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순간의 행위와 그 종자들을 일종의 에너지로 보면 이해는 쉬워진다. 일상생활 순간순간 우리는 몸과 말과 생각으로 온갖 종류의 에너지를 쌓고 있다. 본인이 하루 종일 쌓고 있는 에너지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 살펴본 적이 있는가. 선하고 맑은 에너지인가? 아니면 분노와 증오 짜증과 탐욕 등의 탁한 에너지인가? 번뇌의 에너지가 쌓이면 쌓일수록번뇌 장치들은 견고해지고 급기야 주체할 수 없는 번뇌의 충동으로 불 속으로 질주하는 불나방이 되고 만다.
일반적인 자원봉사나 기도도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봉사와 기도로전환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열반과 해탈은 성취된다. 이 모든 것은 반바라밀다를 얻을 때 가능해진다.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자신이 행한유루선에 대한 집착 등 모든 번뇌는 소멸되고, 순수한무루만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유식은 우리가 반야바라밀다를 얻지 못하는 원인을어디서 찾고 있으며,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반야바라밀다에 이른다고 통찰하고 있을까? 가야금 소리가 잘 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줄을 너무 세게 죄거나 너무 느슨하게 죄면 안 된다. 가야금마다 알맞은 줄의 세기는 각각 다르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반야바라밀다에 매진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도다다르다. 기복불교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禪에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을되돌려 자신의 참된 모습을 비추어본다는 뜻으로, 진리는 먼 곳에 있는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자등명의설법과 맥을 같이 하는 경구다. 여느 때처럼 스마트폰에 중독의 눈이 갈 때 그 순간의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을 ‘이것이 무엇이지?‘라는 의문을 갖고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떨까?
어두운 방에 등불이 타고 있다. 등불이 빛남으로써 저절로 자신의모습도 밝게 드러나 있다. 등불 자신의 모습이 밝게 드러난 것은 등불이 빛나고 있다는 이 하나의 사실 때문이지, 등불이 자신을 비춘다는별도의 작용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우리들은 ‘등불이자기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말에 의한 표현일 뿐이지 사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음은 이 등불과 같다. 실제로 있는 것은 나무의 형상을 띤 마음이밝게 나타나 있다는 이 사실 하나뿐이다. 등불이 빛나고 있는 것만으로등불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듯이, 나무의 형상을 띤 마음이 나타나 있는것만으로 나무라는 인식이 저절로 일어난다. 마음이 자신을 인식한다는 별도의 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편의상 ‘나무의 형상을 띤마음이 자기를 인식한 결과 나무라는 인식이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을뿐이다.
값비싼 보약보다도 마음 편한 것이 건강에는 더 중요하다. 대학생시절 어머니에게 안부인사 드리러 고향에 간다는 나의 말을 들은 한의사 한 분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것보다 어머니에게 더 좋은 보약은 없습니다. 기쁨을 주는 자식이 부모님에게는 최고의 보약입니다."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 한마디, 이것으로 가족과 직장 동료와 이웃에게 최고의 보약을 선사할 수 있다.
예불문에 나오는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에서 ‘지심은 지극한마음이고, ‘귀명歸命‘은 목숨을 다해 그 하나만을 향한다는 뜻이다. 그그러므로 ‘지심귀명‘은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 하나만 하는, 혼을 다한정성이며 절절함이다. 참으로 우주를 움직일 정도의 정성이다. 지심귀명례란 이런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올리는 것이다. 예불문의 마지막은 "오직 바라오니, 다함없는 불법·승 삼보시여, 대자대비로 저의 이 지극한 예를 받으시고 그윽한 가피를 내리시어, 모든 중생이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지심귀명으로 예불한 에너지가 내 몸을 만들고 내 주위를 만들고 이 세상을만드는 데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몫을 한다.
불교에서는 눈앞에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의 모습을 보는 마음을 안이라 하고,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을 이식이라 한다. 새 한 마리가나무 위에서 청명하게 지저귀고 있다. 이때 새의 모습을 보는 마음이 안식이고, 새가 내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 이식이다.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이 같은 시점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을까?" 하는질문이 된다.
무상정은 외도나 범부가 닦는 선정으로, 이 선정을 닦으면 무상천이 태어난다고 한다. 멸진정은 성자가 닦는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의식만 작용하지 않지만, 멸진정에서는 의식뿐 아니라 말나식도 작용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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