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마음이 몹시도 아프구나. 이 세상에는 그 어느 것도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란다. 우리처럼 이렇게 만나면 이내 헤어지는 아픔 속에서 나날이 철이 들고, 철이 들면서 서서히 사라져가는것이란다. 너와나그리고 우리 모두는……"

인생은 여행이라며 끊임없이 떠나가는 여행이라며, 아마도그럴 수 있다. 드러누운 채 뼈만 남긴 나무의 뿌리처럼 여행지에서사라져갈 운명일 수 있다. 그래도 돈황석굴의 부처님처럼 잔잔한미소 속에 사라질 수 있다면, 녹두죽도잣죽도 마다하며 누운 땅을온돌방 삼아 사라질 수 있다면, 머물없이 살다가 자유롭게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노인이 앉았다가 젊은이로 바뀌고, 고운 얼굴에서 미운 얼굴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도 시간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황량한 벌판을 지날 때도 있고 옥수수밭, 해바라기꽃밭을 지날 때도 있다. 강물에 멱감는 아이들도 볼 수 있고 염소떼를 몰고 가는 목동도 볼 수 있다. 건널목에서 만나는 풍경도 지역에 따라 사람의 차림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다.

장수와 관련하여 한마디 덧붙이자면, 예전 장수하는 노인들은 보약을 먹거나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습관처럼호미나 괭이를 들고 들에 나가 일을 했을 뿐이다. 틈이 나는 대로잡초 뽑는 일을 하였고 허드렛일을 찾아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던것이다. 그들 장수 노인들에 있어 부지런함은 보약이었고 운동이었으며 장수비결이 되었던 것이다. 장수 노인들은 한결같이 규칙적인 생활에 즐기는 음식을 소량으로 섭취하며 긍정적인 마음 자세로 이웃 돌봄과 나눔을 실천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행복은 느끼는 것이요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따라 눈높이에 따라 행복의 현주소가 바뀔 수 있다. 같은 환경, 같은 처지임에도 사람에 따라 행복과불행을 느끼는 마음의 온도는 다른 것이다. 세상의 절반은 빛이요절반은 어둠이다. 절반은 행복하고 절반은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텅 빈 충만‘에 이른 자를 선지식이라 한다. 선지식이란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 될 수 있고 아무에게나 착한 벗이 될 수 있는사람이다. 누구나 행복인, 자유인, 선지식이 될 수 있다. 벗어버리자, 집착의 병을 놓아버리자,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이르는 곳마다 행복하게 자유인이 되어 살아볼 일이다.
20세상은 마음 열린 자, 그들만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이 효령과 충령 사이에서, 술주정뱅이 행세로 주유천하하며 천수를 누릴 때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약이 되었을터이다. 흥선대원군도 술주정꾼이나 투전꾼 행세로 상갓집 개취급을 받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이 또한지나가리라‘를 뼛속까지 새기며 훗날 한나라의 전권을 손아귀에 넣는 꿈을 키웠으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누구에게나 약이 되고 힘이 되는 참좋은 말씀이다. 좌절과 실망과 어둠 속에서 헤맬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주술 삼아마음에 새길 일이다.

나지도않고 멸하지도 않으며(不生不滅)항상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며(不常亦不斷)같지도않고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亦不異)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來亦不去)

속이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다. 드러내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는다.
비어 있으나 가득하고, 가득하나 비어 있다. 지음[作]이 없으나 작용(作用)이 있고, 작용이 있으나 머물이 없다. 보고 듣고 오고가는것이 오고가고 보고 듣는 것일 뿐 더함도 덜함도 없다. 하나를 보여도 열을 보이는 것이요, 열을 보여도 하나를 감추지 않는다. 빛과 어둠이 둘이 아닌 하나이나 그 하나에도 머물지 않는다. 진리는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다.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드러나있다. 물처럼 공기처럼 내 곁에 있다.

삼매에 이르는 길은 마음챙김과 행위 멈춤의 간절심에 달려있다. 일주일을 잠들지 않아도 피곤하거나 나른하거나 육체가 흔들리지 않는다. 정신세계는 더욱 빛으로 충만해 가뿐한잔잔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삼매에 들어 밤낮의 며칠을 환히 밝히지 않고서는,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진리가 입으로만 몰리는 가짜수행자들은 삼매의 세계를 까마득히 잊고 있을 터이다. 마치 전설의 세계처럼 느낄 터이다.

장미꽃은장미 줄기나 잎이나 대궁이나 뿌리에서 찾을수없다.
뿌리와 줄기와 대궁과 잎이 건강할 때,
그리고 그 기능이 작동될 때 장미꽃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햇볕과 흙, 수분과 바람, 자양분이알맞게 골고루 갖추어져 있을때 장미 줄기는 자라고줄기가 건강할때 장미꽃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중도(中道)‘는 유교의 ‘중용(中庸)‘과 다르다. 중용이 유교의오덕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머물러 있다면, 불교의 중도는열린 세상의 열려 있는 진리와 한몸임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중(中)‘을 가운데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중은 ‘정(正)‘이다.
하여, 중(中)에는 버려야 할 변두리가 없고 모서리가 없는 것이다.
발길 닿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 앉아 있는 곳이 정토의 극락세계인 것이다.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처럼 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용수보살의 ‘팔불중도(八不中道)‘처럼, 생김도 없고멸함도 없으며 옴[]도 없고감도 없는 것이다. 같음과 다름이없고,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 것이다. 불교의 중도는 진정한의미에서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오늘의 주인공임을 일깨우는 인간선언인 것이다.
‘가운데 중(中)‘으로 읽지 말 일이다. 중(中)은 정(正)이다. ‘누리는 중(中)‘으로 받아들여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사무치게 살필일이다. 탄생의 첫 외침인 ‘천상천하유아독존‘도 또 다른 중도의외침임을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대(對)와 변(邊)에서 자유로운 게중(中)이라면, 미(迷)와 사(邪)에 얽매임이 없는 게 정(正)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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