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동행 없이 혼자 걷는다고 해서외톨이의 길을 좋아한다고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길이 축복받았다고 느낄 때까지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었으나가슴 안에 아직 피지 않은 꽃들만이그의 그림자와 동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다음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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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생이 얼마나 가파른 생이었나
얼마나 고된 노동이었나
입술 깨물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봄 사용법 외우지 않았다
너는 꽃이면서
너 자신의 유일한 지지대
날개이면서
그 날개 밀어 올리는 바람
너는 피었다
그냥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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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국의 대외관계는 점점 더 냉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전후미국 정부는 제국의 해체, 스털링 지역Sterling Area‘과 영국 무역권의해체 등을 요구하면서 유럽을 단일경제단위로 통합시키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영국 정책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무장관 베빈은 처음에는 미소의 양세력 가운데에서 제3의 길을 모색했으나, 영국의 경제적, 정치적 한계를 깨닫게 되면서 미국과의 동맹으로 기울었다. 게다가 1948년에 있었던 체코 사태와 베를린 위기는유럽의 무력함을 보여주었고, 미국에 의존이 피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브뤼셀 조약(1947)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설(1949) 그리고 미국이 제공한 마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설립된유럽경제협력기구 OEEC에 가입함으로써 영국의 친미정책은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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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에는 이처럼 중간부류가 주도하는 대중정치가 엘리트정치의 바깥에 대체구조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대중정치의 대두에는문자해독이나 도로의 발달, 우편배달체제의 발달이 크게 기여했다.
부르주아 문화의 정수 중 하나가 신문과 정기 간행물이었다. 명예혁명의 결과 인허법이 폐지되어 (1695) 출판의 자유가 주어진 후, 일간신문 판매가 시작되었다(1702). 1760년이 되면 신문의 주당 총 판매부수는 20만 부 이상으로 급상승했고, 런던에만 12개의 신문이 발간되었다‘ 인쇄물 외에도 여론을 규합하는 공공장소로 커피하우스가 나타났다. 1740년에는 런던에 550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으며, 시장이 서는 읍과 도시들에 적어도 한 개씩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이제18세기 영국에서는 시민사회의 형성이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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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는 헨리 7세의 증손녀로 엘리자베스와는 오촌간이었으며,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 메리는 가톨릭 반체제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두 여인 사이에는 시기심도 작용했다. 메리는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한번도 메리를 직접 만나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자기와 메리 중 누가 더 예쁜가를 묻는 등여자다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1570년 교황이 엘리자베스를 파문하고, 그녀를 제거하면 신의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자사태는 심각해졌다. 메리는 유형생할 19년 동안 실제로 몇 차례 반역음모에 가담했지만, 그때마다 엘리자베스는 왕족의 처형을 거부했다. 그러나 1586년 또다시 반역음모가 발각되자 엘리자베스도 어쩔수없이 메리의 처형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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