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결코 만족할 수 없음을 예감하기에, 당면한고통을 외면한 채 삶에 대한 신비에 이끌리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언제나 매혹적인 존재다. 피로도 느끼기 전에 휴식을 필요로 하는 이런 이들을 바다가 위로하고, 때로는 흥분시키기조차 한다. 대지와는 달리 바다는 인간들의 노동과 삶의 흔적들을 지니지 않는다. 어떤 것도 머물지않으며 스치듯 지나가기에, 바다를 건너는 배들의 항적은 그얼마나 빨리 자취를 감추던가! 이로 인해 지상의 사물들은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바다의 엄청난 순수성이 생겨난다.
곡괭이를 필요로 하는 딱딱한 대지보다 바다라는 순결한 물은 훨씬 더 섬세하다.
물 위를 밟는 어린아이의 발은 또렷한 소리를 내며 깊은 고랑을 파고, 물의 통일된 뉘앙스를 한순간 깨뜨리지만,
곧이어 모든 파장은 지워지고, 바다는 태초의 날처럼 다시금 고요해진다. 지상의 행로에 지치거나 앞으로의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예견하는 사람은 이런 막연한 바닷길에 매료될 것이다. 바다의 길은 위험할수록 더욱 달콤하며,
어렴풋하고 황량하다. 바다에서는 모든 것이 신비스럽기만하다. 촌락이며 나무 수풀이며 하늘에 삼라만상을 만들어놓는 구름 때문에 바다 위에 펼쳐지는 거대한 그림자들도 그러하다. 이들은 거칠 것 없는 바다의 들판 위로 평화롭게 떠다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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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이 곧 취미마저 잃고 만 것이었다.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활동도 의미가 없어졌다. 기계는 작곡도 잘했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음악을 분당이천 곡쯤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소설도 시도 그림도 다 그랬다. 창작은 이제 무의미했다. 세상에는 좋은 게 차고 넘쳤다.
누가 엉성한 작품 하나를 더 보탰다는 소식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다.
창작으로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려면 점점 하찮은분야를 파고들어야 했다. ‘라테 아트‘를 연상시키는, 오므라이스 위 ‘케첩 아트 처럼, 하지만 그거라고 기계가 더 못 할리 없었다. 학술 활동도 다 그랬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골판지학이라는 학문이 유행했지만, 그 분야 최고 논문을 인공 지능이 썼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 오일 만에 골판지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논문 구백 편이 제출되었다. 보통 사람은 그걸다 읽는 데만도 오십 일은 걸렸을 테니, 누가 쓴 논문인지는따져 보나 마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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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정원과 작은 숲, 들판에 맹렬히 불고 있으나,
태양의 위세를 분산하고 몰아내는 데 역부족이다. 그저 태양이 쏟아져 내리던 덤불 가지들을 사납게 흔들 뿐.
이제는 떨리는 햇살로 반짝거리는 숲속 안 가지들마저 온통 살랑거린다. 나무들, 마르고 있는 빨래들, 펼쳐진 공작의 꼬리는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고 푸른 그림자들을 투명한 대기 중에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이 그림자들은 잘못 날려진 연처럼 지면을 떠나지도 못한 채 바람이 불 때마다 날아다닌다. 바람과 빛의 이런 뒤섞임으로 내륙 지방인 샹파뉴의 한구석이 바닷가 풍경을 닮게 된다. 햇살에 달구어지고 바람에 헐떡거리며 텅 빈 하늘 을 향해 땡볕 속에 있는 이 오르막길의 꼭대기에 다다른 우리가 발견하게되는 것은 태양과 물거품으로 하얗게 된 바다가 아니란말인가? 매일 아침 그대가 올 때면, 산비둘기며 제비나 어치가 날아다니며 오솔길에 떨어뜨린 부드러운 깃털과꽃들로 그대 두 손은 가득했지. 내 모자에 꽂힌 깃털이 흔들리고, 단춧구멍에서 양귀비는 시들고 있으니, 우리 이제 어서 귀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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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울적할 때 따뜻한 침대에 누우면 기분이좋아진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더는 힘들게 애쓰지말고, 가을바람에 떠는 나뭇가지처럼 나지막이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을 통째로 내맡기면 된다. 그런데 신기한 향기로 가득 찬 더 좋은 침대가 하나 있다. 다정하고, 속 깊고, 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우리의 우정이다. 슬프거나 냉랭해질 때면, 나는 거기에 떨리는 내 마음을 눕힌다.
따스한 우정의 침대 안에 내 사고(思考)를 맡겨 버리고,
외부의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나 자신을 방어할 필요도 없어져서 마음은 이내 누그러진다. 괴로움에 울던 나는 우정이라는 기적에 의해 강력해져 무적이 된다.
동시에 모든 고통을 담을 수 있는 든든한 우정을 가졌다는기쁨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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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튈르리 공원의 태양은 잠이 덜 깬 듯 돌계단위를 한 칸씩 미끄러지며 내려가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태양의 그림자는 선잠에 빠진 금발 청년을 금방이라도 깨울 것만 같았다. 오래된 궁전을 배경으로 어린 새싹들이 푸르러져 간다. 무엇엔가 홀린 바람의 숨결은 과거의 냄새에 라일락의 신선한 향기를 섞는다. 미친 여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처럼 흔히 우리를 겁주던 석상들은 이곳 소사나무 아치 아래에 꿈을 꾸듯 서 있다. 녹음 속에서 흰 빛으로 눈부신 그 모습이 마치 현자들 같구나.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수반은 흡사 사람의 시선인 양 빛난다.
강가의 테라스 너머로 센강 저편 케 도르세의 고색창연한 동네에서 과거로 돌아간 듯 근위병 하나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제라늄 화분들 위로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침범해 온다. 태양 아래 타오르는 지치꽃은 자신의 향기를 불태운다. 루브르 궁전 앞에 있는 접시꽃들은 경쾌한 돛대처럼, 기품 있는 기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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