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직업에 불쉿 업무는 어느 정도 포함돼 있다. 소방관들도 연말이면 자기 역량 평가 보고서 따위를 쓰면서 짜증 내지 않을까? 신문기자를 예로 들자면, 대체로 보람있는 직업이지만 어떤 부분은 확실하게 불쉿이다. 다음 날 뻔히공표될 정책 내용을 전날 미리 알아내려고 몸과 마음을 갈아취재해야 하는 날들이 있다. ‘발표 자료 우리가 하루 앞서 먼저 빼냈다! 우리 매체가 이렇게 취재력이 대단하다!‘ 이렇게 자랑하기 위해서.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헌신인가. 불쉿 업무와 불이 아닌업무는 이 질문으로 대충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케터나 평론가에게 헌신하는 게 소설가의 일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독자를 위해? 나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위로나 공감이소설가의 임무라고 보지 않는다.

내 아버지는 술집에서 친구에게 안정효의 하얀 전쟁』괜찮다. 한번 읽어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마치자마자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내가 안정효요"라며 인사를 해왔단다. 이후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아버지 성격상 ‘작가님 팬이에요! TV에 나온 것도 봤어요!‘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같고, 몹시 어색한 시간이 이어졌을 거 같은데……… 안정효 작가님은 그런 상황도 다 대비하고 "나 안정효요"라고 말을 거신 걸까? 아니면 설마 그저 기뻐서?

그렇게 몹시 생산 효율이 낮은 두 달을 보낸 뒤 결심했다. 다음해 여름에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문학관이나 문화관에 가보자. 가서 전기 요금 걱정 없이 에어컨 바람 펑펑 쐬면서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자. 가을에 멋진 원고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거다.

발표 뒤에는 작가들의 토론과 청중과의 질의응답 시간이다.
한국어로도 이야기하기 힘든 무지막지하게 심오한 주제를 놓고외국어 통역을 거쳐 대화를 하다 보면 논의가 산으로 가기 일쑤다. 몇몇 제3세계 발표자와는 한국어를 영어로 옮긴 뒤 그걸 그작가의 언어로 다시 통역해서 겨우 소통한다. 청중 중에는 마이크를 잡고 5분 이상 강의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는 분도 있는데이때는 사회자도 통역도 작가도 모두 난감해진다.

학술대회와 달리 문학포럼에서는 그런 연극도 중요하다. 그지루한 주제 발표를 끝까지 참고 견디며 진지하게 포럼에 참여하는 많은 독자들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곳이 독자를 응원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2단계 통역을 거치는 소설가와 시인의 대화는, 기묘한 치어리딩 행위이기도 하다는 것을
‘요즘 나 말고 또 문학을 읽는 사람이 있나‘라고 불안해하는독자들 앞에 서서 작가들이 ‘아직 문학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가열심히 쓰고 있습니다‘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어쩌면 그게 문학포럼의 진정한 목적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좀 덜 지루하게, 축제처럼 꾸미면 좋겠다.

요즘은 문학포럼들에 대해 단순히 지루하다는 불만 이상의 한층 더 깊은 회의감을 느끼곤 한다. 내건 간판은 거창하고 일견 시의적절하다. 사회 이슈에 어떻게든 대응하고 싶은, 문학의 역할을 말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이 그런 소망에 부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세미나 장소 어느 구석 자리에 앉아 있으면 민주주의의 후퇴에대해서든, 중산층 붕괴에 대해서든, 혹은 인공지능에 대해서든,
토론을 하면 할수록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나는문학의 힘을 믿으므로, 그런 때 무력한 문학인들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문학의 잘못이 아니라고, 우리가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내 소설을 각색한 연극 댓글부대」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보면서도 확실히 느꼈다. ‘와, 정말 좋은 연극이다‘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전자는 두 번째 관람할 때도 그랬고, 후자는 두 번 볼 엄두를 못 냈다. 극단 동과 남산예술센터에 이 자리를 빌어 죄송하다고, 사죄 말씀을 드리고싶습니다.

비유하자면 내게는 소설의 절정부를 만들어내는 일이 바둑에서 승부수를 던지는 일처럼 여겨진다. 그 수를 두고 나면 바둑의규칙에 따라, 이후로는 외길 수순이 펼쳐진다. 주인공이 결단을내리면, 세계를 움직이는 힘에 따라 그의 운명도 결정된다. 아마도 이게 나의 세계관이고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인 모양이다.
그 세계는 회색으로, 선과 악이 섞여 혼란스럽다. 한 인간의 내부도 그렇고 그를 둘러싼 외부 환경도 그렇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한 사람의 행복이라든가 정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고로 ‘이후로는 착한 사람들이 아무 일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늙어서 편안히 죽었답니다‘라는 결말도 없다. 그 우주에는그런 일을 보장해줄 하느님이 없다. 역사의 심판도 없다. 그 세계는 기댈 곳이 없다.

얼마 전에는 인터뷰를 하다가 ‘주인공들이 도망치는 결말이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은 소설이 시작할 때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가족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상업 영화의 캐릭터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나도, 주인공들도 어디로가야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억울하고 구도(求道)라 표현하려니 너무 쑥스러운데, 하여튼 우리는 길을 찾는다.

한데 내가 구상한 이 동화의 마지막 장면조차 해피엔딩은 아니다. 주인공 소녀가 회색 수면양말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소녀와사이가 서먹한 동생이나 사촌동생한테 수면양말을 넘겨주는 장면이 어떨까. 어린 독자들에게는 슬프고 아쉬운 일일 테지만, 그게 미학적으로나 주제 면에서나 좋을 것 같다.

이거 이렇게 써도 괜찮은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이게 마이클 코널리 개인의 배짱인지, 아니면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폭넓게 보호하는 수정 헌법 1조가 있는 나라의 힘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한국 소설가들은 외국 작가들에 비해 실존인명, 지명, 단체명을 쓰기 꺼리지 않나… 막연히 추측한다(혹이와 관련한 정량 분석을 실시한 논문이 있으려나). 한국 소설에서는대신 가상의 도시나 영문 알파벳 이니셜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오는 것 같던데……….

나는 진짜로 수정 헌법 1조가 이런 차이의 원인인가 싶어서창작물 관련 국내 명예훼손 소송 사례를 조사해본 적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식선에서 불만을 터뜨릴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 창작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예 명예훼손죄를 피해 갈 수는없었지만, 어지간하면 법원은 뭐라 간여하지 않았다.

본문에 언급한 소설은 지난해 출간한 재수사인데, 사실 이 작품에서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기관이나 건물 이름이 적지 않게 나온다. 한국에너지관리원‘이라든가, ‘희망교도소‘라든가, ‘신도림 엘리시움시티‘라든가. 내가 지어낸 서술을 실존 대상의 특징으로 독자들이 착각할 위험성이 있는 경우라 이렇게 명칭을바꿨다. 한편 내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현수‘과 ‘뤼미에르빌딩‘은 각각 서울 마포구 현석동과 신촌 르메이에르 3차 빌딩이모델이다. 역시 소설 속 묘사와 실제 모습은 많이 다르다.

「베스트셀러」는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걸로 안다. 표절 시비라는 게 일반 관객에게는 피부에 와 닿기 어려운 공포이기 때문이리라. 차라리 연쇄 살인마나 외계 생명체에 대한 공포가 더 실감 나지.

유명 미국 드라마와 자신의 원고가 비슷해 고민이라는 청중에게도 장은수 대표의 이 글을 언급하며, 같은 식으로 대답했다. 더구나 영상 매체와 활자매체 차이도 있으니 그리 염려할 필요는없을 것 같다고. 다만 단서를 하나 달았다. 추리소설에서 어떤 트릭이라든가, SF에서 독특한 세계관이 닮았다면 예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일관성 있게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특정 장르에서는 문장만큼이나 그런 장치가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 경우에는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작가의 말‘에서 시시콜콜 밝히는 편이다. 다소 비겁한 방어라는 기분도 드는데, 소설가가 그런 출처를 밝힐 의무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뭔가를 숨기는 게 아니다. 내가 그러는 데에는 솔직히 ‘작가의 말‘을 쓰기가 너무 싫다는 이유가 더 크다.
몇몇 소설이나 영화, 만화, 드라마 같은 콘텐츠의 표절 논란에대해서는 대중의 의혹 제기가 나로선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경우도 많았다. 창조적 변용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헛소리로 명백한 잘못을 덮으려 한 도둑놈들 때문에 그런 적대적 환경이 조성됐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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