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라고 했다. 연기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물을 컵에 부으면 물은 컵 모양이 된다. 컵속의 물을 바가지로 옮겨 부으면 물은 금세 바가지 모양이 된다. 물이 처음부터 컵 모양을 한 것은 아니다. 컵이라는 조건(인연)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컵 모양이 생겨난다. 그러나 한번 컵 모양을 했다고해서 컵 모양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바가지로 옮겨 부으면, 다시 말해 컵이라는 조건은 없어지고 바가지라는 새로운 조건을 만나면 물은 순식간에 바가지 모양으로 변한다. 컵 모양이든 바가지 모양이든 그 조건에 의존해야만 있을 수 있고, 조건이 소멸하면 그 모양도 함께 소멸하니 연기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런데도 한때의 자기 모습을 영원히 고정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 곧 어리석음이다. 마치 물은 늘 컵 모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이 어리석음에 의해 괴로움의 씨앗이 뿌려진다. 자신의 어느 한 모습에 집착하는 순간이 괴로움을 부르는 순간이다. 나의 진짜 모습은 사장도 아니고 일용직 노동자도 아니다. 그러나내가 사장이라고 고집하는 순간, 회사 밖에서도 사장님 대우를 받지 못하면 화가 난다. 여기 오곡도에서 지게를 져야 할 때도 사장님인 내가대단한 하심을 했다고 은근히 뽐내며, 그 하심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사장‘이라는 한 모습에 집착하기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괴로움을 겪는 것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이 말은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의 이치 그대로 사는 사람이 연기의 냄새라고는 전혀 풍기지 않으면서, 살아있는 연기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이 말을 외워서 사람들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똑같은 말이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질은 천양지차다. 울림이 없는 말, 그 허황함을 통절히 안 사람은 선택에 눈을 뜬다.
그런데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이와 유사한오해를 하고 말았다. 그 오해의 연장선에서 구축된 그들의 사고방식은상당 부분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많이 닮아 있다. 설일체유부를 줄여서 ‘유부有部‘라고도 부른다. 대승의 공사상은 유부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공을 이해하는 것은 유부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일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진단하고 바로 잡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성은 연기하지 않는 것이며, 연기와는 양립될 수 없는 모순 관계에 있다. 연기를 인정하면 자성이 부정되고, 자성을 인정하면연기가 부정되는 관계다. 연기하는 것은 조건이 충족되는 한도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에 조건 여하에 따라 변화·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성은 연기하지 않는 것이므로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고정불변이고 영원히 존속한다. 결론적으로, 자성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면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것‘을 말한다.
눈앞의 삶이 진정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올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산다. 행복이라는 안경도, 불행이라는 안경도 끼지 않고 그냥 맨눈으로 삶을 본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름에 필요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지금 여기 눈앞의 일에 온전히 몰두한다. 돌아올 대가를 생각하고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몰두가 될뿐. 더 행복해지려는 탐욕도 없고, 불행이라는 생각이 드리우는 우울한 그늘도 없다.
결론적으로 유부는 번뇌를 마치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는 도둑과같이 생각했다. 내 마음과 번뇌가 결합했다는 것은 도둑이 침범한 것이요, 양자가 분리되었다는 것은 도둑을 쫓아낸 것과 같다. 도둑이 침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도둑은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다. 도둑인 번뇌는 항상 존재하는 자성이다. 반면에 공사상에 의하면, 번뇌는 공이며자성이 아니다. 눈병 환자의 눈에는 있지도 않은 헛것이 보이듯이, 어리석음 때문에 번뇌가 아닌 것을 번뇌로 보고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초상집에는 액운이 늘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부의 사고방식이다. 있지도 않는 액운을 어리석은 마음으로 스스로 만들어 괴로워한다는 것이 공사상의 통찰이다.
의발을 찾으러 쫓아온 당신. 선악도 생각하지 말고, 고귀함과 추함도 생각하지 말고, 모든 규정과 결론에서 자유롭게 되어라. 이때 당신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가? 알았거든지금 당장 보여봐라. 과거의 결론에 붙들리지 말고 진실만을 보라. 지금 본진실을 결론으로 고정시키지 말고 다음의 진실을 보라. 말뚝에 매어둔 끈에 발이묶인 새는 한없이 펼쳐진 창공을 자유롭게 날지 못한다. 결론의 끈에 발이 묶인 초라한 새가 되지 말라.
"말의 허구(희론)를 초월한 불멸의 부처를 말로써 허구화하는 그들모두는 말의 허구에 손상 받아 여래를 보지 못한다(『중론』 제22장 제15송)" 라는 게송이 시사하듯이, 말이 주인 행세를 하면 사물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해 괴로움이 발생한다. 말의 속박인희론에서 자유롭게 될 때 모든편견에서 벗어나 비로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때 해탈이 있다. 희론은 공에서 소멸한다.
세상은 말에 의해 움직이고 말에 의해 질서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말의 허구(회론)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이 현실을 완전히 떠나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현실에서 말의 허구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그것이 해탈이다. 그곳에서는 죽었던 유와 무가진실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렇게 진리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풍광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하지만 우리 중생에게는 ‘색즉시공‘이 없이는 ‘공즉시색‘도 없다.
공을 생각할 때 두 가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공은 이론적으로는무자성을 뜻하고, 실천적으로는 무집착無착하지 않는 것이 공을 실천하는 것이다. 집착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모든 것에는 그렇게 집착할 만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상은고정불변의 요강이 아니기 때문에, 즉 무자성이기 때문에 요강에 대한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진실에 맞는 당연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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