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순간의 행위와 그 종자들을 일종의 에너지로 보면 이해는 쉬워진다. 일상생활 순간순간 우리는 몸과 말과 생각으로 온갖 종류의 에너지를 쌓고 있다. 본인이 하루 종일 쌓고 있는 에너지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 살펴본 적이 있는가. 선하고 맑은 에너지인가? 아니면 분노와 증오 짜증과 탐욕 등의 탁한 에너지인가? 번뇌의 에너지가 쌓이면 쌓일수록번뇌 장치들은 견고해지고 급기야 주체할 수 없는 번뇌의 충동으로 불 속으로 질주하는 불나방이 되고 만다.

일반적인 자원봉사나 기도도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봉사와 기도로전환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열반과 해탈은 성취된다. 이 모든 것은 반바라밀다를 얻을 때 가능해진다.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자신이 행한유루선에 대한 집착 등 모든 번뇌는 소멸되고, 순수한무루만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유식은 우리가 반야바라밀다를 얻지 못하는 원인을어디서 찾고 있으며,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반야바라밀다에 이른다고 통찰하고 있을까?
가야금 소리가 잘 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줄을 너무 세게 죄거나 너무 느슨하게 죄면 안 된다. 가야금마다 알맞은 줄의 세기는 각각 다르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반야바라밀다에 매진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도다다르다. 기복불교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禪에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을되돌려 자신의 참된 모습을 비추어본다는 뜻으로, 진리는 먼 곳에 있는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자등명의설법과 맥을 같이 하는 경구다.
여느 때처럼 스마트폰에 중독의 눈이 갈 때 그 순간의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을 ‘이것이 무엇이지?‘라는 의문을 갖고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떨까?

어두운 방에 등불이 타고 있다. 등불이 빛남으로써 저절로 자신의모습도 밝게 드러나 있다. 등불 자신의 모습이 밝게 드러난 것은 등불이 빛나고 있다는 이 하나의 사실 때문이지, 등불이 자신을 비춘다는별도의 작용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우리들은 ‘등불이자기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말에 의한 표현일 뿐이지 사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음은 이 등불과 같다. 실제로 있는 것은 나무의 형상을 띤 마음이밝게 나타나 있다는 이 사실 하나뿐이다. 등불이 빛나고 있는 것만으로등불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듯이, 나무의 형상을 띤 마음이 나타나 있는것만으로 나무라는 인식이 저절로 일어난다. 마음이 자신을 인식한다는 별도의 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편의상 ‘나무의 형상을 띤마음이 자기를 인식한 결과 나무라는 인식이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을뿐이다.

값비싼 보약보다도 마음 편한 것이 건강에는 더 중요하다. 대학생시절 어머니에게 안부인사 드리러 고향에 간다는 나의 말을 들은 한의사 한 분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것보다 어머니에게 더 좋은 보약은 없습니다. 기쁨을 주는 자식이 부모님에게는 최고의 보약입니다."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 한마디, 이것으로 가족과 직장 동료와 이웃에게 최고의 보약을 선사할 수 있다.

예불문에 나오는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에서 ‘지심은 지극한마음이고, ‘귀명歸命‘은 목숨을 다해 그 하나만을 향한다는 뜻이다. 그그러므로 ‘지심귀명‘은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 하나만 하는, 혼을 다한정성이며 절절함이다. 참으로 우주를 움직일 정도의 정성이다. 지심귀명례란 이런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올리는 것이다.
예불문의 마지막은 "오직 바라오니, 다함없는 불법·승 삼보시여,
대자대비로 저의 이 지극한 예를 받으시고 그윽한 가피를 내리시어, 모든 중생이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지심귀명으로 예불한 에너지가 내 몸을 만들고 내 주위를 만들고 이 세상을만드는 데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몫을 한다.

불교에서는 눈앞에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의 모습을 보는 마음을 안이라 하고,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을 이식이라 한다. 새 한 마리가나무 위에서 청명하게 지저귀고 있다. 이때 새의 모습을 보는 마음이 안식이고, 새가 내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 이식이다.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이 같은 시점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을까?" 하는질문이 된다.

무상정은 외도나 범부가 닦는 선정으로, 이 선정을 닦으면 무상천이 태어난다고 한다. 멸진정은 성자가 닦는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의식만 작용하지 않지만, 멸진정에서는 의식뿐 아니라 말나식도 작용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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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벌어지는 이 일들을 순간순간 아무런 조작 없이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라. 우리는 진리의 숭배자가 아니라 쓸데없는 생각과 집착의 숭배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업장 덩어리의 허망한생만남을 것이라는위기감도 들 것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하는 행동이 즉신설법, 곧 온몸으로 법을설하는 것이다. 한 수행자가사랑하는 남편을 사고로 잃은 부인을 만났다. 연못 바닥까지 온통 달빛뿐이듯이, 그의 온 몸과 마음은 그 부인의슬픔 그 자체가 되어 눈물을 글썽이며 "부디 어려움을 이겨내시고 힘을 내십시오" 하며 합장하고 머리 숙였다. 어떤 가식도 의도도 없었다.
자신의 행동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이것이바로 온몸으로 법을 설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이 속에다 있다.

「우빠니샤드』의 철인들은 우리가 행하는 행위는 그에 합당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힘을 남기고 이 힘은 존속된다고 생각했다. 『우빠니샤드』에서 ‘업(karman, 業)‘이라는 용어는 주로 행위의 결과로 남게 되는이 힘을 지칭한다. 『우빠니샤드』 시대에 이르면, 이 업에 의해 태어남과죽음을 반복하는 윤회가 있게 되며, 윤회의 와중에서 다음 생에 어떤몸을 받을까도 이전 생에서의 업이 선이냐 악이냐에 의해 결정된다고하는 통찰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윤회는 고통이며, 이 속박에서의해방인 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통찰도 이루어지고 있다.

"윤회란 이전 생의 오온(정신과 육체)을 원인으로 하여 또 다른 오온이라는 결과가생한다고 하는 태어남의 반복을 뜻하지만, 이 생에서 저생으로 옮겨가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다."
인과관계에 의한 새로운 오온의 이어짐은 있으나, 아뜨만과 같이다음 생으로 변함없이 영속하는 연속체는 없다는 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용수는 여러 비유를 든다. 그중의 하나가 경전복창의 비유다. 경전을 가르칠 때 스승이 먼저 경전 한 구절을 독송하면 제자는 그것을 듣고 복창한다. 이때 스승의 말이 스승의 입에서 제자의 입으로 그대로 옮겨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의 복창은스승의 말 이외의 다른 곳에서 온 것도 아니다.

어떤 것들이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다면 그것으로써 양자는 공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이 논지는 중관파의 시조 용수(150~250경)에서부터 후기의 거장 샨따라끄시따(Santaraksita, 725~788경)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았다. ‘불일불이‘는 자성 없이도 온갖 작용이 일어나 세상만사가성립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공은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이기 때문에 도리어 세계는 성립한다.

공의 진리 그대로 사는 도인은 산을 보면 산이 되고, 물을 보면 물이 된다. 산이 되었을 때 온 천지에 산만 있을 뿐, 도인은 없다. 산에 대한 분별이 없기에 비교 대상이 없는 산은 이미 산이 아니다. 일이 있으면 그냥 일하고 졸리면 푹 잔다.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는 철저히 죽는다. 집착이 없어 순간순간 눈앞의 그것과 하나가 되지만 그것에 물들거나 머물지 않으며, 불변의 나(我)와 사물이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중생인 나에게서 너란 항상 내 안경을 통해서 들어온 너다. 너를 본다는 것은 곧 나를 본다는 것이다.

세상에 똑같은 나뭇잎은 없다. ‘목련 잎‘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나뭇잎. 하지만 그중에 모양과 색깔과 결이 똑같은 잎은 단 한 쌍도없다. 한 장의 목련 잎도 시간의 간격을 두고 보면 다 다르다. ‘목련 잎‘
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똑같은 나뭇잎은 어느 경우에도 없다. 이름은 그야말로 이름일 뿐이다.
성인 남성의 평균 세포 수는 약 60조 개라 한다. 이 세포들은 약 3개월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된다고 한다. 매 순간 어마어마한 수의 오래된 세포들이 죽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세포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몸은 한순간도 정지함이 없이 시시각각으로 태어나고 죽는 생멸의 과정에 있다. 내 정신이라는 것도 몸과 다를바 없다. 매순간 새로운 느낌과 생각, 감정들이 일어났다가 소멸한다.
어제도 나이고 오늘도 나라고 확신하며 이 확신에 근거해서 온갖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위에서 살펴본 대로 내 몸과내 정신이 동일한 두 상태를 갖는 경우는 결코 없다. 어제도 나이고 오늘도 나이기 위해선 어제부터 오늘까지 변치 않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나에게는 ‘나‘라는 이름이 예상케 하는 ‘변치않는 무엇‘, 즉 ‘자성‘ 또는 ‘아뜨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름만 ‘나‘다.

따라서 부파불교가 생각한 이상적 경지는 궤적을 그리는 점의 완전한 소멸이었던 반면, 대승불교의 그것은 태어나고 죽는 궤적 위에 있으나 궤적을 초월한 점들의 연속이었다. 중생의 눈에는 그의 궤적이 있으나 본인에게는 궤적이 없는, 만물과의 경계가 허물어진 찰나적 점들이생멸하는 연속이 대승불교의 보살이 살아가는 삶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고 자신 속의 갈애와 만나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갈애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 비난을 하거나 칭찬을 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그것과 만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뭔가를 재잘거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온갖 것에 대해 ‘좋다 싫다‘, ‘밉다 곱다‘, ‘옳다 그르다‘ 이러쿵저러쿵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이러한 재잘거림과 그것을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 일련의 행동·말·생각이 바로 반응이다.
이런 반응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통절히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하여 반응들이 멈출 때 있는 그대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가 보이면 강압에 의한 인위적인 질서가 아니라 자연스런순리가 마음에 생긴다. 긍정도 떠나고 부정도 떠난, 칭찬도 떠나고 비난도 떠난 중도中道의 순리.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우리 모두는 어디를 향해 치달리고 있는 것일까?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죽는 날까지 과연 이렇게 살다가 임종을 맞으면, 그때 후회는 없을까?
우리는 갈애와 무명에 휘둘려 사는 가련한 중생들이다. 상당한 지위와 부를 소유하고 있어도 욕망의 유혹에는 대부분 약하다. 이래서는안 되는데 하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끄달려가다가 어느새 닮기싫었던 사람이 되어있기도 한다.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분노에 두 눈이 충혈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튀어나오거나, 죄의식에 짓눌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자포자기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모두 늦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말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대는 단지모든 생각을 내려놓기만하면 된다."
괴로움과 파멸로 가는 흐름을 진정 멈추고자 하는 자는 그 성공과실패를 미리 따지지 않는다. 아니, 그에게는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진정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고자 하는 자는 깨달을 가능성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더구나 이곳은 깨달은 자가 몇 명인데 저곳은 몇 명이라는 식으로 깨달은 자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며 그 우열을 논하는 데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좁은방 안에서 독사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온 몸과 마음은눈앞의 독사의 움직임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독사를 피한 사람의 숫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독사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쓸 겨를이 없다.

내가 행하는 몸짓 하나, 말 한마디, 생각 한자락은 결코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반드시 자신과 성질이 동일한 종자를 나의 아뢰야식에남기고 사라진다. 그 종자는 없어지지 않고 아뢰야식에 남아있다가 때가 갖추어지면 그에 맞는 결과를 가져온다. 악담이 남긴 종자로 인해나는 또다시 악담을 하게 되고 괴로움의 과보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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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라고 했다.
연기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물을 컵에 부으면 물은 컵 모양이 된다. 컵속의 물을 바가지로 옮겨 부으면 물은 금세 바가지 모양이 된다.
물이 처음부터 컵 모양을 한 것은 아니다. 컵이라는 조건(인연)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컵 모양이 생겨난다. 그러나 한번 컵 모양을 했다고해서 컵 모양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바가지로 옮겨 부으면,
다시 말해 컵이라는 조건은 없어지고 바가지라는 새로운 조건을 만나면 물은 순식간에 바가지 모양으로 변한다. 컵 모양이든 바가지 모양이든 그 조건에 의존해야만 있을 수 있고, 조건이 소멸하면 그 모양도 함께 소멸하니 연기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런데도 한때의 자기 모습을 영원히 고정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 곧 어리석음이다. 마치 물은 늘 컵 모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이 어리석음에 의해 괴로움의 씨앗이 뿌려진다. 자신의 어느 한 모습에 집착하는 순간이 괴로움을 부르는 순간이다. 나의 진짜 모습은 사장도 아니고 일용직 노동자도 아니다. 그러나내가 사장이라고 고집하는 순간, 회사 밖에서도 사장님 대우를 받지 못하면 화가 난다. 여기 오곡도에서 지게를 져야 할 때도 사장님인 내가대단한 하심을 했다고 은근히 뽐내며, 그 하심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사장‘이라는 한 모습에 집착하기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괴로움을 겪는 것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이 말은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의 이치 그대로 사는 사람이 연기의 냄새라고는 전혀 풍기지 않으면서, 살아있는 연기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이 말을 외워서 사람들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똑같은 말이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질은 천양지차다. 울림이 없는 말, 그 허황함을 통절히 안 사람은 선택에 눈을 뜬다.

그런데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이와 유사한오해를 하고 말았다. 그 오해의 연장선에서 구축된 그들의 사고방식은상당 부분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많이 닮아 있다. 설일체유부를 줄여서
‘유부有部‘라고도 부른다. 대승의 공사상은 유부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공을 이해하는 것은 유부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일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진단하고 바로 잡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성은 연기하지 않는 것이며, 연기와는 양립될 수 없는 모순 관계에 있다. 연기를 인정하면 자성이 부정되고, 자성을 인정하면연기가 부정되는 관계다. 연기하는 것은 조건이 충족되는 한도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에 조건 여하에 따라 변화·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성은 연기하지 않는 것이므로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고정불변이고 영원히 존속한다. 결론적으로, 자성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면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것‘을 말한다.

눈앞의 삶이 진정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올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산다. 행복이라는 안경도, 불행이라는 안경도 끼지 않고 그냥 맨눈으로 삶을 본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름에 필요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지금 여기 눈앞의 일에 온전히 몰두한다. 돌아올 대가를 생각하고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몰두가 될뿐. 더 행복해지려는 탐욕도 없고, 불행이라는 생각이 드리우는 우울한 그늘도 없다.

결론적으로 유부는 번뇌를 마치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는 도둑과같이 생각했다. 내 마음과 번뇌가 결합했다는 것은 도둑이 침범한 것이요, 양자가 분리되었다는 것은 도둑을 쫓아낸 것과 같다. 도둑이 침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도둑은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다. 도둑인 번뇌는 항상 존재하는 자성이다. 반면에 공사상에 의하면, 번뇌는 공이며자성이 아니다. 눈병 환자의 눈에는 있지도 않은 헛것이 보이듯이, 어리석음 때문에 번뇌가 아닌 것을 번뇌로 보고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초상집에는 액운이 늘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부의 사고방식이다. 있지도 않는 액운을 어리석은 마음으로 스스로 만들어 괴로워한다는 것이 공사상의 통찰이다.

의발을 찾으러 쫓아온 당신. 선악도 생각하지 말고, 고귀함과 추함도 생각하지 말고, 모든 규정과 결론에서 자유롭게 되어라. 이때 당신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가? 알았거든지금 당장 보여봐라.
과거의 결론에 붙들리지 말고 진실만을 보라. 지금 본진실을 결론으로 고정시키지 말고 다음의 진실을 보라. 말뚝에 매어둔 끈에 발이묶인 새는 한없이 펼쳐진 창공을 자유롭게 날지 못한다. 결론의 끈에 발이 묶인 초라한 새가 되지 말라.

"말의 허구(희론)를 초월한 불멸의 부처를 말로써 허구화하는 그들모두는 말의 허구에 손상 받아 여래를 보지 못한다(『중론』 제22장 제15송)"
라는 게송이 시사하듯이, 말이 주인 행세를 하면 사물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해 괴로움이 발생한다. 말의 속박인희론에서 자유롭게 될 때 모든편견에서 벗어나 비로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때 해탈이 있다. 희론은 공에서 소멸한다.

세상은 말에 의해 움직이고 말에 의해 질서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말의 허구(회론)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이 현실을 완전히 떠나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현실에서 말의 허구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그것이 해탈이다. 그곳에서는 죽었던 유와 무가진실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렇게 진리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풍광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하지만 우리 중생에게는 ‘색즉시공‘이 없이는 ‘공즉시색‘도 없다.

공을 생각할 때 두 가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공은 이론적으로는무자성을 뜻하고, 실천적으로는 무집착無착하지 않는 것이 공을 실천하는 것이다. 집착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모든 것에는 그렇게 집착할 만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상은고정불변의 요강이 아니기 때문에, 즉 무자성이기 때문에 요강에 대한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진실에 맞는 당연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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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켜면 소리가 난다. 없던 소리가 생겨난 것이다. 소리가 나는 것이 연기의 ‘기본‘에 해당한다. "소리가 왜 날까?"를 설명하는 부분.
이 연기의 ‘연‘으로, 소리가 날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라디오 소리가 나기 위해선 실로 무수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중에서 세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전파를 보내는 방송국이 있어야 하고, 전파를 수신하는 라디오라는 기계, 그리고 라디오를 켜는 사람의 동작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쟁이 나서 방송국이 파괴되었다고 하자. 그런데도 계속 나는 라디오 소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방송국이파괴되면 왜 나던 소리가 멈출까? 라디오 소리는 방송국에 의존해야만비로소 나기 때문이다. 만약 라디오 소리가 방송국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방송국의 파괴와 관계없이 소리는 계속 날 것이다. 따라서 의존해야만 있을 수 있는 것은, 다시 말해 조건이 갖추어질 때만 생겨나는 것은영원할 수 없다.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결과물인 그것도 함께 변하모든 것은 그렇게 생겨이다.
거나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기‘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이지만,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함께 변하고 소멸한다‘이다. 이때의 조건을 불교에서는 인연이라고 한다. 우주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연기의 이치에 따라 생겨나고 소멸한다. 연기의 이치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만고불변의 진리다.

멀리 소나무 숲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가 날 만한 조건이갖추어져 소리가 난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항상 있다가 지금 홀연히 여기에 나타나서 소리가 난다고 하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을 것이다. 이 소리가 더이상 나지 않을 때, "그 소리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대답하겠는가? "그 소리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이 갖추어졌기에 소리가 났다가 인연이 다했기에 그냥 소멸했을 뿐입니다."라고대답한다면 연기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파초 잎에 내리는 비는 근심이 없는데
단지 사람이 그것을 보고 애간장을 태운다.
비는 아무런 근심 없이 그냥 파초 잎을 적신다. 파초 잎에 떨어지는 자신을 정당화하려고도 않고 일부러 그 의미를 찾지도 않는다. 바람이 불면 파초 옆의 잡초에 떨어졌다가 날이 개면 발버둥치는 일 없이 깨끗이말라버린다. 인연이 되면 또다시 파초 잎에는 비가 내린다.
실제로 있는 세계는 인연이 되어 파초 잎에 비가 내렸다가 인연이다 되면 흔적도 없이 마르는 세계밖에 없다. 이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의세계다.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 이 세계를 슬픔과 기쁨 등 갖가지 색깔로 물들여 놓고는,
세계는 애초부터 그런 색깔로 되어 있다고 착각한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신비로운 바람을 맞듯이 이 생각 저 생각하지말고 그냥 눈앞의 일을 직시해보라. 화가나는 일이 있다면, ‘이런 이유로 화를 낼 수밖에 없다‘ 하면서 화를 내는 자신의 정당성을 되뇌지 말라. 화를 내는 것에 대해 자꾸 설명하거나 이유를 붙이면 화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럴수록 화의 뿌리는 더 깊어져 끝날 줄을 모른다. 화에서 도피하지도 말라.

편하면 편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살며, 죽음이 오면 죽는 것이다. 그날그날이 좋고 나쁨을 초월한, 매일매일이 그날밖에 없는 유일한날, 절대적인 날, 최고의 날이다. 이렇게 사는 자에겐 매 순간이 모든 것이므로 매 순간이 곧 영원이다. 순간순간의 장면은 편하거나 아프거나하는 무상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서 그는 영원을 산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진리인 연기 그대로 살기 때문이다.
인연이 되어 생겨날 때는 100퍼센트 생겨나고, 인연이 다 되어 소멸할때는 100퍼센트 소멸한다. 인연의 세계에서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는가? 살아갈 때는 100퍼센트 살고 죽을 때는 100퍼센트 죽는다. 결코 미진함과 씁쓸한 뒷맛을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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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꿈이라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남편이아내가 죽는 꿈을 꾼다면 꿈은 깊은 무의식의 적개심을 나타낼 수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이 아내와 헤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을의미할 수도 있다. 남편은 아내와 헤어질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유일한 해결책으로 그녀의 죽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경우에 꿈은 증오의 표현이 아니다. 혹은 억압되어 있다가 꿈에서 일시적으로 표현된 분노가 일으킨 죽음의 소망일 수도 있다. 세 가지 해석을통해 각각 다른 문제들이 열린다. 첫 번째 해석의 문제는 증오와 그증오를 억압한 이유일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의 문제는 남편이 더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세 번째 해석의 문제는도발이 이루어지는 현실의 상황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자기 분석을 빠른 만병통치약보다는 자기발전에 도움이 되는 진정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해도 지금부터 죽는날까지 이 작업을 꾸준히 해나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없다. 다음 장에 묘사되는 것처럼 어떤 문제에 대해 열심히 매달려분석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자신에 대한 분석 작업이 뒤로 밀려나는 시기도 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이런저런 놀라운 반응을 관찰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자기 인식의 과정을 지속해 나갈 테지만 분명 적극성은 줄어들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일이나 단체 활동에 열중할 수 있고, 외부의 어려움에 맞서 싸울 수있으며, 이런저런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 단순히정신적인 문제에 덜 시달릴 수도 있다. 이런 시기에는 단순한 삶의과정이 분석보다 더 중요하며, 그 나름대로 발달에 이바지한다.

우리는 감정과 무관한 생각은 쉽게 무시할 수 있지만 감정적인경험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클레어는 자신의 분노와 상실감을 이해하는 데 명백히 실패했지만 상실감에 대한 감정적 경험은 그녀의마음속에 남아 그 뒤에 시작한 분석의 경로를 따라가는 데 중요한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유로운 연상과 이해 사이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다면, 도대체 언제 연상을 멈추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아무런 규칙이 없다. 생각이 자유롭게 흐르는 한 인위적으로 연상을 막는 것은 무의미하다. 조만간 그 생각들은 그보다 더강한 무언가에 의해 저지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호기심을 느끼는 지점에 도달하면 멈출 것이다. 아니면 갑자기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무언가를 밝혀줄 감정적인 화음이 떠오를 수도 있다. 혹은 단순히 생각이 바닥났을 수도 있다. 이는 저항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그 주제를 샅샅이 살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또는 자유롭게 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더 늦기 전에 기록을 살피며 해석을 시도해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자기 분석을 하는 사람은 과학적 걸작을 만들고자 하는 대신 자신의 해석이 자신의 관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
단순하게 자신의 주의를 끌고, 자신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신 내면에 감정적인 화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뒤따라가야 한다.
스스로의 자발적인 관심에 이끌려 가게 둘 만큼 유연한 사람이라면, 그 순간에 자신의 이해에 가장 접근하기 쉬운 주제나 현재 다루고 있는 문제와 일치하는 주제들을 직관적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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