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벌어지는 이 일들을 순간순간 아무런 조작 없이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라. 우리는 진리의 숭배자가 아니라 쓸데없는 생각과 집착의 숭배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업장 덩어리의 허망한생만남을 것이라는위기감도 들 것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하는 행동이 즉신설법, 곧 온몸으로 법을설하는 것이다. 한 수행자가사랑하는 남편을 사고로 잃은 부인을 만났다. 연못 바닥까지 온통 달빛뿐이듯이, 그의 온 몸과 마음은 그 부인의슬픔 그 자체가 되어 눈물을 글썽이며 "부디 어려움을 이겨내시고 힘을 내십시오" 하며 합장하고 머리 숙였다. 어떤 가식도 의도도 없었다.
자신의 행동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이것이바로 온몸으로 법을 설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이 속에다 있다.

「우빠니샤드』의 철인들은 우리가 행하는 행위는 그에 합당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힘을 남기고 이 힘은 존속된다고 생각했다. 『우빠니샤드』에서 ‘업(karman, 業)‘이라는 용어는 주로 행위의 결과로 남게 되는이 힘을 지칭한다. 『우빠니샤드』 시대에 이르면, 이 업에 의해 태어남과죽음을 반복하는 윤회가 있게 되며, 윤회의 와중에서 다음 생에 어떤몸을 받을까도 이전 생에서의 업이 선이냐 악이냐에 의해 결정된다고하는 통찰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윤회는 고통이며, 이 속박에서의해방인 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통찰도 이루어지고 있다.

"윤회란 이전 생의 오온(정신과 육체)을 원인으로 하여 또 다른 오온이라는 결과가생한다고 하는 태어남의 반복을 뜻하지만, 이 생에서 저생으로 옮겨가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다."
인과관계에 의한 새로운 오온의 이어짐은 있으나, 아뜨만과 같이다음 생으로 변함없이 영속하는 연속체는 없다는 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용수는 여러 비유를 든다. 그중의 하나가 경전복창의 비유다. 경전을 가르칠 때 스승이 먼저 경전 한 구절을 독송하면 제자는 그것을 듣고 복창한다. 이때 스승의 말이 스승의 입에서 제자의 입으로 그대로 옮겨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의 복창은스승의 말 이외의 다른 곳에서 온 것도 아니다.

어떤 것들이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다면 그것으로써 양자는 공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이 논지는 중관파의 시조 용수(150~250경)에서부터 후기의 거장 샨따라끄시따(Santaraksita, 725~788경)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았다. ‘불일불이‘는 자성 없이도 온갖 작용이 일어나 세상만사가성립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공은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이기 때문에 도리어 세계는 성립한다.

공의 진리 그대로 사는 도인은 산을 보면 산이 되고, 물을 보면 물이 된다. 산이 되었을 때 온 천지에 산만 있을 뿐, 도인은 없다. 산에 대한 분별이 없기에 비교 대상이 없는 산은 이미 산이 아니다. 일이 있으면 그냥 일하고 졸리면 푹 잔다.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는 철저히 죽는다. 집착이 없어 순간순간 눈앞의 그것과 하나가 되지만 그것에 물들거나 머물지 않으며, 불변의 나(我)와 사물이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중생인 나에게서 너란 항상 내 안경을 통해서 들어온 너다. 너를 본다는 것은 곧 나를 본다는 것이다.

세상에 똑같은 나뭇잎은 없다. ‘목련 잎‘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나뭇잎. 하지만 그중에 모양과 색깔과 결이 똑같은 잎은 단 한 쌍도없다. 한 장의 목련 잎도 시간의 간격을 두고 보면 다 다르다. ‘목련 잎‘
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똑같은 나뭇잎은 어느 경우에도 없다. 이름은 그야말로 이름일 뿐이다.
성인 남성의 평균 세포 수는 약 60조 개라 한다. 이 세포들은 약 3개월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된다고 한다. 매 순간 어마어마한 수의 오래된 세포들이 죽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세포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몸은 한순간도 정지함이 없이 시시각각으로 태어나고 죽는 생멸의 과정에 있다. 내 정신이라는 것도 몸과 다를바 없다. 매순간 새로운 느낌과 생각, 감정들이 일어났다가 소멸한다.
어제도 나이고 오늘도 나라고 확신하며 이 확신에 근거해서 온갖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위에서 살펴본 대로 내 몸과내 정신이 동일한 두 상태를 갖는 경우는 결코 없다. 어제도 나이고 오늘도 나이기 위해선 어제부터 오늘까지 변치 않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나에게는 ‘나‘라는 이름이 예상케 하는 ‘변치않는 무엇‘, 즉 ‘자성‘ 또는 ‘아뜨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름만 ‘나‘다.

따라서 부파불교가 생각한 이상적 경지는 궤적을 그리는 점의 완전한 소멸이었던 반면, 대승불교의 그것은 태어나고 죽는 궤적 위에 있으나 궤적을 초월한 점들의 연속이었다. 중생의 눈에는 그의 궤적이 있으나 본인에게는 궤적이 없는, 만물과의 경계가 허물어진 찰나적 점들이생멸하는 연속이 대승불교의 보살이 살아가는 삶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고 자신 속의 갈애와 만나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갈애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 비난을 하거나 칭찬을 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그것과 만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뭔가를 재잘거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온갖 것에 대해 ‘좋다 싫다‘, ‘밉다 곱다‘, ‘옳다 그르다‘ 이러쿵저러쿵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이러한 재잘거림과 그것을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 일련의 행동·말·생각이 바로 반응이다.
이런 반응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통절히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하여 반응들이 멈출 때 있는 그대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가 보이면 강압에 의한 인위적인 질서가 아니라 자연스런순리가 마음에 생긴다. 긍정도 떠나고 부정도 떠난, 칭찬도 떠나고 비난도 떠난 중도中道의 순리.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우리 모두는 어디를 향해 치달리고 있는 것일까?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죽는 날까지 과연 이렇게 살다가 임종을 맞으면, 그때 후회는 없을까?
우리는 갈애와 무명에 휘둘려 사는 가련한 중생들이다. 상당한 지위와 부를 소유하고 있어도 욕망의 유혹에는 대부분 약하다. 이래서는안 되는데 하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끄달려가다가 어느새 닮기싫었던 사람이 되어있기도 한다.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분노에 두 눈이 충혈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튀어나오거나, 죄의식에 짓눌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자포자기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모두 늦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말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대는 단지모든 생각을 내려놓기만하면 된다."
괴로움과 파멸로 가는 흐름을 진정 멈추고자 하는 자는 그 성공과실패를 미리 따지지 않는다. 아니, 그에게는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진정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고자 하는 자는 깨달을 가능성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더구나 이곳은 깨달은 자가 몇 명인데 저곳은 몇 명이라는 식으로 깨달은 자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며 그 우열을 논하는 데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좁은방 안에서 독사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온 몸과 마음은눈앞의 독사의 움직임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독사를 피한 사람의 숫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독사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쓸 겨를이 없다.

내가 행하는 몸짓 하나, 말 한마디, 생각 한자락은 결코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반드시 자신과 성질이 동일한 종자를 나의 아뢰야식에남기고 사라진다. 그 종자는 없어지지 않고 아뢰야식에 남아있다가 때가 갖추어지면 그에 맞는 결과를 가져온다. 악담이 남긴 종자로 인해나는 또다시 악담을 하게 되고 괴로움의 과보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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