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리기의 경험은 우리가 알아차리는 대상과는 아무런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경험도 알아차리기라는 비대상적 경험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그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듯이 말이지요.
알아차림이라는 배경을 인지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대상적 경험을 바꾸거나 조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렵든 지루하든 동요하는 우울하든 사랑에 빠지든 평온하든 상관없이, 알아차리기의 경험은 변함이 없습니다.

알아차리기의 경험을 경험의 전면으로 나오게 하고,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이 배경으로 물러서게 하십시오. 순수한 알아차리기의 경험에 주목하십시오. 누구나 바라는 평온함과 행복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알아차리십시오.

깨달음enlightenment이나 자각 awakening은 충분히 힘들게수련하거나 충분히 오래 명상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특수한 경험이나 마음 상태가 아닙니다. 단지 마음의 본성 그 자체를 인지하는 것뿐입니다.

반면에 누군가가 "의식 consciousness 은 존재하나요?"라거나
"알아차림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단어들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머뭇거릴 것입니다.
그러니 이 책에서 ‘알기 knowing‘나 ‘알아차리기 being aware대신에 ‘의식 consciousness’과 ‘알아차림 awareness ‘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해도 모두 ‘알아차리기‘라는 의미로 이해해주기바랍니다.

"나는 알아차린다"라는 경험은 곧 알아차림의 자기 자신에대한 앎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한 우리의 삶은 알아차림의 자기 자신에 대한 앎입니다.
태양은 스스로 빛나기 위해 특정 방향으로 빛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도 스스로를 알기 위해 자신의 "주의 attention"를, 즉 삶의 빛을 특정한 방향으로 보낼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차리기는 지식을 습득하거나 특정 경험을 한다고 해서 결코 강화되지도 않고 손상되지도 않습니다. 알아차리기는 경험에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특정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않으며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그 자체는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 그 자체는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조건 지워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림 그 자체는 마음의 본질적이고도 환원불가한 핵심이며, 대상적 경험이라는 형태에 의해 조건 지워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조건적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아름다움은 알아차림의 본질입니다. 사랑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친숙한 경험 속에서 알아차림은 자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현실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 폴세잔Paul Cezanne은 예술이 우리에게 "자연의 영원함을 맛보게 해준다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지적인 생각을 아는 알아차림은 가장 바보 같은 생각을 아는 알아차림과 동일합니다.
고통, 긴장, 동요의 감각을 아는 알아차림은 기쁨, 느긋함,
따뜻함의 감각을 아는 알아차림과 동일합니다.
분노, 슬픔, 비탄의 경험을 아는 알아차림은 고마움, 친절,
즐거움의 경험을 아는 알아차림과 동일합니다.

평생 자연을 담은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를 상상해 봅시다.
풍경을 비춰주는 빛의 존재를 화가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지식과 경험을 비춰주는 알아차림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알아차림이 몸의 한계, 몸의 운명을 공유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몸의 속성과 한계와 혼합된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개별적 자아인 에고 separate self or ego가 생겨났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개별적 자아가 곧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되지요.
참되고 유일한 "나self"는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이라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결코 대상적 경험 때문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대상적 경험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거나 마비시킬 때라도 영원함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신에 대한 갈망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파이라의 논의는 주로 베단타 철학에 기반하고 있지만기독교나 불교의 관점도 수시로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베단타 철학 자체를 다룬다기보다는 신비주의적이고도 종교적인것들을 싹 걷어내고 핵심적 논의만을 추출하여 현대적이고도 일상적인 언어로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가장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증류 과정을 거쳐 원액을 뽑아내듯이 베단타철학으로부터 핵심만 추출한 그의 논의는 기독교나 불교의가르침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는 전혀 종교적이지 않지만, 어떠한 전통적인 종교 지도자보다도 더욱더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동시에 어떠한 명상 지도자보다도 더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한 명상법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한 수련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해주겠다거나 신비한 경험을 하게 해주겠다는 "명상 전문가는 사실 명상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 보면 된다.

이러저러한 경험을 하고 있음을 늘 알아차리고 있는 존재가 곧 진짜 ‘나‘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행위가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지켜보는존재가 곧 진짜 "나"다. 이 진짜 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늘 알아차리고 있다. 다만 잊고 있을 뿐 뒤에 배경에 늘 있다.
나는 이것을 ‘배경자‘라 부른다. 스파이라가 이 책에서 영화 스크린에 비유하는 것이 바로 이 배경자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다시 손에 있는 휴대폰을바라보라. 휴대폰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이 휴대폰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경험하는 주체는 분명히 있다. 그것이 바로 나다.
휴대폰이 "나"인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바라보는 것이 나다.
휴대폰이라는 대상을 경험하는 주체가 곧 진짜 나다. 내가지닌 온갖 소유물들 역시 그 자체로서 "나"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차리고, 인식하고, 경험하는 주체가 진짜 "나다.

명상이란 말과 말 사이의 틈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실제 명상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한 문장과 다음 문장 사이에긴 정적이 있습니다. 명상하는 사람들은 고요함 속에서 한 마디 한 마디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탐구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실제 명상 모임에 앉아서 명상 가이드를 듣는 것과 유사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각 문장과 단락 사이에 공간을 두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했던 순간이 반복되기를바라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원하는 대상적 경험을 추구하거나 싫어하는 대상적 경험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결핍, 탐색, 일시적인 충족이라는 무한한 순환에 중독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Thoreau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용히 절박한 삶을 살아간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이러한 깨달음에 도달하고 나면 더 이상 대상적 경험에서지속적인 평온함이나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를 할 수가 없게됩니다. 이러한 직관을 자꾸 잊어버리고 대상적 경험에서 만족감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점점 더 자주, 더 강하게, 더 분명하게 깨닫게 마련이지요. 이러한 직관을 무시하다가는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음이 알아차림의 빛의 방향을 경험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로 향하게 할 때, 마음은 점진적으로, 때로는 갑자기,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대상적 경험 속에서 찾아 헤매었던 평온함과 행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온함과 행복이 우리 자신의 본질이라면, 왜 우리는 항상평온함과 행복을 경험하지는 않는 것일까요? 당연히 떠오르게 마련인 의문입니다. 왜 다른 일반적인 경험과 마찬가지로행복도 가끔씩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요? 행복과 불행 모두알아차림 안에서 번갈아 생겨나는 대상적 경험이 아닐까요?

행복이라는 우리의 본래적인 상태가 잠시 드러나는 순간은 마치 잿빛 구름 사이로 파란 조각하늘이 살짝 드러나는것과도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그저 불만족이라는 구름이 잠시 없어진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며, 사람들은 그 행복한 상태로부터 얼른 도망가 버리고는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마음mind‘의 본래적 모습을 깊이 탐구해본다면, 즉 생각, 느낌, 감각 지각의 여러 층위를 뚫고 내려가서 우리 마음의 본질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실체에 도달하게 된다면 우리는 항상 그곳에서 파란 하늘과도 같은 평온함과 온전한 충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행복은 불행과 더불어 번갈아 일어나는 일시적인경험이 아닙니다. 파란 하늘과 구름이 서로 반대가 아니듯이행복과 불행이 서로 반대는 아닙니다. 구름이 파란 하늘을 잠시 가리고 있듯이 불행은 행복을 잠시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우리의 본성이며,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마음의 원천에, 우리 자신의 핵심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드러날 수 있을 뿐입니다.

가장 깊고 본질적인 내면에 존재하는 평온함과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명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에집중하고, 마음을 관찰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명상은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마음의 본질을 명료하게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 그 자체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알아차림이세상에 대한 앎과 경험에 충만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과 실체의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 알아차림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알아차림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이미 내재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알아차리기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는 연속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알아차리기는 시간을 초월해서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의흐름이라는 개념이 너무도 익숙하므로, 여기서는 일단 알아차리기가 모든 경험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해두겠습니다.

지식과 경험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경험하는 대상은 항상 변화하지만,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은 늘 그대로입니다.

알아차리기는 모든 지식과 경험의 주된 요소입니다. 또한모든 지식과 경험이 생겨나는 배경입니다.
알아차리기는 모든 경험이 나타나는 매개체입니다. 모든경험은 알아차림을 통해 알려집니다. 궁극적으로 알아차림은모든 경험이 만들어지는 바탕이자 실체입니다.
알아차리기는 모든 앎에 있어서 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기는 모든 경험에 있어서 경험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경험에서 가장 명확한 요소이면서도 우리가 늘 간과하고있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따라서 이는 카슈미르 시바Kashmir Shaivite 철학 전통에서
"가장 잘 숨겨진 것보다 더 숨겨져 있으면서도, 가장 명백한대상보다 더욱 명백한, 가장 위대한 비밀"이라 일컬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은 그녀가 태어난 계절, 즉 ‘나의 계절’이었으므로, 전부터 봄이 되면 이상하리만치 특별하게 건강과 활력이 돋는다고 믿었다. 따스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새들을 부르는 로잘리의 얼굴은 환히 빛났다.
마당의 꽃밭에서 처음 피어난 크로커스, 수선화, 히아신스나튤립의 새싹이나 꽃잎을 볼 때면 눈물을 글썽일 정도였다. 교외로 소풍을 가다가 길가의 사랑스러운 오랑캐꽃, 노랗게 핀금작화와 개나리 덤불, 빨간색 또는 하얀색의 산사나무꽃, 라일락, 밤나무의 붉고 하얀 꽃,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그녀는 딸도 함께 감탄하고 황홀감에 빠지기를 바랐다. 로잘리는 화실로 꾸민 북향 방에 자리한 추상적인 그림 사이에서 딸을 끌어냈고, 안나는 종종 가운을 벗어 버리고 어머니와 함께 몇 시간이고 즐겁게 산책을 했다. 그럴 때 안나는 놀랄 만큼 잘 걸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될 수 있는 한 움직임을 줄여서 절뚝거리는 모습을 감추려고 했지만, 혼자 있으면 마음 편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꽤 오래 걸을 수 있었다.

로잘리는 보리수가 꽃피는 7월에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때 역시 그녀가 좋아하는 계절로, 창문을 열어 놓으면 몇주동안 가로수의 형언할 수 없이 맑고 부드러운 향기가 집 안을가득 채워서 입가에 황홀한 미소를 머물게 했다.

T
"엄마,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나이 든 여성을, 인생의 과업을 완수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그 자연에 의해 새롭고 안락한 상태로 옮겨 가면서 위엄을 얻은 여성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거예요. 생리를 마치는 것은, 말하자면 보다 높고 아름답고 명예로운 경지이므로, 여러 사람들에게, 가까운 사람에게든 먼 사람에게든 여전히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닌가요? 남자를 부러워하시는데, 물론 남자가 여자에 비해 성생활면에서 자유로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게 과연 좋은지, 부러워할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워요. 그리고 모든 기품있는 민족은 항상 노부인을 존중하고 신성시했어요. 그러니우리도 엄마의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노년의 위엄을 신성한것으로 생각하도록 해요."

"그래요, 엄마, 이해해요. 하지만 이것 보세요. 몸하고 마음은 하나예요. 육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것 역시자연이에요. 자연은 심리도 포함하니까요. 너무 두려워하실필요 없어요. 엄마의 마음도 머지않아 몸의 자연스러운 변화와 화합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세요. 감정은육체의 영향을 받는다, 또 우리의 감정이 변화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힘겨운 임무를 맡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몸한테 그 일을 떠넘겨서 직접 해결하게 한다고,
왜냐하면 육체가 감정을 상황에 맞도록 조율해 주거든요."
어째서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지 튀믈러 양은 알고 있었다. 엄마가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즈음, 집에서 종종 새로운 얼굴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은 전에 없이자주 보였고 그 탓에 일종의 미묘한 기류가 생겨났는데, 안나의 조용하고 신중한 관찰을 결코 피해 가지 못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살롱을 오갔다. 여자들한테 편하게 굴면서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여자들앞에서는 모국의 풍속에 따라, 괜스레 식사 때 고기를 잘게 썬 다음 나이프를 접시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올려놓은 뒤에 원손은 내려놓고 오른손에 포크를 쥔 채로 썰어 놓은 고기를 집어 들었다. 자기 나라의 습관을 그대로 고집했는데, 옆의 여자들이나 건너편의 남자들이 굉장히 흥미로운 눈길로 자신의식사 모습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얘야, 이건 있잖니, 말하자면 가슴속의 일인데, 놀랍고수수께끼 같고 전능하고, 때로 우리에게 아주 이상하고 모순적이고 심지어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일이란다. 너도 알 거야, 안나, 요즘 나는 몇 번이고 너의 옛날 일이, 그 얘기를 꺼내서 미안한데, 브뤼너와의 일이 생각나는구나. 지금하고 상당히 비슷한 시간에 네가 고백했던 그 괴로움 말이다. 그때 너는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심지어 그 갈망을 치욕이라고 불렀지.
너의 이성과 판단이 너의 심장, 네 말대로 하자면 너의 관능과대립하게 되었음을 수치스러워했어."

"얘야, 네가 단지 나를 위로하려고, 내 고통을 달래 주려는 동정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길 바란다. 내가 너한테동정을 바라는지도 모르겠다만, 그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내가 겉으로는 동정을 바라는 듯 보일지 몰라도 사실 그런 고통이나 수치심마저 나의 행복이고, 내심 이 ‘고통의 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단다."

보트 모양의 모직 슬리퍼가 자꾸 발에서 벗겨지려고 했다. 폰 튀믈러 부인은 결국 한쪽 슬리퍼를 발에서 놓쳤다. 그것은 바닥에서 미끄러지더니 상당히 멀리 사라져 버렸다. 키튼이 웃으면서 슬리퍼를 집어다가 무릎을 꿇고 신겨 주는 동안, 두 사람은 다른 관람객들보다 뒤처졌다. 키튼이 다시 부인의 팔꿈치를 잡았지만 부인은 앞의 방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꿈꾸는 듯한 미소만 지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 기댄 그녀가 몸을 돌려서 아까 열렸던 벽지 문에 성급하게 손을 댔다.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으로도 도무지 상상해 낼 수 없는결혼이 있다. 연극에서 용납되듯이, 늙고 어리석은 인물과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인물처럼 극명하게 대조되는 한 쌍이 모험적으로 결합하더라도 그저 의혹 없이 수용해야 하는 것이있다. 그런 설정은 (연극의 전제가 되기도 하고, 특히 익살극에서라면 수학적 구성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잠시 후 더욱기이한 일이 벌어졌는데, 로이트너 씨가 마치 전염이라도듯 흥분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격하게 들뜬 채 몸을떨면서 서둘러 말했다.

홀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악단 주자들은 악기를 꺼내 놓았다. 그때까지 무관심한 듯 삐죽내민 입술 사이에 담배를 물고 말없이 문에 기대서 있던 로이트너 씨가 암라 야코비와 함께 무대 장막의 정면 한가운데있는 피아노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악보를 초조하게 뒤적였고, 다소 창백해진 암라는 한쪽 팔을 의자팔걸이에 올려놓은 뒤 매섭게 관객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모두 목을 빼고 기다리는 동안, 마침내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날카롭게 울렸다. 로이트너와 암라가 도입부의 중요하지 않은 몇 박자를 연주하는 사이에 서서히 막이 올랐다. 비로소 루이스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평생 잊지 못할사건이 벌어졌다. 끔찍하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 찰나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생하게 설명해 보겠다.
「루이스헨」이라는 제목의 우스꽝스러운 노래는 잘 알려져 있다.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구절을 기억하리라.

한순간 정적이 흘렀고, 이내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더니대혼란이 일어났다. 용기 있는 몇몇 신사들과 젊은 의사가 관현악석을 가로질러 무대 위로 뛰어올랐고, 곧장 무대의 막을 내렸다.

곧 젊은 의사가 다시금 홀에 나타났다. 진지한 얼굴에 턱수염을 기른 자그마한 유대인이었다. 문가에서 자신을 둘러싼 몇몇 신사들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루이스헨」은 토마스 만이 25세에 발표한 단편으로, 이보다 먼저 발표한 「행복을 향한 의지」(1896) 와 키 작은 프리데만 씨」(1897), 그리고 이어지는 「트리스탄」(1903)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즉 무언가 부족하고 결여된 현실에서 소외된 남성과 그를 파멸로 이끄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것은토마스 만의 대표작들이 거의 다 남자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을뿐만 아니라, 여성 인물의 역할이 미약했음에 비춰 볼 때 흥미로운 점이다.

「루이스헨」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연극적 진행을 보여주는데, 야코비의 파멸은 음악에 의해, 그리고 음악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토마스 만의 어느 작품에서나 음악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한노, 트리스탄』의 슈피넬, 『파우스트 박사의 아드리안 레버퀸), 특히 창작 초기에 쇼펜하우어의 철학, 바그너의 음악으로부터 큰 영향을받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반지」가 보여 주는 장엄한 몰락의 정서, 「파르시팔」의 죽음을 통한 구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Liebestod)은 토마스 만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몰락, 환멸, 타락, 죽음과상통한다. 여기에서 죽음은 달콤하고 아름답고 도취으로 묘사되는데, 니체의 바그너 비판에 따르면 이러한 탐닉은 퇴폐적인 것이다. 데카당스란 몰락과 죽음, 퇴폐와 퇴락을 지향하는 태도로, 본디 인간에게는 파멸과 소멸에 대한 동경이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갈망하는데, 이 같은 죽음에의 동경이나 구원을 니체는 현세 부정의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파괴적 충동이라 비판한 바 있다. 탐미적, 염세적, 낭만적,
엘리트적이며 독일적인 이 몰락의 정서는 토마스 만의 마지막 완성작 「기만」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랑을 완성하고자 곧 찾아가겠다고 약속하지만 로잘리는 그날 저녁도, 다음 날도 켄을 찾지 못한다. 출혈로 의식을잃은 그녀는 병원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이후부터 사건은 매우 객관적으로, 의학적 용어를 가지고 서술된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하지만 로잘리는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자연에대한 사랑과 신뢰를 버리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힘이 오른 북천 버드나무들이 바짝 거꾸로 서서물웅덩이 속에 떠 있는 달에다 뿌리를 뻗치고 있는 것을모른 척하고 돌아섰다.

악견산을 넘어가다유방산에 닿았네04슬슬 몸속 뼈가 스멀거리기 시작했네피라미떼가 제 미색에 빠져개울 물살을 즐기듯이격정도 뭉게구름이 되어 불어나는 한낮섬섬옥수로 산정에서 스윽즉,
한평생 살다가햇살 넘치는 계곡 사이로소낙비 되어 쏟아졌네마른 옥수숫대 서걱이는비탈밭에 내리꽂혔네!

천상의 악기를두드리는 먼 시간의자궁 안격렬한 한낮의 소나기가골목을 밟고 지나갔다해협으로 배가 배를 밀고 들어간다철교들이 몸을 들어올린 다리 사이로달이 엉덩이를 두드리며 빠져나가는구름 기둥을 바라본다

섬과 섬 사이를
그 눈빛과
눈빛 사이에서
무지개가 뜨고
사라지듯

왜 열일곱에 시집왔어요?
아부지가 소녀 공출 안 보낼라구 보내부렀어함평 산암마을 할머니들고생한 거 착으로 쓰면 몇권으로도 모자!

이제 남은 인생 저 노을처럼 살아가자 우리,
피난민 한금순이육십년 만에 만난 두 동생을 안고삼팔선 같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구룡포 시외버스 터미널을 돌아 돌아 빠져나오자맨 뒷자리에서,
원장님 좀 바꿔주이소원장이가,
우리 신랑이 가을 타는지 힘이 없다바다에 나가먼자꾸 힘이 빠진다 칸다 아이가

드디어 온 몸속이 검게 타올라드디어 죄 없는 무기수들이오래된 감옥에서 줄지어 나오기 시작한다.
붉은머리학들도 해의 알을 품고 날아오른다

김수복의 시에는 운명 앞에 선 자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무에 대해 응답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인다. 역설적이게도 그 의지는 죽음을 이해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노래하는, 소멸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김수복의 운명은 일상에 대한 시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에선 피의 냄새가 난다고 했었던가
그 자유에는 피의 혁명도
새벽하늘도
없다
해가 다시 떠오르는 먼동에는
참회의 눈이 있다고
새벽하늘을 수정(修正)하며 새들이 날아오른다

모든 나무들이 서로 마주 서서흐르는 강물로 마음을 주고받듯이천년 동안 흘러온 강물이 서로 마주 보며웃는 얼굴로 저녁을 맞듯이모든 나무들의 일생에도바람의 얼굴이 있음을 본다살아간다는 것 또한저 마음의 나이테와 같이살아왔다는 것 또한서로에게 물결이 되어주었다는 것그 나무의 마음의 책에서로의 강물을 적어 넣어두었다는 것

저렇게 핏줄은 말라갔을 것이다흘릴 눈물도 없는 눈물을만리 밖 바람의 간절한 소리를제 귀에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그 긴 강물의 탯줄을속에서 밀어올렸을 것이다툭툭, 땅속 폐경이 된 자궁을 들어올려아득히 능선 위로 자지러지는태양을 몸 안으로 조이고 조여서씨를 받아내었을 것이다노을에 퍼져재가 될지라도천년 광원(光源)을지는 태양 속으로 고이 간직해 내보이면서한잎 두잎, 입을 벌리며 태어나듯이죽은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받아 맞이하는 검은 몸이
비로소 환해오는 새벽,
그 태양의 눈빛을 바라본다

막다른 골목에서배가 고프거나,
오래 길 끝에 박혀 나가지 못했을 때,
사랑도 식어서 해가 질 때,
그 꼬리를 잘라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산문(山門)의 산그늘 외진 꼬리도,
오지 않는 새벽을 기다리는 가로등의 꼬리도,
아, 그림자가 길어지는골목 안에서 꼬리를 자르고쫓아오던 반민주(反民主)의몸통도 잘라버리고 싶었다

귓불을 깨물어주고 싶던 때가 있었다하늘에 대고 욕을 퍼부었던지나가는 바람에게도 시비를 걸었던,
발아래 연꽃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을 때그 연잎의 귓불을 깨물어주었다활짝,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덕진공원늦은 여름의 저녁 무렵이었다한없이, 한없이 깨물어주어서새벽 연밥이 익는 줄도 몰랐다

곧 저녁이 다가올 것이다등불을 밝히고높고 비천한어둠과별에게,
목숨을 바쳐몸속에 집을 짓는하늘에서곧 종이 울릴 것이다새들이 죽어서 날아갈 것이다

죽은 숲들도 깨어나 저녁 식탁의 등불을 내건다
먼 데서 천둥소리가 다시 지나갔다

석양이 밀려오면황금빛으로 물들어갑니다마법에 걸린 몸이 되어하늘처럼 사랑했던 사람도껴안고 돌 수 없습니다소리의 무지개가 되어현(弦)을 켜며허공에 감겨 있습니다

검게 타들어가는 살아 있는
화석이 되어
저 깊고 두꺼운 겨울 눈발 속으로
몸을 던진다

산짐승이 밤새 먹다 버린 새벽달을 보았다
아직 식지 않은 눈빛을 보았다
선혈이 낭자한
부릅뜬 눈을 뜨고 있는 눈동자를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