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시여. 어딘가에 존재하신다면 제발 제게 자비를 베풀어주시죠. 정민이 협박하듯 속으로 뇌까린 순간 신은숭고한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쟁자의 신분증을 감추는 방식으로 말이다."신분증 없으시면 곤란하세요."직원의 단호한 말에 금색 머리핀 여자가 새된 소리를냈다."분명히 갖고 왔는데 없어졌다니까요. 그냥 해주세요,저 여기서 한두번 산게 아닌데.""규정이라서요."간결한 직원의 말투는 근엄하기까지 했다. 여자는 태세를 바꾸더니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혜심은 짧게 숨을 토해냈다. 그 끝에 가벼운 콧바람이새어 나왔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에겐 지겨울 정도로 꿋꿋한 구석이 있었다. 바로 그 점이 아이들이 사랑스럽기도 지긋지긋하기도 한 이유였다. 준용에게 아직 그꿋꿋함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반가웠다. 준용은마음이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한때의 혜심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내 모든 게 표백되길 바랐다. 그리고 태양 아래서서 수영장 표면의 물이 반사해내는 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안의 모든 구질구질한 것들, 부상을 입고 저버린 빛바랜 수영선수의 꿈이나 답 없이 쌓인 대출금, 일주일에한번은 돌아가야 하는 곰팡이 슨 옥탑방, 떠올리고 싶지않은 미래조차 깨끗하고 뽀송뽀송하게, 하얗게 날아가버리곤 했다.
당시 오시코시는 오노 경찰서 소속이 아니었지만, 현 내에서는 큰 사건이었기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변호인 측은 심신상실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했으니 검찰 측에선 유죄가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 피해자가 바로 가마타리 다이치의 아내였을 줄이야."그 사건의 충격은 가마타리 목사님의 신앙을 뒤흔들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유족으로서의 감정과 기독교인으로서의신앙 사이에서 깊이 괴로워하게 된 거죠."사노의 작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성경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도 하죠. 가마타리 목사님은 교회의 목사로서뿐 아니라,아내를 살해당한 남편으로서도 탄식 속에서 시험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은 새벽부터 다시 내린다는 예보였다. 그 주민은 밤사이조금이라도 눈을 치워두려고 한 시간쯤 밖에 있었는데, 그사이 후타쓰모리 가의 헛간 쪽에서 따각따각 나무를 쪼개는듯한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살짝 집 뒤를 들여다보니, 유야가 밭에서 쓰는 괭이를 들고 헛간을 부수고 있었다.겁이 난 주민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자기 집으로 달아났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