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명을 난도질한 미치광이 도살자가 잡힌 적 있습니다. 그가시•신의 남은 부분에 한 짓은 입에 담지도 못할 만큼 끔찍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즉시 어떤 허튼소리 하는 인간이 텔레비전에 나와 그 미치광이의 인권이 걱정된다고 합니다. 그렇죠? 그는 그 일에서 부당함을 우려낼 수 있습니다. 승자의 위치에 서면 늘 ‘나쁜타인에게 신놈‘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아니까요. 자본가가 늘 ‘나쁜 놈‘인 것처럼 말이죠. 누가 그런 식으로 말할까요? 어떤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 옷은 어디서 났을까요? 어느 회사가만들었습니다. 그 회사는 어디서 자금을 구했을까요? 자본가에게서 구했겠죠? 그 사람이 보도를 따라 걷고 있습니다. 누가 그 보도블록을 깔았을까요? 어느 회사가 깔았습니다. 그가 자기 차에 앉아 있습니다. 누가 그 차를 만들었죠? 아침에 우유를 마시려고 합니다. 그 우유는 어디서 났을까요? 어느 회사로부터 샀습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그 모든 것을 살 돈은 대체 어디서 났을까요?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았습니다. 그들이 일자리를 제공했으니까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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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일은전혀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죽는 과정에서몸 밖에 있게 되어 몸이 사라질 때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죽음도 경험하지 않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죽지 않았는데 어떻게 죽음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에고의 죽음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육체라고 생각하지만사실은 에고가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조차 신에게 항복하려는 자발성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굉장한 공간을 통해, 존재하는 그것harWhich Is
"의 장려함이 내비쳐집니다. 여러분은 결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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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신에 대한 신념 체계가 있으니까요. 신에 대해 이야기하면 각자의 신념체계에 따라 신이라 믿는 바를 만들어 내서 나름의 상상과 무지를 투영한 것을 추구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신을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잊어버리고 자기 의식의 근원source을 발견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불성‘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것을 ‘불성 Buddha natur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또한 오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공‘old‘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없는 것Nothing‘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이제 ‘무‘가 실상이라고 믿고 그것을진심으로 추구해서 숙련자가 되면 ‘무‘를 궁극의 것으로 경험하게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힘은 그렇게 아주 강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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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는 자연주의를 거부하면서 우울한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이 스타일은 극도로 개인적이고, 고통받는 ‘나‘의 확장이며, 그 중심에는 예술가와 사회의 대립이 있다. 토마스 만은 자아의 딜레마라는 이런 낭만주의적 개념을 심오하게 표현한 마지막인물이다. 지버베르크 같은 낭만주의 이후 예술가는 비개인적인멜랑콜리 스타일로 작업한다. 이제는 기억과 과거의 관계가 중심에 놓인다. 기억의 가능성, 지속의 가능성과 망각의 유혹이 충돌한다. 베케트는 이 대립 관계를 탈역사적인 형태로 제시했다. 또 다•른 형태인 역사에 천착하는 버전은 지버베르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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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영화는 각각 독립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들을3부작으로 간주한다면, (첫 번째 영화인) <루트비히>가 (두 번째 영화인) <카를 마이>보다 (세 번째 영화인) <히틀러, 독일영화>에 더 많은이미지를 공급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 세트와 배우를 사용해 찍은 <카를 마이>의 일부 장면은 <루트비히> 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야심 차고 심오한 히틀러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선형적이고 재현적인 극 형식에 가깝다. 그러나 파스티셰를 좋아하는 예술가가 으레 그러듯이 지버베르크는 리얼리즘이라고 하는것에 별 느낌이 없다. 파스티셰 작가의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환상의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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