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편안한 것이다. 평화이며 행복이며 자유 그 자체인 것이다. 진리는 멀리 있거나 높이 있거나 숨어 있지 않는 것이다. 진리는 항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물처럼 공기처럼 자갈처럼 생활 주변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다만 집착의 병, 습관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간절심 부족이 진리와 한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는 호롱불을 켜놓고 상위에 깔려 있는 쌀에서 뉘를 골라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니가 어떤 자식인디, 날 새면 떠난다는디. 좋은 밥 해주고 싶어서 뒤를 고르고 있지야. 뜻은 모른다만, 니 앞길 좋으라고 ‘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 부르고 있지야."
선지식 스님 중에는 고암 스님과 서옹스님은 미소로 답하셨고, 성철 스님은 일관되게 ‘아니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는데, 향곡스님은 달랐다. 묻는 스님에게 되물음을 자주 하셨고 ‘상당하네‘ 하시며 격려하는 여유를 보이셨다.
사랑은 흔들리게 되어 있다. 흔들림 속에서 철이 들고 시야가트이게 되기 때문이다. 권태와 불만으로 가볍게 핑계 대거나 변명할지 모를 일이나, 돋보기안경처럼 사람 따라 다른 시력 상태에 따라 안경의 선택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만큼 윤회를즐기는 변화도 없을 터이다. 사랑 이야기는 살아있는 한 이어지는드라마일 테니까.
수행자에게도 사랑하는 애인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한용운스님 시에서 조국이 ‘임‘이 될 수 있음을 구차스럽게 설명해야 할터. 그러나 한용운스님처럼 애국지사가 아닌 나에게는 상대가 무엇이 되든 그리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인생의 절반이 슬픔이요 기쁨이라면, 젊은 시절의 나에겐 절반이 간절심이요 절반이그리움이었다. 여기에서의 간절심이란 인고의 아픔을 딛고 마음챙기며 정신을 모아가는 깨달음이었고, 그리움 또한 타는 목마름의 원초적 본능에 대한 채찍질의 꺼지지 않는 불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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