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오늘의 종교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의 주인공으로오늘의 세계를 누리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전생을 묻거나 내생을알고자 하면, 침묵으로 답변하신 큰 스승이시다. 연기법칙과 중도사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여주시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서 윤회하는 존재이다[生輪廻] 살아서 극락정토를 누리는 주체임[現生淨土]을 잊지 말일이다.

‘당생윤회(當生輪廻) 현생정토(現生淨土)‘이다. 사바세계를 떠나 정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곳이 곧 정토요 만나는 사람이 그대로 부처이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다. 선지식은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요 착한 벗인 것이다. 깨달음을 신비주의로 몰아가지말 일이다.

깨닫기 이전에도 사람이요 깨달은 이후에도 사람이다. 깨닫기 이전엔 ‘눈, 귀, 코, 입, 몸, 뜻‘으로 경계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는사람이지만, 깨달은 이후엔 오온(五蘊)과 육경(六)에서 집착하지않는 자유로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임제록』에서 말하고있는 참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상과 철학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간다. 그러므로 우리네 삶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고 빛과 어둠이 뒤엉키며종교의 신앙마저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열 명의 애인이 있어도채울 수 없고 주머니가 빵빵해도 허기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집착하지 말 일이다.
사람이 앓는 모든 병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내가 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듯 그 누구도 나의 것이 영원히 될 수 없을 터이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한말뚝에 두번 넘어진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 사람을 잘못 사귄 뒤의 후유증이다."
"잠못이룬자에게 밤은 길고피곤한자에게 길은 멀다."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뀌고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린다."
"집착은 키울수록 병이 되고 욕심은 버릴수록 아름답다."

탈무드』에서는 "친구는 두세 급 위로 사귀고,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있어도 두 눈은 하늘의 북극성에 두어야 한다."라고 했고,
또한 『백범어록』에서는 "손바닥으로 태산을 움켜쥐어 호랑이가손바닥에서 울게 하고, 입으로 바다를 들여 마셔 고래가 뱃속에서놀게 하라."는 말씀도 만날 수 있다.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뀐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린다.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있거나 관습의 벽을 깨지 못하면,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줄탁동시(醉啄同時)처럼 어미닭과 알 안의 병아리가 동시에 알의 껍질을 깨뜨려야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의 탄생이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의 빗장이 닫혀 있으면 어둠이 몰려올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어야 시야가 트이고 빛의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이 열리면 세상도 열리기 때문이다. 마음은 또 하나의 요술단지이며, 넓히면 우주를 담고 좁히면 바늘 하나 꽂을곳이 없는 것이다.
마음 넓히는 게 수행의 기본 덕목이다. 큰 바다는 또랑물을마다하지 않는다. 바다처럼 큰마음으로 차별 없이 받아들이며 살일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연속인 것이다.
거친 말과 행동에는 어둠이 몰리고, 부드러운 말과 행위에는 빛이모여들게 된다. 살펴보면 미운 자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입장바꿔 헤아려보면, 버리고 멀리해야 할 미운 자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삶은 경쟁이다. 전쟁놀이이자 파워게임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낙오자의 길을 걷게 된다. 전쟁놀이에서 패배하면 암흑의 터널에갇히게 된다. 파워게임에서 힘의 논리에 밀리게 되면 이용당하는자로 살게 된다.

"비구들이여 전도(傳道)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아 처음도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논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가르쳐라.
또한 원만무결하고 청정한 내용을 말하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지만, 법(法)을 듣지 못한다면 더욱 악(惡)에떨어지고 말리라. 그들이 법의 드러난 진리를 들으면 깨달음에 이를 게 아니겠는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베라의 장군촌으로 가겠다."

"세상에서가장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것이다."
"다른사람에게 쉽게 열어주지 않는 문을 그대에게만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스승이자벗이다."
"사막이 아름다운것은어디쯤에 오아시스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과 꾸밈이 없어야 친구이고 감춤과 드러냄이 없어야 도반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스승이요 착한 벗이 되는 것이다. 부모처럼 챙겨주고 형제자매처럼 받아들이는 버팀목 디딤돌이 친구의 힘이자 빛인 것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벽암록』 7칙에 있는 공안(公案)입니다. 혜초라는 이름의 구도자가 법안 선사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그대가 혜초로구나‘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대는 혜초가 아니로구나."

한 선객이 내게 물었다.
"스님을 가운데 두고 큰 동그라미를 그려놓을 경우 스님께서는 그 동그라미의 선(線)을 지우지도 넘어오지도 말고 밖으로 나올수 있으십니까?"
하여, 내가 말하였다.
"스님께서 먼저 선을 넘지도 지우지도 말고 내 있는 곳으로들어오시구려. 그럼 그때 내가 나가리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獅)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의 경전 중에 가장 오래전에 결집된 것으로 알려진, 『숫타니파타의 사품(蛇品)에 담겨 있는 구절이다. 세상에 떠다니는크고 작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이고 싶다. 촘촘히 엮여 있는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머물이 없는 바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살이가 고단하고 팍팍해도, 남의 탓이 아닌내 탓으로 갈무리하며 진흙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살고 싶다

‘중(中)‘은 ‘정(正)‘인 것이다. ‘가운데 중(中)‘으로 헤매지 말고
‘누릴 중(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중(中)과 정(正)에는 변두리와모서리, 좌(左)와 우(右)도 없는 것이다. 대(對)와 변(邊)에서 자유로운 것이 중(中)이요, 사(邪)와 미(迷)에 얽매임이 없는 게 정(正)이기때문이다. 발길 닿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요 정토(淨土)이며, 만나는사람이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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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마음이 몹시도 아프구나. 이 세상에는 그 어느 것도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란다. 우리처럼 이렇게 만나면 이내 헤어지는 아픔 속에서 나날이 철이 들고, 철이 들면서 서서히 사라져가는것이란다. 너와나그리고 우리 모두는……"

인생은 여행이라며 끊임없이 떠나가는 여행이라며, 아마도그럴 수 있다. 드러누운 채 뼈만 남긴 나무의 뿌리처럼 여행지에서사라져갈 운명일 수 있다. 그래도 돈황석굴의 부처님처럼 잔잔한미소 속에 사라질 수 있다면, 녹두죽도잣죽도 마다하며 누운 땅을온돌방 삼아 사라질 수 있다면, 머물없이 살다가 자유롭게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노인이 앉았다가 젊은이로 바뀌고, 고운 얼굴에서 미운 얼굴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도 시간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황량한 벌판을 지날 때도 있고 옥수수밭, 해바라기꽃밭을 지날 때도 있다. 강물에 멱감는 아이들도 볼 수 있고 염소떼를 몰고 가는 목동도 볼 수 있다. 건널목에서 만나는 풍경도 지역에 따라 사람의 차림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다.

장수와 관련하여 한마디 덧붙이자면, 예전 장수하는 노인들은 보약을 먹거나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습관처럼호미나 괭이를 들고 들에 나가 일을 했을 뿐이다. 틈이 나는 대로잡초 뽑는 일을 하였고 허드렛일을 찾아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던것이다. 그들 장수 노인들에 있어 부지런함은 보약이었고 운동이었으며 장수비결이 되었던 것이다. 장수 노인들은 한결같이 규칙적인 생활에 즐기는 음식을 소량으로 섭취하며 긍정적인 마음 자세로 이웃 돌봄과 나눔을 실천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행복은 느끼는 것이요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따라 눈높이에 따라 행복의 현주소가 바뀔 수 있다. 같은 환경, 같은 처지임에도 사람에 따라 행복과불행을 느끼는 마음의 온도는 다른 것이다. 세상의 절반은 빛이요절반은 어둠이다. 절반은 행복하고 절반은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텅 빈 충만‘에 이른 자를 선지식이라 한다. 선지식이란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 될 수 있고 아무에게나 착한 벗이 될 수 있는사람이다. 누구나 행복인, 자유인, 선지식이 될 수 있다. 벗어버리자, 집착의 병을 놓아버리자,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이르는 곳마다 행복하게 자유인이 되어 살아볼 일이다.
20세상은 마음 열린 자, 그들만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이 효령과 충령 사이에서, 술주정뱅이 행세로 주유천하하며 천수를 누릴 때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약이 되었을터이다. 흥선대원군도 술주정꾼이나 투전꾼 행세로 상갓집 개취급을 받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이 또한지나가리라‘를 뼛속까지 새기며 훗날 한나라의 전권을 손아귀에 넣는 꿈을 키웠으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누구에게나 약이 되고 힘이 되는 참좋은 말씀이다. 좌절과 실망과 어둠 속에서 헤맬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주술 삼아마음에 새길 일이다.

나지도않고 멸하지도 않으며(不生不滅)항상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며(不常亦不斷)같지도않고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亦不異)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來亦不去)

속이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다. 드러내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는다.
비어 있으나 가득하고, 가득하나 비어 있다. 지음[作]이 없으나 작용(作用)이 있고, 작용이 있으나 머물이 없다. 보고 듣고 오고가는것이 오고가고 보고 듣는 것일 뿐 더함도 덜함도 없다. 하나를 보여도 열을 보이는 것이요, 열을 보여도 하나를 감추지 않는다. 빛과 어둠이 둘이 아닌 하나이나 그 하나에도 머물지 않는다. 진리는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다.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드러나있다. 물처럼 공기처럼 내 곁에 있다.

삼매에 이르는 길은 마음챙김과 행위 멈춤의 간절심에 달려있다. 일주일을 잠들지 않아도 피곤하거나 나른하거나 육체가 흔들리지 않는다. 정신세계는 더욱 빛으로 충만해 가뿐한잔잔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삼매에 들어 밤낮의 며칠을 환히 밝히지 않고서는,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진리가 입으로만 몰리는 가짜수행자들은 삼매의 세계를 까마득히 잊고 있을 터이다. 마치 전설의 세계처럼 느낄 터이다.

장미꽃은장미 줄기나 잎이나 대궁이나 뿌리에서 찾을수없다.
뿌리와 줄기와 대궁과 잎이 건강할 때,
그리고 그 기능이 작동될 때 장미꽃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햇볕과 흙, 수분과 바람, 자양분이알맞게 골고루 갖추어져 있을때 장미 줄기는 자라고줄기가 건강할때 장미꽃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중도(中道)‘는 유교의 ‘중용(中庸)‘과 다르다. 중용이 유교의오덕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머물러 있다면, 불교의 중도는열린 세상의 열려 있는 진리와 한몸임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중(中)‘을 가운데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중은 ‘정(正)‘이다.
하여, 중(中)에는 버려야 할 변두리가 없고 모서리가 없는 것이다.
발길 닿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 앉아 있는 곳이 정토의 극락세계인 것이다.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처럼 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용수보살의 ‘팔불중도(八不中道)‘처럼, 생김도 없고멸함도 없으며 옴[]도 없고감도 없는 것이다. 같음과 다름이없고,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 것이다. 불교의 중도는 진정한의미에서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오늘의 주인공임을 일깨우는 인간선언인 것이다.
‘가운데 중(中)‘으로 읽지 말 일이다. 중(中)은 정(正)이다. ‘누리는 중(中)‘으로 받아들여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사무치게 살필일이다. 탄생의 첫 외침인 ‘천상천하유아독존‘도 또 다른 중도의외침임을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대(對)와 변(邊)에서 자유로운 게중(中)이라면, 미(迷)와 사(邪)에 얽매임이 없는 게 정(正)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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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와 ‘마시기‘도 기본적인 욕구의 표현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그보다 문화적인 욕구를 의식하고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기본적인 욕구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기와 소스 등 배를 불려주고 원기를 되찾게 해주는 실질적인것에 현혹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먹을 것을 앞에 두면 마냥 행복해하며, 세상의 무분별한 소동은 물론이고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하소연도 무시한다. 그저 의자에 앉아 식물성 음식과 동물성 음식의 상호보완성을 따지며,
이 세상에서 근절할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어가고, 느릿한 소화과정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다른 하나는 모든 흥분 상태가 배제되는 휴식으로, 앞의 휴식보다 더 확실한 휴식이다. 이 휴식에는 어떤 일을 끝냈다는만족감마저 표현되지 않는다. 마음이 평온할 때나 갈등을 일으킬 때도 의식에 영향을 주는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이런 휴식 상태에 이르는 것은 무척 어렵다. 어떤 요소를 인식하면 그에 합당한 이미지가 우리 마음에 그려지게 마련이다. 예컨대수천 년 전부터 요지부동인 산들의 지층,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달리 그 위의 고원지대에 평평하게 펼쳐진 호수를 생각해보라.

결론적으로 약간 씁쓸하지만, 지식인들은 순박한 사람들에게 허용된 이런 형태의 휴식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 지식인은 정의로운 중년의 친구다. 또 증거를 끈질기게 파헤치며 개념을 규명하고,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론적인 대책들을 강구한다. 지식인이 수면의 상품화를 맹렬히 비판하고, 하물며 낮잠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새삼스레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식인은 인간이 냉정함을 되찾고, 세상의 흐름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 데 인간의 위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약함을 혐오하는 듯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하루에게 내 약속을 어기는 때가 있다.
밤에서, 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 때가 그렇다. 시작이 어그러지면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시작하는 게 부끄럽다. 하지만 내일이면 또 다른 새벽이 어김없이 내게 찾아올 것이다.

또한, 느림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도 말하면서 ‘느리게 살아가는 법을 소개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처럼 ‘어떻게 느리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고 일목요연하게 쓰여지지 않아 선뜻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대로 느리게 읽으면서, 다시 말해서 목표를 세우지 말고 시간에도 쫓기지 않으면서 여유 있게 읽다 보면, 얼마든지 자기 나름대로 느리게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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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편안한 것이다. 평화이며 행복이며 자유 그 자체인 것이다. 진리는 멀리 있거나 높이 있거나 숨어 있지 않는 것이다. 진리는 항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물처럼 공기처럼 자갈처럼 생활 주변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다만 집착의 병, 습관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간절심 부족이 진리와 한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는 호롱불을 켜놓고 상위에 깔려 있는 쌀에서 뉘를 골라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니가 어떤 자식인디, 날 새면 떠난다는디. 좋은 밥 해주고 싶어서 뒤를 고르고 있지야. 뜻은 모른다만, 니 앞길 좋으라고 ‘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 부르고 있지야."

선지식 스님 중에는 고암 스님과 서옹스님은 미소로 답하셨고, 성철 스님은 일관되게 ‘아니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는데, 향곡스님은 달랐다. 묻는 스님에게 되물음을 자주 하셨고 ‘상당하네‘
하시며 격려하는 여유를 보이셨다.

사랑은 흔들리게 되어 있다. 흔들림 속에서 철이 들고 시야가트이게 되기 때문이다. 권태와 불만으로 가볍게 핑계 대거나 변명할지 모를 일이나, 돋보기안경처럼 사람 따라 다른 시력 상태에 따라 안경의 선택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만큼 윤회를즐기는 변화도 없을 터이다. 사랑 이야기는 살아있는 한 이어지는드라마일 테니까.

수행자에게도 사랑하는 애인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한용운스님 시에서 조국이 ‘임‘이 될 수 있음을 구차스럽게 설명해야 할터. 그러나 한용운스님처럼 애국지사가 아닌 나에게는 상대가 무엇이 되든 그리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인생의 절반이 슬픔이요 기쁨이라면, 젊은 시절의 나에겐 절반이 간절심이요 절반이그리움이었다. 여기에서의 간절심이란 인고의 아픔을 딛고 마음챙기며 정신을 모아가는 깨달음이었고, 그리움 또한 타는 목마름의 원초적 본능에 대한 채찍질의 꺼지지 않는 불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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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면, 또 잠든 어린아이를 깨우지 않으려면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야 한다. 공손한 사람들은 공원을 떠날 때, 세상을 떠날 때도 발끝으로 걷듯이 조용히 떠난다. 눈까지 내리까는 이유는 조심스러운 성격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얼굴을 무례하게 빤히 쳐다보지 않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눈길에서는 언제나 약간의 무례함이읽히게 마련이다.

"굶주린 배에는 귀가 없다."
입술 끝으로 마지못해 먹는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이 말은 혀로 핥아먹는 걸 거부하고, 입을 크게 벌려 과일을 우적우적 씹어 먹고, 시원한 포도주를 꿀꺽꿀꺽 마셔 갈증을 풀겠다는 뜻이다.
얼버무려 말하라. 말이 완전하면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하다. 말을 사 등분, 아니 팔등분 해보라. 그러면 말이 소중한 의미의 조각들임이 드러날 것이다.

과거의 매력. 우리는 과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또 과거는 이제 전혀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몸이 과거를경계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세계 전쟁이 시작되기 전은, 이제는 아득히 멀리 느껴져서 기억하기조차 힘들다. 그저 상식에서 벗어난 맹목적인 시대였던 것으로만 읽힌다. 그러나 우리시대 사람들은 과거가 없는 삶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 과거를 되살려내 라이프사이클에 억지로 밀어 넣는다.

우리 자신을 알려고 애쓰면, 진흙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 찾아온다.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노력이 헛된 시도라는 걸 인정하자. 오히려 ‘나‘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모든 꼭두각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 꼭두각시들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며 즐기는 편이 낫다. 하나의 모자를 다르게 씌워보고, 또 하나의 저고리를 멋지게 꾸며보라. 이처럼 삶이라는연극을 재미있고 다채롭게 꾸며보라.

이런 공원에서는 아직도 혼자만의 삶이 가능하다. 물론.
리는 기혼자이고 배우자의 죽음을 바라지도 않는다. 돌봐야할 아이들도 있고, 막내아들의 수학 공부를 도와줘야 한다. 막내딸의 영국 여행 일정을 짜주기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우리 영혼의 죽음을 슬퍼하고, 사라진 세월을 애도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옛 모습을 지닌 공원에서는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 그런 공원에서 우리는 방황하는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며 슬픈 마음을 서로 교환한다.

5깊이 생각해야 할 때 나는 사상가인 척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생각에 잠긴다. 온갖 개념들이 은유의 효과에 의해서, 또 이상하게도 평범한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신속하게 사라진다. 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며 내 마음이 활짝 열린다. 나는 고산지대 방목지에서 여름밤을 생각하는 목동이 된 듯한 기분에젖는다. 하나의 의미를 지닌 것도 확산해 관대해질 수 있다는걸 기꺼이 인정하며, 불확실한 항해를 포기한다. 내 능력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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