘아하, 이런 뜻이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부르기 좋고 검색하기 쉬워야 한다는 것 등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현실 세계는 소설만큼그리 개연성 있게 굴러가지 않는다. 요즘은 세계 전체가 ‘예측하기 어렵다‘의 수준을 넘어, 숫제 맥락들이 사라지는 느낌마저 든다. 프랭크퍼트는 개소리가 넘치는 게 우리 문화의 특징이라고주장하는데,
그와도 상관있지 않을까. 개소리쟁이들이 움직이는세상이라니, 프로 거짓말쟁이로서 참으로 유감이다.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직업 분야가 점점 더 세분화, 전문화되어서 리얼리즘 소설 쓰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생각도 한다. 문학의 힘이 약해진 데에는 그런 요인도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 현실 세계의 깊은 구석을 잘 살피지 못하게 되면서, 전문직업인 필자들의 에세이가 주목받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한 환경 변화 속에서 전업 소설가로서, 더 발로 뛰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직업 세계가 깊어진 만큼 사람을 찾아 섭외하고,
먼 곳에 있는 이와 연락하고, 관련 정보를 검색하는 기술도 발전했다. 한 세대 전의 소설가가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가야 얻을 수 있었던 답을 이제는 집에서 클릭 몇 번으로 찾을 수있다. 취재하는 소설가로 남자고 다짐해본다.

주제가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난감해하는 우리들이 한없이 순진하고 쓸데없이 심각한 걸까? 모터쇼나 가전쇼 무대에 오른 이들이 신제품을 발표하면서 주제가 뭔지를 말하는 데 어려워하는모습을 본 적이 없다. 다들 이번 신차의 콘셉트는 가족이라고, 이번 새 휴대전화는 휴머니티와 연결을 주제로 했다고 당당하게말한다. 제아무리 막장 드라마라도 홈페이지에 가보면 기획 의도가 ‘우리 시대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들 주제가 뭐냐는 질문이 뭐가 중요하냐는 분위기다.
주제? 가족이야. 가족 좋잖아. 됐지? 그러면 이제 우리 마케팅 포인트를 보라고. 이 차는 트렁크가 엄청 넓어! 가족을 위한 세단이라니까. 어쩌면 직업인의 자세는 바로 이래야 하는 것일지도모른다.

한편으로는 나 또한 누구를 비판할 처지가 아니다. 동료 작가들의 활동을 보면서 용기와 위안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심을 느끼는 순간이 자주 생겼다. 지금 당장 당신의 SNS 계정을 삭제해야 할 10가지 이유』의 저자 재런 러니어는 자신 역시 그랬다고 고백한다. 러니어는 소셜 미디어들이 집단 내 서열에 집착하는 인간 본능의 스위치를 켠다는 가설을 제안하기도 한다.

반면 ‘하면 도움이 될 테지만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는 정도의 유보적인 의견도 있었고, 홍보 목적으로 운영하는 계정은 어차피 별 매력이 없으니 좋아서 하는 게 아니면 안 하는 편이 낫다는 답도 있었다. 일반 단행본 작가라면 필수지만 소설가라면모르겠다, 인상적으로 운영되는 작가의 SNS가 딱히 없어 보인다는 답도 있었다.

지금 우리의 세계와는 미묘하게 달라진 평행우주를 배경으로 한다. 연합군이 독일을 이기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은 건국되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미국 알래스카의 자치 지구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실제로 미국은 그런 계획을 검토한 바 있었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 한국판에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도시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아니라 히로시마와 기타큐슈라고 서술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써서 소설 속 배경이 독자가 살고있는 세계가 아닌 평행우주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였다. 기타큐슈는 실제 역사에서도 미국이 원래 폭격 후보지로 삼았던 곳이다.
일본 출판사 측은 해당 대목의 기타큐슈를 나가사키로 바꿔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어릴 때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해배워온 일본 독자들은 이 설정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거라면서.
원폭 피해지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인 것은 한국 독자에게도 상식인데….… 이 서술은 나름 중요한 장치인데………. 결국 일본 출판사의 의견을 따르기는 했지만 그 판단이 옳았는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딱히 통계나 근거는 없지만 최근에는 드라마업계가 영화업계보다 소설가들을 더 열심히 물색하는 느낌이다. 내가 만난 프로듀서들의 설명은 이러했다. 첫째, 한국 드라마의 장르와 소재 폭이 넓어지면서 프로듀서들이 기존 작가군에서 외부 스토리텔러로 눈을 돌리게 됐다. 둘째, 작가가 연출자보다 우위에 있는 한국드라마 제작 환경을 바꾸고 싶어 하는 프로듀서들이 많다. 셋째,
인기 드라마 작가들의 몸값이 너무 높아졌다.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기괴한 현실이다. 수많은 지망생들이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며 분투 중인데 이토록 커다란 미스매치가 존재한다. 영상업계와 문학계에서 작가들의 데뷔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영화 제작자들이 왜 공모 방식을 선호하않는지 등에 대해서는 논픽션 『당선, 합격, 계급』에 취재해 쓴바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시길.

칼럼 원고가 쌓이면서 그런 우려는 점차 사라졌다. 내 식견이그사이 풍부해졌다기보다는, 다른 ‘지식인‘들의 처지도 나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기게 되어서다. 깐깐하게 따져보면 그네들 역시자기 전문 분야의 지식을 일종의 문학적 비유로 활용해 상식적인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가끔은 그들이 한 분야에깊이 몸담고 있기에 오히려 그 견해를 경계해야 할 때도 있다.

해외 도서전에 같이 참가하는 소설가들과는 친해질 수밖에 없다. 공항 로비에서 함께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같이 비행기에 오르고, 타지에서 저녁에 함께 맥주를 마시고, 푸석푸석한 얼굴로 호텔 조식 뷔페에서 커피도 함께 마시고, 그렇게 며칠씩 밥을 함께먹으며 "한국 소설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질문에 함께 난감해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 문학 동인을 하나 만들려고 몇몇작가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있다. 무리 지어 다니는 건 내 체질과맞지 않지만, 함께해야 힘이 실리는 일도 있는 것 같다. 결성하려고 하는 동인의 이름은 ‘월급사실주의‘다. 운동권문학, 민중문학과 거리를 두는, 우리 시대에 맞는 리얼리즘 노동문학 소설을 쓸작가들을 모은다. 먼저 소설가 열 명이 앤솔로지를 내는 일부터시작하려는데 지금까지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 모였다.
동인의 취지와 목표, 대강의 규칙을 설명하는 메일을 공들여 써서 친분이 있는 소설가들에게 보냈다. 내가 쓴 다섯 통의 메일을다 합하면 거의 단편소설 한 편 분량이었다. 어느 분은 "유료 뉴스레터로 만드셔도 되겠던데요" 하고 농담을 했다.
‘이분은 꼭 같이하고 싶다. 이분이라면 동참해주지 않을까‘ 하는소설가 중에 거절 의사를 밝힌 분도 있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이분이 관심 있어 할까 스스로도 고개를 갸웃하며 보낸 메일에 흔쾌히 참여 의사를 밝힌 작가님도 있었다. 모를 일이다. 동인의 첫 소설집이 일종의 문학적 선언이 될텐데, 책을 내고 나면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분들이 더 계시지 않을까 기대한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이는 절대로 한국문학계 특유의 문제가아니다. 카뮈도 프랑스 문단에서 왕따를 당했다. 실존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사르트르와 틀어지고 알제리 독립을 반대하며
‘마이 웨이‘를 고수한 점도 한몫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이 따돌림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20대에 『이방인』을 쓰고 40대에 노벨상을 받은, 젊고 잘생기고 인기 많은 소설가를 시기하지 않기가어려웠으리라(이 얘기는 유기환의 『알베르 카뮈』에 나오는데 재미도있고 의미도 있고 두껍지도 않은, 숨은 보석 같은 책이다. 카뮈의 팬이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나쁜 평가는 좋은 평가와 일대일로 상쇄되지 않는다. 우리는그렇게 생겨먹었다. 인간이 그렇게 진화했다. 내게 우호적인 사람들보다 나를 공격하려는 사람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안전에훨씬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인간은 부정 신호를 긍정 신호보다더 크게 받아들이며, 비판을 극복하는 데에는 대략 그 네 배의칭찬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를 나란히 세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투 무라카미스"라고도 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고, 하루키와류를 비교하지도 않는다. 두 작가의 위상이 너무 달라졌다. 나는 그 분기점 또한 『노르웨이의 숲』이었다고 본다.

『노르웨이의 숲』같은 작품을 가진 소설가에게는 누구도 ‘재기발랄한 젊은 작가‘라는 표현을 더는 쓰지 못한다. 책이 엄청난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온갖 폄하를 당하고 의심을 받았지만, 거기에는 절대로 깎아내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깎아내릴 수 없으리라.
37세에서 40세 사이에 하루키에게 일어난 일을 나는 혼자 권텀 점프‘라고 부른다. 물리학자들이 이 비유를 들으면 기겁하겠지만, 이미 경영학자들이 멋대로 그 양자 세계 현상을 경제 용어로 전용해서 쓰고 있으니까 뭐.

플롯에 대한 고민은 주제에 대한 고민에 비하면 약과다. 뭔가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게 뭔지 뚜렷이 짚을 수 없어서 헤맨기간이 길었다. 지금은 안다-2021년 한국 사회의 기원에 대해말하고 싶다. 지금은 제법 정연하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다행히.

이 원고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잘 팔릴지 아닐지. 내가 퀀텀점프를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실패할 수도 있고, 그러면마음에 얼마간 타격을 입겠지. 하지만 커다란 시합에 출전하는젊은 운동선수들과 달리, 소설가에게는 기회가 자주 오고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간도 상당히 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직업에 불쉿 업무는 어느 정도 포함돼 있다. 소방관들도 연말이면 자기 역량 평가 보고서 따위를 쓰면서 짜증 내지 않을까? 신문기자를 예로 들자면, 대체로 보람있는 직업이지만 어떤 부분은 확실하게 불쉿이다. 다음 날 뻔히공표될 정책 내용을 전날 미리 알아내려고 몸과 마음을 갈아취재해야 하는 날들이 있다. ‘발표 자료 우리가 하루 앞서 먼저 빼냈다! 우리 매체가 이렇게 취재력이 대단하다!‘ 이렇게 자랑하기 위해서.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헌신인가. 불쉿 업무와 불이 아닌업무는 이 질문으로 대충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케터나 평론가에게 헌신하는 게 소설가의 일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독자를 위해? 나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위로나 공감이소설가의 임무라고 보지 않는다.

내 아버지는 술집에서 친구에게 안정효의 하얀 전쟁』괜찮다. 한번 읽어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마치자마자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내가 안정효요"라며 인사를 해왔단다. 이후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아버지 성격상 ‘작가님 팬이에요! TV에 나온 것도 봤어요!‘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같고, 몹시 어색한 시간이 이어졌을 거 같은데……… 안정효 작가님은 그런 상황도 다 대비하고 "나 안정효요"라고 말을 거신 걸까? 아니면 설마 그저 기뻐서?

그렇게 몹시 생산 효율이 낮은 두 달을 보낸 뒤 결심했다. 다음해 여름에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문학관이나 문화관에 가보자. 가서 전기 요금 걱정 없이 에어컨 바람 펑펑 쐬면서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자. 가을에 멋진 원고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거다.

발표 뒤에는 작가들의 토론과 청중과의 질의응답 시간이다.
한국어로도 이야기하기 힘든 무지막지하게 심오한 주제를 놓고외국어 통역을 거쳐 대화를 하다 보면 논의가 산으로 가기 일쑤다. 몇몇 제3세계 발표자와는 한국어를 영어로 옮긴 뒤 그걸 그작가의 언어로 다시 통역해서 겨우 소통한다. 청중 중에는 마이크를 잡고 5분 이상 강의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는 분도 있는데이때는 사회자도 통역도 작가도 모두 난감해진다.

학술대회와 달리 문학포럼에서는 그런 연극도 중요하다. 그지루한 주제 발표를 끝까지 참고 견디며 진지하게 포럼에 참여하는 많은 독자들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곳이 독자를 응원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2단계 통역을 거치는 소설가와 시인의 대화는, 기묘한 치어리딩 행위이기도 하다는 것을
‘요즘 나 말고 또 문학을 읽는 사람이 있나‘라고 불안해하는독자들 앞에 서서 작가들이 ‘아직 문학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가열심히 쓰고 있습니다‘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어쩌면 그게 문학포럼의 진정한 목적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좀 덜 지루하게, 축제처럼 꾸미면 좋겠다.

요즘은 문학포럼들에 대해 단순히 지루하다는 불만 이상의 한층 더 깊은 회의감을 느끼곤 한다. 내건 간판은 거창하고 일견 시의적절하다. 사회 이슈에 어떻게든 대응하고 싶은, 문학의 역할을 말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이 그런 소망에 부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세미나 장소 어느 구석 자리에 앉아 있으면 민주주의의 후퇴에대해서든, 중산층 붕괴에 대해서든, 혹은 인공지능에 대해서든,
토론을 하면 할수록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나는문학의 힘을 믿으므로, 그런 때 무력한 문학인들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문학의 잘못이 아니라고, 우리가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내 소설을 각색한 연극 댓글부대」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보면서도 확실히 느꼈다. ‘와, 정말 좋은 연극이다‘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전자는 두 번째 관람할 때도 그랬고, 후자는 두 번 볼 엄두를 못 냈다. 극단 동과 남산예술센터에 이 자리를 빌어 죄송하다고, 사죄 말씀을 드리고싶습니다.

비유하자면 내게는 소설의 절정부를 만들어내는 일이 바둑에서 승부수를 던지는 일처럼 여겨진다. 그 수를 두고 나면 바둑의규칙에 따라, 이후로는 외길 수순이 펼쳐진다. 주인공이 결단을내리면, 세계를 움직이는 힘에 따라 그의 운명도 결정된다. 아마도 이게 나의 세계관이고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인 모양이다.
그 세계는 회색으로, 선과 악이 섞여 혼란스럽다. 한 인간의 내부도 그렇고 그를 둘러싼 외부 환경도 그렇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한 사람의 행복이라든가 정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고로 ‘이후로는 착한 사람들이 아무 일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늙어서 편안히 죽었답니다‘라는 결말도 없다. 그 우주에는그런 일을 보장해줄 하느님이 없다. 역사의 심판도 없다. 그 세계는 기댈 곳이 없다.

얼마 전에는 인터뷰를 하다가 ‘주인공들이 도망치는 결말이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은 소설이 시작할 때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가족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상업 영화의 캐릭터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나도, 주인공들도 어디로가야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억울하고 구도(求道)라 표현하려니 너무 쑥스러운데, 하여튼 우리는 길을 찾는다.

한데 내가 구상한 이 동화의 마지막 장면조차 해피엔딩은 아니다. 주인공 소녀가 회색 수면양말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소녀와사이가 서먹한 동생이나 사촌동생한테 수면양말을 넘겨주는 장면이 어떨까. 어린 독자들에게는 슬프고 아쉬운 일일 테지만, 그게 미학적으로나 주제 면에서나 좋을 것 같다.

이거 이렇게 써도 괜찮은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이게 마이클 코널리 개인의 배짱인지, 아니면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폭넓게 보호하는 수정 헌법 1조가 있는 나라의 힘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한국 소설가들은 외국 작가들에 비해 실존인명, 지명, 단체명을 쓰기 꺼리지 않나… 막연히 추측한다(혹이와 관련한 정량 분석을 실시한 논문이 있으려나). 한국 소설에서는대신 가상의 도시나 영문 알파벳 이니셜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오는 것 같던데……….

나는 진짜로 수정 헌법 1조가 이런 차이의 원인인가 싶어서창작물 관련 국내 명예훼손 소송 사례를 조사해본 적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식선에서 불만을 터뜨릴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 창작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예 명예훼손죄를 피해 갈 수는없었지만, 어지간하면 법원은 뭐라 간여하지 않았다.

본문에 언급한 소설은 지난해 출간한 재수사인데, 사실 이 작품에서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기관이나 건물 이름이 적지 않게 나온다. 한국에너지관리원‘이라든가, ‘희망교도소‘라든가, ‘신도림 엘리시움시티‘라든가. 내가 지어낸 서술을 실존 대상의 특징으로 독자들이 착각할 위험성이 있는 경우라 이렇게 명칭을바꿨다. 한편 내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현수‘과 ‘뤼미에르빌딩‘은 각각 서울 마포구 현석동과 신촌 르메이에르 3차 빌딩이모델이다. 역시 소설 속 묘사와 실제 모습은 많이 다르다.

「베스트셀러」는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걸로 안다. 표절 시비라는 게 일반 관객에게는 피부에 와 닿기 어려운 공포이기 때문이리라. 차라리 연쇄 살인마나 외계 생명체에 대한 공포가 더 실감 나지.

유명 미국 드라마와 자신의 원고가 비슷해 고민이라는 청중에게도 장은수 대표의 이 글을 언급하며, 같은 식으로 대답했다. 더구나 영상 매체와 활자매체 차이도 있으니 그리 염려할 필요는없을 것 같다고. 다만 단서를 하나 달았다. 추리소설에서 어떤 트릭이라든가, SF에서 독특한 세계관이 닮았다면 예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일관성 있게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특정 장르에서는 문장만큼이나 그런 장치가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 경우에는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작가의 말‘에서 시시콜콜 밝히는 편이다. 다소 비겁한 방어라는 기분도 드는데, 소설가가 그런 출처를 밝힐 의무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뭔가를 숨기는 게 아니다. 내가 그러는 데에는 솔직히 ‘작가의 말‘을 쓰기가 너무 싫다는 이유가 더 크다.
몇몇 소설이나 영화, 만화, 드라마 같은 콘텐츠의 표절 논란에대해서는 대중의 의혹 제기가 나로선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경우도 많았다. 창조적 변용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헛소리로 명백한 잘못을 덮으려 한 도둑놈들 때문에 그런 적대적 환경이 조성됐는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