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그녀가 태어난 계절, 즉 ‘나의 계절’이었으므로, 전부터 봄이 되면 이상하리만치 특별하게 건강과 활력이 돋는다고 믿었다. 따스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새들을 부르는 로잘리의 얼굴은 환히 빛났다.
마당의 꽃밭에서 처음 피어난 크로커스, 수선화, 히아신스나튤립의 새싹이나 꽃잎을 볼 때면 눈물을 글썽일 정도였다. 교외로 소풍을 가다가 길가의 사랑스러운 오랑캐꽃, 노랗게 핀금작화와 개나리 덤불, 빨간색 또는 하얀색의 산사나무꽃, 라일락, 밤나무의 붉고 하얀 꽃,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그녀는 딸도 함께 감탄하고 황홀감에 빠지기를 바랐다. 로잘리는 화실로 꾸민 북향 방에 자리한 추상적인 그림 사이에서 딸을 끌어냈고, 안나는 종종 가운을 벗어 버리고 어머니와 함께 몇 시간이고 즐겁게 산책을 했다. 그럴 때 안나는 놀랄 만큼 잘 걸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될 수 있는 한 움직임을 줄여서 절뚝거리는 모습을 감추려고 했지만, 혼자 있으면 마음 편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꽤 오래 걸을 수 있었다.

로잘리는 보리수가 꽃피는 7월에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때 역시 그녀가 좋아하는 계절로, 창문을 열어 놓으면 몇주동안 가로수의 형언할 수 없이 맑고 부드러운 향기가 집 안을가득 채워서 입가에 황홀한 미소를 머물게 했다.

T
"엄마,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나이 든 여성을, 인생의 과업을 완수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그 자연에 의해 새롭고 안락한 상태로 옮겨 가면서 위엄을 얻은 여성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거예요. 생리를 마치는 것은, 말하자면 보다 높고 아름답고 명예로운 경지이므로, 여러 사람들에게, 가까운 사람에게든 먼 사람에게든 여전히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닌가요? 남자를 부러워하시는데, 물론 남자가 여자에 비해 성생활면에서 자유로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게 과연 좋은지, 부러워할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워요. 그리고 모든 기품있는 민족은 항상 노부인을 존중하고 신성시했어요. 그러니우리도 엄마의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노년의 위엄을 신성한것으로 생각하도록 해요."

"그래요, 엄마, 이해해요. 하지만 이것 보세요. 몸하고 마음은 하나예요. 육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것 역시자연이에요. 자연은 심리도 포함하니까요. 너무 두려워하실필요 없어요. 엄마의 마음도 머지않아 몸의 자연스러운 변화와 화합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세요. 감정은육체의 영향을 받는다, 또 우리의 감정이 변화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힘겨운 임무를 맡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몸한테 그 일을 떠넘겨서 직접 해결하게 한다고,
왜냐하면 육체가 감정을 상황에 맞도록 조율해 주거든요."
어째서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지 튀믈러 양은 알고 있었다. 엄마가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즈음, 집에서 종종 새로운 얼굴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은 전에 없이자주 보였고 그 탓에 일종의 미묘한 기류가 생겨났는데, 안나의 조용하고 신중한 관찰을 결코 피해 가지 못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살롱을 오갔다. 여자들한테 편하게 굴면서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여자들앞에서는 모국의 풍속에 따라, 괜스레 식사 때 고기를 잘게 썬 다음 나이프를 접시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올려놓은 뒤에 원손은 내려놓고 오른손에 포크를 쥔 채로 썰어 놓은 고기를 집어 들었다. 자기 나라의 습관을 그대로 고집했는데, 옆의 여자들이나 건너편의 남자들이 굉장히 흥미로운 눈길로 자신의식사 모습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얘야, 이건 있잖니, 말하자면 가슴속의 일인데, 놀랍고수수께끼 같고 전능하고, 때로 우리에게 아주 이상하고 모순적이고 심지어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일이란다. 너도 알 거야, 안나, 요즘 나는 몇 번이고 너의 옛날 일이, 그 얘기를 꺼내서 미안한데, 브뤼너와의 일이 생각나는구나. 지금하고 상당히 비슷한 시간에 네가 고백했던 그 괴로움 말이다. 그때 너는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심지어 그 갈망을 치욕이라고 불렀지.
너의 이성과 판단이 너의 심장, 네 말대로 하자면 너의 관능과대립하게 되었음을 수치스러워했어."

"얘야, 네가 단지 나를 위로하려고, 내 고통을 달래 주려는 동정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길 바란다. 내가 너한테동정을 바라는지도 모르겠다만, 그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내가 겉으로는 동정을 바라는 듯 보일지 몰라도 사실 그런 고통이나 수치심마저 나의 행복이고, 내심 이 ‘고통의 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단다."

보트 모양의 모직 슬리퍼가 자꾸 발에서 벗겨지려고 했다. 폰 튀믈러 부인은 결국 한쪽 슬리퍼를 발에서 놓쳤다. 그것은 바닥에서 미끄러지더니 상당히 멀리 사라져 버렸다. 키튼이 웃으면서 슬리퍼를 집어다가 무릎을 꿇고 신겨 주는 동안, 두 사람은 다른 관람객들보다 뒤처졌다. 키튼이 다시 부인의 팔꿈치를 잡았지만 부인은 앞의 방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꿈꾸는 듯한 미소만 지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 기댄 그녀가 몸을 돌려서 아까 열렸던 벽지 문에 성급하게 손을 댔다.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으로도 도무지 상상해 낼 수 없는결혼이 있다. 연극에서 용납되듯이, 늙고 어리석은 인물과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인물처럼 극명하게 대조되는 한 쌍이 모험적으로 결합하더라도 그저 의혹 없이 수용해야 하는 것이있다. 그런 설정은 (연극의 전제가 되기도 하고, 특히 익살극에서라면 수학적 구성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잠시 후 더욱기이한 일이 벌어졌는데, 로이트너 씨가 마치 전염이라도듯 흥분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격하게 들뜬 채 몸을떨면서 서둘러 말했다.

홀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악단 주자들은 악기를 꺼내 놓았다. 그때까지 무관심한 듯 삐죽내민 입술 사이에 담배를 물고 말없이 문에 기대서 있던 로이트너 씨가 암라 야코비와 함께 무대 장막의 정면 한가운데있는 피아노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악보를 초조하게 뒤적였고, 다소 창백해진 암라는 한쪽 팔을 의자팔걸이에 올려놓은 뒤 매섭게 관객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모두 목을 빼고 기다리는 동안, 마침내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날카롭게 울렸다. 로이트너와 암라가 도입부의 중요하지 않은 몇 박자를 연주하는 사이에 서서히 막이 올랐다. 비로소 루이스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평생 잊지 못할사건이 벌어졌다. 끔찍하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 찰나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생하게 설명해 보겠다.
「루이스헨」이라는 제목의 우스꽝스러운 노래는 잘 알려져 있다.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구절을 기억하리라.

한순간 정적이 흘렀고, 이내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더니대혼란이 일어났다. 용기 있는 몇몇 신사들과 젊은 의사가 관현악석을 가로질러 무대 위로 뛰어올랐고, 곧장 무대의 막을 내렸다.

곧 젊은 의사가 다시금 홀에 나타났다. 진지한 얼굴에 턱수염을 기른 자그마한 유대인이었다. 문가에서 자신을 둘러싼 몇몇 신사들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루이스헨」은 토마스 만이 25세에 발표한 단편으로, 이보다 먼저 발표한 「행복을 향한 의지」(1896) 와 키 작은 프리데만 씨」(1897), 그리고 이어지는 「트리스탄」(1903)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즉 무언가 부족하고 결여된 현실에서 소외된 남성과 그를 파멸로 이끄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것은토마스 만의 대표작들이 거의 다 남자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을뿐만 아니라, 여성 인물의 역할이 미약했음에 비춰 볼 때 흥미로운 점이다.

「루이스헨」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연극적 진행을 보여주는데, 야코비의 파멸은 음악에 의해, 그리고 음악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토마스 만의 어느 작품에서나 음악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한노, 트리스탄』의 슈피넬, 『파우스트 박사의 아드리안 레버퀸), 특히 창작 초기에 쇼펜하우어의 철학, 바그너의 음악으로부터 큰 영향을받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반지」가 보여 주는 장엄한 몰락의 정서, 「파르시팔」의 죽음을 통한 구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Liebestod)은 토마스 만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몰락, 환멸, 타락, 죽음과상통한다. 여기에서 죽음은 달콤하고 아름답고 도취으로 묘사되는데, 니체의 바그너 비판에 따르면 이러한 탐닉은 퇴폐적인 것이다. 데카당스란 몰락과 죽음, 퇴폐와 퇴락을 지향하는 태도로, 본디 인간에게는 파멸과 소멸에 대한 동경이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갈망하는데, 이 같은 죽음에의 동경이나 구원을 니체는 현세 부정의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파괴적 충동이라 비판한 바 있다. 탐미적, 염세적, 낭만적,
엘리트적이며 독일적인 이 몰락의 정서는 토마스 만의 마지막 완성작 「기만」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랑을 완성하고자 곧 찾아가겠다고 약속하지만 로잘리는 그날 저녁도, 다음 날도 켄을 찾지 못한다. 출혈로 의식을잃은 그녀는 병원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이후부터 사건은 매우 객관적으로, 의학적 용어를 가지고 서술된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하지만 로잘리는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자연에대한 사랑과 신뢰를 버리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힘이 오른 북천 버드나무들이 바짝 거꾸로 서서물웅덩이 속에 떠 있는 달에다 뿌리를 뻗치고 있는 것을모른 척하고 돌아섰다.

악견산을 넘어가다유방산에 닿았네04슬슬 몸속 뼈가 스멀거리기 시작했네피라미떼가 제 미색에 빠져개울 물살을 즐기듯이격정도 뭉게구름이 되어 불어나는 한낮섬섬옥수로 산정에서 스윽즉,
한평생 살다가햇살 넘치는 계곡 사이로소낙비 되어 쏟아졌네마른 옥수숫대 서걱이는비탈밭에 내리꽂혔네!

천상의 악기를두드리는 먼 시간의자궁 안격렬한 한낮의 소나기가골목을 밟고 지나갔다해협으로 배가 배를 밀고 들어간다철교들이 몸을 들어올린 다리 사이로달이 엉덩이를 두드리며 빠져나가는구름 기둥을 바라본다

섬과 섬 사이를
그 눈빛과
눈빛 사이에서
무지개가 뜨고
사라지듯

왜 열일곱에 시집왔어요?
아부지가 소녀 공출 안 보낼라구 보내부렀어함평 산암마을 할머니들고생한 거 착으로 쓰면 몇권으로도 모자!

이제 남은 인생 저 노을처럼 살아가자 우리,
피난민 한금순이육십년 만에 만난 두 동생을 안고삼팔선 같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구룡포 시외버스 터미널을 돌아 돌아 빠져나오자맨 뒷자리에서,
원장님 좀 바꿔주이소원장이가,
우리 신랑이 가을 타는지 힘이 없다바다에 나가먼자꾸 힘이 빠진다 칸다 아이가

드디어 온 몸속이 검게 타올라드디어 죄 없는 무기수들이오래된 감옥에서 줄지어 나오기 시작한다.
붉은머리학들도 해의 알을 품고 날아오른다

김수복의 시에는 운명 앞에 선 자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무에 대해 응답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인다. 역설적이게도 그 의지는 죽음을 이해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노래하는, 소멸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김수복의 운명은 일상에 대한 시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에선 피의 냄새가 난다고 했었던가
그 자유에는 피의 혁명도
새벽하늘도
없다
해가 다시 떠오르는 먼동에는
참회의 눈이 있다고
새벽하늘을 수정(修正)하며 새들이 날아오른다

모든 나무들이 서로 마주 서서흐르는 강물로 마음을 주고받듯이천년 동안 흘러온 강물이 서로 마주 보며웃는 얼굴로 저녁을 맞듯이모든 나무들의 일생에도바람의 얼굴이 있음을 본다살아간다는 것 또한저 마음의 나이테와 같이살아왔다는 것 또한서로에게 물결이 되어주었다는 것그 나무의 마음의 책에서로의 강물을 적어 넣어두었다는 것

저렇게 핏줄은 말라갔을 것이다흘릴 눈물도 없는 눈물을만리 밖 바람의 간절한 소리를제 귀에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그 긴 강물의 탯줄을속에서 밀어올렸을 것이다툭툭, 땅속 폐경이 된 자궁을 들어올려아득히 능선 위로 자지러지는태양을 몸 안으로 조이고 조여서씨를 받아내었을 것이다노을에 퍼져재가 될지라도천년 광원(光源)을지는 태양 속으로 고이 간직해 내보이면서한잎 두잎, 입을 벌리며 태어나듯이죽은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받아 맞이하는 검은 몸이
비로소 환해오는 새벽,
그 태양의 눈빛을 바라본다

막다른 골목에서배가 고프거나,
오래 길 끝에 박혀 나가지 못했을 때,
사랑도 식어서 해가 질 때,
그 꼬리를 잘라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산문(山門)의 산그늘 외진 꼬리도,
오지 않는 새벽을 기다리는 가로등의 꼬리도,
아, 그림자가 길어지는골목 안에서 꼬리를 자르고쫓아오던 반민주(反民主)의몸통도 잘라버리고 싶었다

귓불을 깨물어주고 싶던 때가 있었다하늘에 대고 욕을 퍼부었던지나가는 바람에게도 시비를 걸었던,
발아래 연꽃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을 때그 연잎의 귓불을 깨물어주었다활짝,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덕진공원늦은 여름의 저녁 무렵이었다한없이, 한없이 깨물어주어서새벽 연밥이 익는 줄도 몰랐다

곧 저녁이 다가올 것이다등불을 밝히고높고 비천한어둠과별에게,
목숨을 바쳐몸속에 집을 짓는하늘에서곧 종이 울릴 것이다새들이 죽어서 날아갈 것이다

죽은 숲들도 깨어나 저녁 식탁의 등불을 내건다
먼 데서 천둥소리가 다시 지나갔다

석양이 밀려오면황금빛으로 물들어갑니다마법에 걸린 몸이 되어하늘처럼 사랑했던 사람도껴안고 돌 수 없습니다소리의 무지개가 되어현(弦)을 켜며허공에 감겨 있습니다

검게 타들어가는 살아 있는
화석이 되어
저 깊고 두꺼운 겨울 눈발 속으로
몸을 던진다

산짐승이 밤새 먹다 버린 새벽달을 보았다
아직 식지 않은 눈빛을 보았다
선혈이 낭자한
부릅뜬 눈을 뜨고 있는 눈동자를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틸스와 동료들은 로봇이 장난감을 가리키며 불특정한 소리를낸 다음, 놀이 친구들끼리 서로를 흉내 내며 독자적인 ‘언어‘를 개발하도록 프로그래밍했다. 과제는 당연히 로봇이 의식이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는지, 아니면 의식과 생각이 있는 것처럼 흉내 낼뿐인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스틸스는 한 가지 답에 매달리고자하지 않았다. 다만 로봇에게 그 어떤 정신적인 능력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로봇이 의식을 얻기에 무엇이 부족한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칩이 더 빨라지면 의식을 얻기에 충분할까? 저장용량이 더 커진다면? 소프트웨어가 더 원숙해진다면? 언젠가는 이 작은인형이 감각을 느끼고, 자신의 인생을 깊이 고찰하고, 심지어는 연구소를 부수고 탈출하려고 시도하게 될까?

다트머스의 연구진은 컴퓨터와 뇌의 명백한 유사점에 주목했다.
뇌 또한 입력과 출력이 있는데, 이는 각각 인식과 행동이다. 또 모든인간이 문제를 해결한다. 뇌의 신경세포는 신호를 전달하거나 전달하지 않는데, 이것도 컴퓨터에 전기가 흐르거나 흐르지 않는 것과유사하다. 이에 따른 강력한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인간 또한 컴퓨터다. 다만 인간은 규소 칩 대신 효율이 매우 뛰어난 생물학적 하드웨어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정신은 생물학적 하드웨어를 움직이는8
소프트웨어, 즉 웨트웨어Wetware다. 이 주장이 옳다면 인간은 다른방식으로도 컴퓨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똑같은 소프트웨어로 움직이는 다른 하드웨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설은 의식의 진정한 근본이 우리의 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말에서 무엇이 우리 뇌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의식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누구도 풀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우주가 얼마나 경이롭고 우리의 정신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체현이라는 접근법을 주장하는 사람 중 몇몇은 덜 전투적이며 남들과는 조금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 이들에 따르면 신체감각은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신체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정신적인능력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즉 우리의 신체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고 손으로 수어를 표현해 대화를 나누고 발이나 팔로 길이를 재는 용도 이상의 것이다. 생각 또한 일종의 신체 움직임으로 볼수 있는데, 우리가 생각을 ‘한 걸음씩‘ 단계적으로 진행한다고 표현하거나 문제를 파악‘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감정은 신체적으로 경험하는 경고 체계다. 두려움으로 인한몸의 떨림이나 심장박동은 우리에게 위험한 상황을 경고한다. 시각적 인식 또한 직접적인 감각이나 마찬가지다. 벽난로 앞에 털 양탄자가 놓여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와 동시에 손가락으로 털을 만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있기만 한 실험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기능을폭로하는 실험이다. 우리는 환각에서 두 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첫째, 신체에 대한 인식이나 생각으로 우리가 느끼는 신체의 한계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둘째, 여러 가지 감각이 신체의 한계를 느끼는 데 관여하는데, 그중 시각이 촉각을 능가한다. 그래서
‘다감각 환각‘이 언급되기도 한다. 만약 촉각이 지배적이라면, 실험참가자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아야 할 때 언제나 허벅지 위에 놓인 진짜 왼손을 잡았을 것이다.

도구의 예시로 돌아가보자.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시각적인 인상으로서 우리가 느낀 ‘수중에 있음(도구성)‘이 주어진다. 망치를 붙잡으면 그것이 우리 몸에 속한 것처럼 느껴진다. 망치를 손에 쥐고 못을 박으려는 순간, 우리는 망치의 머리를 ‘느낄‘ 수 있다. 고무손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자동으로 도구가 우리의 감각하는 몸과 함께 자라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예시를 소개한다.
1990년대 초반, 나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롤러블레이드 유행에 편승했다. 어떨 때는 하루 종일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밤에 롤러블레이드를 벗어도, 마치 계속해서 롤러블레이드를신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발에 스키가 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를 더 자세히 특정하고 싶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롤러블레이드와 스키가 그것을 신고 있는 사람의
‘족중에 들어간 것이다. 주차할 때도 비슷한 일을 경험한다. 주차하다가 뒤에 있는 차를 박으면, 우리는 마치 스스로가 차에 치인 것처럼 움찔한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몸에서 독립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영국의 철학자 피터 스트로슨이 말했듯이 이런 이원론은 표면적인것이다. 우리는 ‘나‘라고 말할 때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나’를 가
‘리키지 ‘실제 나‘와 ‘나의 신체‘를 구분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물질적이며 동시에 정신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다.

실험을 하나 더 해보자. 여러분은 코가 두 개였던 적이 있는가?
아주 간단한 실험이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교차한 다음양손가락의 손톱으로 동시에 코끝을 문지른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똑같은 속도로 문지르다보면 어느순간 코가 두 개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환각은 모든 사지에서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혀가 갈라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책상 모서리나 휴대전화로도 환각 실험을 할 수 있다. 이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환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착각 현상‘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각적으로는 하나로 보이는 것이 손가락의 촉각으로는 둘로 느껴질 수 있다. 촉각 정보가 마치 손가락이 교차되지 않은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양 손가락의 바깥쪽 피부가 대상과 닿을 때는 보통 두 가지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때 신체감각을 발생시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요소들에 어떤 공통된 작용이 있는지는 아직 과학적으로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잘못된 신체상의 모든 변종에서 이런 요소들이 발견된다. 식욕부진 환자들은 자신이 날씬하다고 인식하지못한다. 마치 머릿속에 깨진 거울이 들어 있는 것처럼 거울에 비친자신의 모습이 계속 뚱뚱해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잘못된 신체상을 스스로 바로잡을 수 없다. 그래서 병원을 찾은 식욕부진 환자들은 우선 신체 치수를 재지 않은 상태에서 바닥에 자신의 몸의 윤곽을 그려봐야 한다. 그 윤곽 위에 직접 누워보고 나면 환자들은 깜짝놀란다. 실제 몸이 윤곽의 겨우 절반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 치료는자기 인식으로 가는 첫 발걸음이다.

느낌과 앎의 충돌 때문에 발생하는 의학적 증상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편두통 또한 일그러진 신체감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부편두통 환자들은 두통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의 몸이 수축되거나 천장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높이 발사되는 기분을 느낀다.
런 현상은 ‘앨리스 증후군Alice in Wonderland syndrome‘"이라고 불린다.

즉 인간은 갖고 있지 않은 신체 부위를 느낄 수 있고, 반대로 갖고 있는 신체 부위를 느끼지 못하거나 낯설게 여길 수 있다. 더 극단적으로는, 스스로가 느낀 신체 전부가 사라지거나 갑자기 다른장소에 나타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찰자의 모든 경험은 부정부터 긍정까지, ‘향유 수치‘의 눈금을구성한다. 어떤 경험에서 얻은 기분이 눈금에서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는지 묘사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명확하다. 어떤 것이 우리 내면에서 향유를 만들어내면,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철학자들은 향유가 언제나 경험과 동시에 나타나야 한다고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어떤 콘서트를 관람하고 난뒤 이미 음악은 몇 시간 전에 사라졌지만 계속해서 음악에 도취된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들은 것의 상相과 향유의 상은 일치할 필요가 없다.

칸트는 미에 보편타당한 것이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감각적인 생각과 이해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칸트는 ‘아무런 개념 없이도 보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아무런 개념이 없다‘고 말한 이유는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파악하거나 계속해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