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만 새로운 말을 찾는 존재가 아니다. 무언가에 매혹되고 사랑에 빠진 이라면 누구나 이 세계와 말 사이의 어긋남에 복수하는 심정으로 말들 사이를 배회하고 순례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도 그런 까닭에서 만들어진 소설임이 확실하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 진연주는 고답파parnassiens의 후예다. 만일 아름다움에도 최상급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소설 속 인물들이 탐하던 그것 아닐까 생각된다.
그녀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에서 태어났다. 하루가저물고 있었다. 하늘은 타올랐고 바람은 숨죽인 채 잠들 곳을 찾아 대지를 배회했다. 땅을 어루만지는 갈대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기지개를 켰다. 가늘고 흰 팔이공작 깃털처럼 펼쳐졌다. 평평한 젖가슴과 마른 다리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머리카락은 꿈틀거렸고 얼굴에는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팔다리를 천천히 주의 깊게 움직여보았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인 것처럼 팔다리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움직이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표오 한숨을 내쉬고는 한 발을 내딛고 또 한 발을 내딛으면서 걷기 시작했다.
일도 하고 싶지 않은 아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아무. 아무일도 하고 싶지 않은 나. 너무 많은 일을 하는 나. 아무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번번이 아무를 나중에 이해했고 아무라는 행간에서 자꾸 달아났고 너무 많은 말들을 필요로 했고, 늘어놓은 아무의 말을 한데 모은다.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 못 하기 위해 아무의 말을 한데 모은다. 말은 죽고, 말의 죽음은 어디에나 있고, 말을 죽이고, 아무에게 가기 위해 말을 죽이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은 것을 듣고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어.갈 수 있다. 나는 웃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를 주시하면서 기억하면서 길을 간다. 나는 길을 간다. 예정된 상실을 조금씩 미루면서, 나는 길을 간다.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과 함께.
엄마의 의중 모를 말들은 나를 당혹게 만들었으나 그것이 불화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는데, 이번은 좀 예외다.시작은 사과였다.올해도 어김없이 문덕 이모가 햇사과를 보내왔다. 대구에서 과수원을 하는 이모는 매년 가을이면 첫 수확한 사과를 서울로 부쳤다. 엄마와 아버지 둘이 먹기에는 양이 많아 늘 반을 갈라 내게도 나누어주었다. 해서 가을엔 연례행사처럼 본가에 들러 사과도 받아가고 무른 과실로 만든 잼도 맛보았다. 올해는 또 언제 사과를 가지러 가야 하나 되는 날짜를 꼽는데 엄마가 불쑥 본인이 가져다주겠다며 이사한 집의 주소를 부르라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