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때요? "누구 있잖아, 친구일 때는 좋았는데 같이 일할 일이 생기니까 좀 힘들어. 몰랐는데 그런 면이 있더라" 이건 ‘그런‘ 뒷담화인가요, 아닌가요? 이 정보는 아마도 말하는 이의 주관적 사실에 가깝겠죠. 영 터무니없는 가십은 아닌 말하는 이의 경험이니까요. 이렇게 이야기를 할 경우에는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게 되죠. 이를테면 그 ‘누구‘가 일로 만나면 누구에게나대체로 좀 힘든 사람인 경우, 또는 ‘누구‘의 일하는 스타일이 ‘나‘에게만 유독 맞지 않는 경우. 아니면 그 ‘누구‘가원래는 안 그러는데 하필 ‘나‘와 일할 때 개인적으로 힘든일이 있어서 ‘나‘를 배려하지 못했을 경우.

그런 마음으로, 격렬한 마음으로 새 일자리에, 하얗고오렌지빛인 가게에 적응을 해나가던 때. 내가 안팎이 두조각 난 채로 정신이 팔려 있을 무렵 남자친구는 바람이났다. 내 마음에 정신이 팔려 그의 마음이 두 조각이 나는 걸 보지 못한 것이다. 인생에서 바람이 났다는 표현은정말이지 쓰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 상대는 나도 아는 친구였다. 그녀에게도 만나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럼에도 쿵짝이 잘 맞는다고 언젠가부터 둘이서 자주 보더라니. 둘이서만 만나도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나는 한때 남자친구인 사람이 내 친구에게 보낸 여러가지 문장들, 모두 다른 문장이지만 결국 나 아닌 그 애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미의 문장들을 발견하고너무 놀란 나머지 내가 매일매일 만드는 흰 반죽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물렁물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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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 사실을 각자의 친구 한 명씩에게 이야기한내 친구들은 잘못이 없을지도 몰라. 그러나 내가 친구들을, 내 믿음을 도둑맞은 건 사실이지. 생겼던 아이를 지우고 그 애들에게 사과를 받으면, 다 이전으로 되돌리면남자친구가 날 안아줄 줄 알았어. 나는 그 사람을 좋아했거든. 그런데 아니었어. 든든하다 여겼던 것 중 그 무엇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다 잃어버렸어. 뭘 믿는법을 싹 까먹은 거야. 그건 저주 같아.
그렇게 말하고 하늘을 보고 누워 있던 이요는 몸을 돌려 하늘을 등지고 엎드렸다. 햇볕에 배는 바싹 말랐는데등은 아직 물기가 남아 있어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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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자기보다 한참 나이 어린 작가 밑에서보조로 일하게 된 딸이 느닷없이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인 기분이었다. 그녀는 딸에게 일은 안 하고 집에서 살림만 할 생각이냐고 핀잔을 늘어놓았다. 딸은 잠자코 쳐다봄으로써 그녀가 일관되지 않은 기준으로 매번 비난을 퍼붓고 있음을알아차리게 했다. 묵직한 낭패감이 느껴지면서 여섯 살의 딸이자신에게서 분리될 때의 두려움이 떠올랐다. 딸은 그때부터 줄곧 도로 한복판에 홀로 서 있기를 선택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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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되어 표면이 매끄러워진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이 동전들을 오래 간직하게 될 것 같았다. 내게 오백만원은 없지만 어쩌면 백만원일지 모르는 동전 네 개와 언제나 십구만팔천원이 든 지갑이 있다는 걸 잊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뜨다 만 스웨터도 있고엄마의 노래가 담겼을지도 모를 테이프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엄마가 내게 슬픔만 남겨두고 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엄마가 잡아준 손의 느낌을 기억했다. 삶에 냉담해질 이유가 많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그 기억 때문이었다.
영주 이모가 갑자기 생각난 듯 현관에 서서 비타민을 챙겨먹고 우리에게도 한 알씩 주었다. 곧 영주 이모가 "가자" 하고 말했고 나주 이모가 "다음에 또 와"라고 하며 내 손을 꼭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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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뼈처럼 말라버린 포도알을 만지작거리며 서 있는 수영과 윤주를 두고 나는 마른잎을 밟으며 끝까지 걸어가봤다. 죽어가면서도 햇빛을 받은 탓인지 마른 가지와 나뭇잎에서 희미하게포도 단내가 났다. 휴게실도 없어 비좁은 탈의실 소파에서 겨우 숨을 고르던 한오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봤을까. 길쭉한 철제 캐비닛이 보였겠지. 그중 하나에 한오의 이름이 적혀 있고그애가 출근할 때 입고 온 옷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더 늦기전에 창구로 돌아가야겠다 싶어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기도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초조해져서 가슴이 더 적어왔겠지. 허리를 꽉 죄던 유니폼 조끼는 단추라도 풀러두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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