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은 안근에 의지해서 작용하고 이식은 이근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이와 같이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전오식 자신만의 특정한 한은
근에 의지해야만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의식은 의근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무엇을 의근이라 할까? 눈을 안근이라 하고 귀를 이근이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은 뇌를 의근이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오해다.
안근에서 신근까지의 5근이 육체적인 것인 반면, 의근은 마음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부파불교(소승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는 의근을 직전 찰나에 작용하고 소멸한 6식이라고 했다. 어떤 소리를 듣고 모차르트의 교향곡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소리를 들은 것은 이식이고,
그다음 순간 모차르트의 교향곡이라는 생각을 일으킨 것은 의식이다.
이때의 이식이 의근에 해당한다.

법이라는 용어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다. 법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달마dharma 이며 빨리어로는 담마dhamma 인데, 이것이 중국에서 ‘법‘으로 의역되었다. 불교에서 사용되는 법의 의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는 진리,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 셋째는 존재 · 현상 · 사물이다.
‘법을 깨닫다‘ 할 때의 법은 진리를 뜻한다. ‘불법(佛法‘은 부처님의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이때의 법은 가르침을 의미한다.

열반에 이르는 데 관건을 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18계 속에 다 들어가며, 18계를 구성하는 하나하나는 죄다 무상하고 무아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라서 자신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붙잡으려고 해도 언젠가는 다 떠나간다. 그러니 놓을 줄도 알고, 과거에 오염된 눈이 아니라 순간순간 새 눈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사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을 보이고자 불교는 모든 존재를 5온이나 12처 또는 18계의 체계로 분류하는 것이다. 무상하고 무아가 아닌 모든 것은 이름일 뿐이니 이름에 속지 말아야 한다.

참고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색 무수상행식‘은 5온이 자성으로서는 없다는 뜻으로, 5온은 곧 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5온이 곧 공이라는 것은 일체가 곧 공임을 나타낸다는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과 ‘무無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각각 12처의 공과 18계의 공, 곧일체의 공을 뜻한다.

유식에서는 우리의 번뇌에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전자를 생기후자를 분별기번뇌,
번뇌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번뇌가구생기 번뇌라면,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거나 본인의 분별망상에 의한 번뇌가 분별기 번다. 말나식이 일으키는 번뇌는 모두 구생기 번뇌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은 바위처럼 견고하다. 문득 정신을 차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횃불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거센 바람에 횃불은 곧 꺼지고다시 찾아온 암흑 속에서 망연자실 서있다. 본유무루종자가 있다고 하나 엄동설한 굳은 땅에 묻힌 전단향의 종자처럼 싹은커녕 향기조차도뿜지 못하고 있다.
위의 상황이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아닐까. 그러나 부처님과 역대전등 조사들이 걸으신 그 길을 향한 염원을 저버리지 않고, 넘어질 때마다 발원하여 일어서서 그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때가 온다.
하늘은 비를 내린다. 이 비에 대지가 촉촉이 젖으면 땅속의 전단향종자도 마침내 향기로운 싹을 낸다. 여기서 하늘은 부처님이고, 비는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촉촉이 젖은 대지는 가르침에 따라 실천 수행한우리들 마음이고, 전단향 종자는 본유무루종자이며, 돋아난 향기로운싹은 무분별지다.

거짓말 한 번, 물건 하나 슬쩍하는 행동이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지 몰라도 그 종자는 어김없이 심어진다. 그 종자가 늘어날수록 그 행동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고, 급기야 뜨거운 물속의 개구리와 같은지경을 당하게 된다. 때가 늦기 전에 스스로 되돌아볼 일이다.

‘밉다‘라는 상 그 자체가 나이고, ‘밉다‘라는 상과 별개인 나는 없다.
이 사실을 뼛속 깊이 자각했다면 ‘밉다‘에 대한 긍정과 부정, 정당화와비난 등 그것에 대한 더 이상의 상을 형성하는 작용은 멈춘다. ‘밉다‘에대해 긍정과 부정 등 새로이 덧붙여지는 대립되는 상들이 있다면 그것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미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생긴다. ‘밉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더 이상의 상을 형성하는 작용이 멈추었으므로 대립되는 상들도 없고 그것들 사이의 갈등도 없다.
이때 ‘밉다‘라는 상에 있는 그대로‘ 직면한다. ‘일체의 상을 여읜 부처‘,
곧 참된 지혜의 길은 위의 제반사항에 대한 혼신의 참구에서부터 열리기 시작한다.

소금 한 움큼을 컵 속의 물에 타면 매우 짜다. 하지만 우물 속에 넣으면 물맛은 거의 변화가 없다. 소금의 양은 일정하지만 소금이 들어가는 물의 양에 따라 물맛은 달라진다. 과거에 심은 번뇌 종자가 있다 하더라도 지혜와 자비의 종자를 많이 심어나간다면, 우물 속의 소금 한움큼처럼 그 힘이 미약해서, 번뇌 종자에서 악행이나 괴로운 과보가 생겨날 확률도 그만큼 떨어지기 마련이다.
오늘부터 당장 지혜와 자비의 종자를 차근차근심어간다면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하는 해탈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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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무계획에,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 손님을 맞이할 날이 가까워지자 역시 불안해졌다. 카페의 메뉴를 만들어보며 마실 만한 것인가 자문자답하거나 친구에게 물어보곤 했다.
그때 무라모토 씨가 해준 말을, 무라모토 씨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지금도 가끔 떠올린다.
하면서 프로가 되는 거니까 괜찮아.
카페를 시작했을 때, 이 말은 부적이었다.

그 사람은 시인이에요. 늘 라이브를 보러 오는 손님이돈치 씨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있는 분이니, 말과 글 해석하는 걸 생업으로 삼고 있다. 그런 사람이 여기서 듣는 노래 중 제일 좋다고 말한다. 노래를만들면 시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글을 잘 다루는 것만으로는 물론 시인이 되지 못한다. 자, 그럼 어때야 시인인가 하고 물어보면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 역시 돈치 씨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출근하다가 돈치 씨를 본 적이 있다. 비즈니스호텔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거기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강가를 걷고 있었다. 아아, 오늘도 역시 돈치 씨가 있네.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낯선 거리에서 봐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디에 있어도 그곳은 돈치 씨의 거리가 된다. 오늘도,
아마 어딘가의 거리에서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그 거리의누군가가 웃거나 서글퍼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눈물을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돈치 씨에게는 돌아갈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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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순간의 행위와 그 종자들을 일종의 에너지로 보면 이해는 쉬워진다. 일상생활 순간순간 우리는 몸과 말과 생각으로 온갖 종류의 에너지를 쌓고 있다. 본인이 하루 종일 쌓고 있는 에너지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 살펴본 적이 있는가. 선하고 맑은 에너지인가? 아니면 분노와 증오 짜증과 탐욕 등의 탁한 에너지인가? 번뇌의 에너지가 쌓이면 쌓일수록번뇌 장치들은 견고해지고 급기야 주체할 수 없는 번뇌의 충동으로 불 속으로 질주하는 불나방이 되고 만다.

일반적인 자원봉사나 기도도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봉사와 기도로전환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열반과 해탈은 성취된다. 이 모든 것은 반바라밀다를 얻을 때 가능해진다.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자신이 행한유루선에 대한 집착 등 모든 번뇌는 소멸되고, 순수한무루만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유식은 우리가 반야바라밀다를 얻지 못하는 원인을어디서 찾고 있으며,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반야바라밀다에 이른다고 통찰하고 있을까?
가야금 소리가 잘 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줄을 너무 세게 죄거나 너무 느슨하게 죄면 안 된다. 가야금마다 알맞은 줄의 세기는 각각 다르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반야바라밀다에 매진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도다다르다. 기복불교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禪에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을되돌려 자신의 참된 모습을 비추어본다는 뜻으로, 진리는 먼 곳에 있는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자등명의설법과 맥을 같이 하는 경구다.
여느 때처럼 스마트폰에 중독의 눈이 갈 때 그 순간의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을 ‘이것이 무엇이지?‘라는 의문을 갖고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떨까?

어두운 방에 등불이 타고 있다. 등불이 빛남으로써 저절로 자신의모습도 밝게 드러나 있다. 등불 자신의 모습이 밝게 드러난 것은 등불이 빛나고 있다는 이 하나의 사실 때문이지, 등불이 자신을 비춘다는별도의 작용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우리들은 ‘등불이자기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말에 의한 표현일 뿐이지 사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음은 이 등불과 같다. 실제로 있는 것은 나무의 형상을 띤 마음이밝게 나타나 있다는 이 사실 하나뿐이다. 등불이 빛나고 있는 것만으로등불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듯이, 나무의 형상을 띤 마음이 나타나 있는것만으로 나무라는 인식이 저절로 일어난다. 마음이 자신을 인식한다는 별도의 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편의상 ‘나무의 형상을 띤마음이 자기를 인식한 결과 나무라는 인식이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을뿐이다.

값비싼 보약보다도 마음 편한 것이 건강에는 더 중요하다. 대학생시절 어머니에게 안부인사 드리러 고향에 간다는 나의 말을 들은 한의사 한 분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것보다 어머니에게 더 좋은 보약은 없습니다. 기쁨을 주는 자식이 부모님에게는 최고의 보약입니다."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 한마디, 이것으로 가족과 직장 동료와 이웃에게 최고의 보약을 선사할 수 있다.

예불문에 나오는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에서 ‘지심은 지극한마음이고, ‘귀명歸命‘은 목숨을 다해 그 하나만을 향한다는 뜻이다. 그그러므로 ‘지심귀명‘은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 하나만 하는, 혼을 다한정성이며 절절함이다. 참으로 우주를 움직일 정도의 정성이다. 지심귀명례란 이런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올리는 것이다.
예불문의 마지막은 "오직 바라오니, 다함없는 불법·승 삼보시여,
대자대비로 저의 이 지극한 예를 받으시고 그윽한 가피를 내리시어, 모든 중생이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지심귀명으로 예불한 에너지가 내 몸을 만들고 내 주위를 만들고 이 세상을만드는 데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몫을 한다.

불교에서는 눈앞에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의 모습을 보는 마음을 안이라 하고,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을 이식이라 한다. 새 한 마리가나무 위에서 청명하게 지저귀고 있다. 이때 새의 모습을 보는 마음이 안식이고, 새가 내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 이식이다.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이 같은 시점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을까?" 하는질문이 된다.

무상정은 외도나 범부가 닦는 선정으로, 이 선정을 닦으면 무상천이 태어난다고 한다. 멸진정은 성자가 닦는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의식만 작용하지 않지만, 멸진정에서는 의식뿐 아니라 말나식도 작용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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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벌어지는 이 일들을 순간순간 아무런 조작 없이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라. 우리는 진리의 숭배자가 아니라 쓸데없는 생각과 집착의 숭배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업장 덩어리의 허망한생만남을 것이라는위기감도 들 것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하는 행동이 즉신설법, 곧 온몸으로 법을설하는 것이다. 한 수행자가사랑하는 남편을 사고로 잃은 부인을 만났다. 연못 바닥까지 온통 달빛뿐이듯이, 그의 온 몸과 마음은 그 부인의슬픔 그 자체가 되어 눈물을 글썽이며 "부디 어려움을 이겨내시고 힘을 내십시오" 하며 합장하고 머리 숙였다. 어떤 가식도 의도도 없었다.
자신의 행동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이것이바로 온몸으로 법을 설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이 속에다 있다.

「우빠니샤드』의 철인들은 우리가 행하는 행위는 그에 합당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힘을 남기고 이 힘은 존속된다고 생각했다. 『우빠니샤드』에서 ‘업(karman, 業)‘이라는 용어는 주로 행위의 결과로 남게 되는이 힘을 지칭한다. 『우빠니샤드』 시대에 이르면, 이 업에 의해 태어남과죽음을 반복하는 윤회가 있게 되며, 윤회의 와중에서 다음 생에 어떤몸을 받을까도 이전 생에서의 업이 선이냐 악이냐에 의해 결정된다고하는 통찰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윤회는 고통이며, 이 속박에서의해방인 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통찰도 이루어지고 있다.

"윤회란 이전 생의 오온(정신과 육체)을 원인으로 하여 또 다른 오온이라는 결과가생한다고 하는 태어남의 반복을 뜻하지만, 이 생에서 저생으로 옮겨가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다."
인과관계에 의한 새로운 오온의 이어짐은 있으나, 아뜨만과 같이다음 생으로 변함없이 영속하는 연속체는 없다는 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용수는 여러 비유를 든다. 그중의 하나가 경전복창의 비유다. 경전을 가르칠 때 스승이 먼저 경전 한 구절을 독송하면 제자는 그것을 듣고 복창한다. 이때 스승의 말이 스승의 입에서 제자의 입으로 그대로 옮겨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의 복창은스승의 말 이외의 다른 곳에서 온 것도 아니다.

어떤 것들이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다면 그것으로써 양자는 공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이 논지는 중관파의 시조 용수(150~250경)에서부터 후기의 거장 샨따라끄시따(Santaraksita, 725~788경)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았다. ‘불일불이‘는 자성 없이도 온갖 작용이 일어나 세상만사가성립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공은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이기 때문에 도리어 세계는 성립한다.

공의 진리 그대로 사는 도인은 산을 보면 산이 되고, 물을 보면 물이 된다. 산이 되었을 때 온 천지에 산만 있을 뿐, 도인은 없다. 산에 대한 분별이 없기에 비교 대상이 없는 산은 이미 산이 아니다. 일이 있으면 그냥 일하고 졸리면 푹 잔다.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는 철저히 죽는다. 집착이 없어 순간순간 눈앞의 그것과 하나가 되지만 그것에 물들거나 머물지 않으며, 불변의 나(我)와 사물이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중생인 나에게서 너란 항상 내 안경을 통해서 들어온 너다. 너를 본다는 것은 곧 나를 본다는 것이다.

세상에 똑같은 나뭇잎은 없다. ‘목련 잎‘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나뭇잎. 하지만 그중에 모양과 색깔과 결이 똑같은 잎은 단 한 쌍도없다. 한 장의 목련 잎도 시간의 간격을 두고 보면 다 다르다. ‘목련 잎‘
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똑같은 나뭇잎은 어느 경우에도 없다. 이름은 그야말로 이름일 뿐이다.
성인 남성의 평균 세포 수는 약 60조 개라 한다. 이 세포들은 약 3개월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된다고 한다. 매 순간 어마어마한 수의 오래된 세포들이 죽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세포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몸은 한순간도 정지함이 없이 시시각각으로 태어나고 죽는 생멸의 과정에 있다. 내 정신이라는 것도 몸과 다를바 없다. 매순간 새로운 느낌과 생각, 감정들이 일어났다가 소멸한다.
어제도 나이고 오늘도 나라고 확신하며 이 확신에 근거해서 온갖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위에서 살펴본 대로 내 몸과내 정신이 동일한 두 상태를 갖는 경우는 결코 없다. 어제도 나이고 오늘도 나이기 위해선 어제부터 오늘까지 변치 않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나에게는 ‘나‘라는 이름이 예상케 하는 ‘변치않는 무엇‘, 즉 ‘자성‘ 또는 ‘아뜨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름만 ‘나‘다.

따라서 부파불교가 생각한 이상적 경지는 궤적을 그리는 점의 완전한 소멸이었던 반면, 대승불교의 그것은 태어나고 죽는 궤적 위에 있으나 궤적을 초월한 점들의 연속이었다. 중생의 눈에는 그의 궤적이 있으나 본인에게는 궤적이 없는, 만물과의 경계가 허물어진 찰나적 점들이생멸하는 연속이 대승불교의 보살이 살아가는 삶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고 자신 속의 갈애와 만나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갈애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 비난을 하거나 칭찬을 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그것과 만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뭔가를 재잘거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온갖 것에 대해 ‘좋다 싫다‘, ‘밉다 곱다‘, ‘옳다 그르다‘ 이러쿵저러쿵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이러한 재잘거림과 그것을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 일련의 행동·말·생각이 바로 반응이다.
이런 반응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통절히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하여 반응들이 멈출 때 있는 그대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가 보이면 강압에 의한 인위적인 질서가 아니라 자연스런순리가 마음에 생긴다. 긍정도 떠나고 부정도 떠난, 칭찬도 떠나고 비난도 떠난 중도中道의 순리.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우리 모두는 어디를 향해 치달리고 있는 것일까?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죽는 날까지 과연 이렇게 살다가 임종을 맞으면, 그때 후회는 없을까?
우리는 갈애와 무명에 휘둘려 사는 가련한 중생들이다. 상당한 지위와 부를 소유하고 있어도 욕망의 유혹에는 대부분 약하다. 이래서는안 되는데 하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끄달려가다가 어느새 닮기싫었던 사람이 되어있기도 한다.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분노에 두 눈이 충혈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튀어나오거나, 죄의식에 짓눌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자포자기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모두 늦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말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대는 단지모든 생각을 내려놓기만하면 된다."
괴로움과 파멸로 가는 흐름을 진정 멈추고자 하는 자는 그 성공과실패를 미리 따지지 않는다. 아니, 그에게는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진정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고자 하는 자는 깨달을 가능성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더구나 이곳은 깨달은 자가 몇 명인데 저곳은 몇 명이라는 식으로 깨달은 자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며 그 우열을 논하는 데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좁은방 안에서 독사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온 몸과 마음은눈앞의 독사의 움직임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독사를 피한 사람의 숫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독사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쓸 겨를이 없다.

내가 행하는 몸짓 하나, 말 한마디, 생각 한자락은 결코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반드시 자신과 성질이 동일한 종자를 나의 아뢰야식에남기고 사라진다. 그 종자는 없어지지 않고 아뢰야식에 남아있다가 때가 갖추어지면 그에 맞는 결과를 가져온다. 악담이 남긴 종자로 인해나는 또다시 악담을 하게 되고 괴로움의 과보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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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라고 했다.
연기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물을 컵에 부으면 물은 컵 모양이 된다. 컵속의 물을 바가지로 옮겨 부으면 물은 금세 바가지 모양이 된다.
물이 처음부터 컵 모양을 한 것은 아니다. 컵이라는 조건(인연)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컵 모양이 생겨난다. 그러나 한번 컵 모양을 했다고해서 컵 모양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바가지로 옮겨 부으면,
다시 말해 컵이라는 조건은 없어지고 바가지라는 새로운 조건을 만나면 물은 순식간에 바가지 모양으로 변한다. 컵 모양이든 바가지 모양이든 그 조건에 의존해야만 있을 수 있고, 조건이 소멸하면 그 모양도 함께 소멸하니 연기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런데도 한때의 자기 모습을 영원히 고정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 곧 어리석음이다. 마치 물은 늘 컵 모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이 어리석음에 의해 괴로움의 씨앗이 뿌려진다. 자신의 어느 한 모습에 집착하는 순간이 괴로움을 부르는 순간이다. 나의 진짜 모습은 사장도 아니고 일용직 노동자도 아니다. 그러나내가 사장이라고 고집하는 순간, 회사 밖에서도 사장님 대우를 받지 못하면 화가 난다. 여기 오곡도에서 지게를 져야 할 때도 사장님인 내가대단한 하심을 했다고 은근히 뽐내며, 그 하심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사장‘이라는 한 모습에 집착하기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괴로움을 겪는 것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이 말은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의 이치 그대로 사는 사람이 연기의 냄새라고는 전혀 풍기지 않으면서, 살아있는 연기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이 말을 외워서 사람들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똑같은 말이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질은 천양지차다. 울림이 없는 말, 그 허황함을 통절히 안 사람은 선택에 눈을 뜬다.

그런데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이와 유사한오해를 하고 말았다. 그 오해의 연장선에서 구축된 그들의 사고방식은상당 부분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많이 닮아 있다. 설일체유부를 줄여서
‘유부有部‘라고도 부른다. 대승의 공사상은 유부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공을 이해하는 것은 유부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일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진단하고 바로 잡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성은 연기하지 않는 것이며, 연기와는 양립될 수 없는 모순 관계에 있다. 연기를 인정하면 자성이 부정되고, 자성을 인정하면연기가 부정되는 관계다. 연기하는 것은 조건이 충족되는 한도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에 조건 여하에 따라 변화·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성은 연기하지 않는 것이므로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고정불변이고 영원히 존속한다. 결론적으로, 자성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면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것‘을 말한다.

눈앞의 삶이 진정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올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산다. 행복이라는 안경도, 불행이라는 안경도 끼지 않고 그냥 맨눈으로 삶을 본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름에 필요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지금 여기 눈앞의 일에 온전히 몰두한다. 돌아올 대가를 생각하고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몰두가 될뿐. 더 행복해지려는 탐욕도 없고, 불행이라는 생각이 드리우는 우울한 그늘도 없다.

결론적으로 유부는 번뇌를 마치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는 도둑과같이 생각했다. 내 마음과 번뇌가 결합했다는 것은 도둑이 침범한 것이요, 양자가 분리되었다는 것은 도둑을 쫓아낸 것과 같다. 도둑이 침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도둑은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다. 도둑인 번뇌는 항상 존재하는 자성이다. 반면에 공사상에 의하면, 번뇌는 공이며자성이 아니다. 눈병 환자의 눈에는 있지도 않은 헛것이 보이듯이, 어리석음 때문에 번뇌가 아닌 것을 번뇌로 보고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초상집에는 액운이 늘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부의 사고방식이다. 있지도 않는 액운을 어리석은 마음으로 스스로 만들어 괴로워한다는 것이 공사상의 통찰이다.

의발을 찾으러 쫓아온 당신. 선악도 생각하지 말고, 고귀함과 추함도 생각하지 말고, 모든 규정과 결론에서 자유롭게 되어라. 이때 당신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가? 알았거든지금 당장 보여봐라.
과거의 결론에 붙들리지 말고 진실만을 보라. 지금 본진실을 결론으로 고정시키지 말고 다음의 진실을 보라. 말뚝에 매어둔 끈에 발이묶인 새는 한없이 펼쳐진 창공을 자유롭게 날지 못한다. 결론의 끈에 발이 묶인 초라한 새가 되지 말라.

"말의 허구(희론)를 초월한 불멸의 부처를 말로써 허구화하는 그들모두는 말의 허구에 손상 받아 여래를 보지 못한다(『중론』 제22장 제15송)"
라는 게송이 시사하듯이, 말이 주인 행세를 하면 사물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해 괴로움이 발생한다. 말의 속박인희론에서 자유롭게 될 때 모든편견에서 벗어나 비로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때 해탈이 있다. 희론은 공에서 소멸한다.

세상은 말에 의해 움직이고 말에 의해 질서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말의 허구(회론)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이 현실을 완전히 떠나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현실에서 말의 허구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그것이 해탈이다. 그곳에서는 죽었던 유와 무가진실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렇게 진리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풍광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하지만 우리 중생에게는 ‘색즉시공‘이 없이는 ‘공즉시색‘도 없다.

공을 생각할 때 두 가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공은 이론적으로는무자성을 뜻하고, 실천적으로는 무집착無착하지 않는 것이 공을 실천하는 것이다. 집착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모든 것에는 그렇게 집착할 만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상은고정불변의 요강이 아니기 때문에, 즉 무자성이기 때문에 요강에 대한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진실에 맞는 당연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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