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와 ‘마시기‘도 기본적인 욕구의 표현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그보다 문화적인 욕구를 의식하고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기본적인 욕구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기와 소스 등 배를 불려주고 원기를 되찾게 해주는 실질적인것에 현혹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먹을 것을 앞에 두면 마냥 행복해하며, 세상의 무분별한 소동은 물론이고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하소연도 무시한다. 그저 의자에 앉아 식물성 음식과 동물성 음식의 상호보완성을 따지며,
이 세상에서 근절할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어가고, 느릿한 소화과정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다른 하나는 모든 흥분 상태가 배제되는 휴식으로, 앞의 휴식보다 더 확실한 휴식이다. 이 휴식에는 어떤 일을 끝냈다는만족감마저 표현되지 않는다. 마음이 평온할 때나 갈등을 일으킬 때도 의식에 영향을 주는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이런 휴식 상태에 이르는 것은 무척 어렵다. 어떤 요소를 인식하면 그에 합당한 이미지가 우리 마음에 그려지게 마련이다. 예컨대수천 년 전부터 요지부동인 산들의 지층,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달리 그 위의 고원지대에 평평하게 펼쳐진 호수를 생각해보라.

결론적으로 약간 씁쓸하지만, 지식인들은 순박한 사람들에게 허용된 이런 형태의 휴식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 지식인은 정의로운 중년의 친구다. 또 증거를 끈질기게 파헤치며 개념을 규명하고,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론적인 대책들을 강구한다. 지식인이 수면의 상품화를 맹렬히 비판하고, 하물며 낮잠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새삼스레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식인은 인간이 냉정함을 되찾고, 세상의 흐름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 데 인간의 위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약함을 혐오하는 듯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하루에게 내 약속을 어기는 때가 있다.
밤에서, 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 때가 그렇다. 시작이 어그러지면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시작하는 게 부끄럽다. 하지만 내일이면 또 다른 새벽이 어김없이 내게 찾아올 것이다.

또한, 느림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도 말하면서 ‘느리게 살아가는 법을 소개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처럼 ‘어떻게 느리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고 일목요연하게 쓰여지지 않아 선뜻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대로 느리게 읽으면서, 다시 말해서 목표를 세우지 말고 시간에도 쫓기지 않으면서 여유 있게 읽다 보면, 얼마든지 자기 나름대로 느리게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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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편안한 것이다. 평화이며 행복이며 자유 그 자체인 것이다. 진리는 멀리 있거나 높이 있거나 숨어 있지 않는 것이다. 진리는 항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물처럼 공기처럼 자갈처럼 생활 주변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다만 집착의 병, 습관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간절심 부족이 진리와 한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는 호롱불을 켜놓고 상위에 깔려 있는 쌀에서 뉘를 골라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니가 어떤 자식인디, 날 새면 떠난다는디. 좋은 밥 해주고 싶어서 뒤를 고르고 있지야. 뜻은 모른다만, 니 앞길 좋으라고 ‘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 부르고 있지야."

선지식 스님 중에는 고암 스님과 서옹스님은 미소로 답하셨고, 성철 스님은 일관되게 ‘아니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는데, 향곡스님은 달랐다. 묻는 스님에게 되물음을 자주 하셨고 ‘상당하네‘
하시며 격려하는 여유를 보이셨다.

사랑은 흔들리게 되어 있다. 흔들림 속에서 철이 들고 시야가트이게 되기 때문이다. 권태와 불만으로 가볍게 핑계 대거나 변명할지 모를 일이나, 돋보기안경처럼 사람 따라 다른 시력 상태에 따라 안경의 선택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만큼 윤회를즐기는 변화도 없을 터이다. 사랑 이야기는 살아있는 한 이어지는드라마일 테니까.

수행자에게도 사랑하는 애인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한용운스님 시에서 조국이 ‘임‘이 될 수 있음을 구차스럽게 설명해야 할터. 그러나 한용운스님처럼 애국지사가 아닌 나에게는 상대가 무엇이 되든 그리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인생의 절반이 슬픔이요 기쁨이라면, 젊은 시절의 나에겐 절반이 간절심이요 절반이그리움이었다. 여기에서의 간절심이란 인고의 아픔을 딛고 마음챙기며 정신을 모아가는 깨달음이었고, 그리움 또한 타는 목마름의 원초적 본능에 대한 채찍질의 꺼지지 않는 불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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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면, 또 잠든 어린아이를 깨우지 않으려면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야 한다. 공손한 사람들은 공원을 떠날 때, 세상을 떠날 때도 발끝으로 걷듯이 조용히 떠난다. 눈까지 내리까는 이유는 조심스러운 성격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얼굴을 무례하게 빤히 쳐다보지 않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눈길에서는 언제나 약간의 무례함이읽히게 마련이다.

"굶주린 배에는 귀가 없다."
입술 끝으로 마지못해 먹는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이 말은 혀로 핥아먹는 걸 거부하고, 입을 크게 벌려 과일을 우적우적 씹어 먹고, 시원한 포도주를 꿀꺽꿀꺽 마셔 갈증을 풀겠다는 뜻이다.
얼버무려 말하라. 말이 완전하면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하다. 말을 사 등분, 아니 팔등분 해보라. 그러면 말이 소중한 의미의 조각들임이 드러날 것이다.

과거의 매력. 우리는 과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또 과거는 이제 전혀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몸이 과거를경계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세계 전쟁이 시작되기 전은, 이제는 아득히 멀리 느껴져서 기억하기조차 힘들다. 그저 상식에서 벗어난 맹목적인 시대였던 것으로만 읽힌다. 그러나 우리시대 사람들은 과거가 없는 삶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 과거를 되살려내 라이프사이클에 억지로 밀어 넣는다.

우리 자신을 알려고 애쓰면, 진흙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 찾아온다.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노력이 헛된 시도라는 걸 인정하자. 오히려 ‘나‘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모든 꼭두각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 꼭두각시들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며 즐기는 편이 낫다. 하나의 모자를 다르게 씌워보고, 또 하나의 저고리를 멋지게 꾸며보라. 이처럼 삶이라는연극을 재미있고 다채롭게 꾸며보라.

이런 공원에서는 아직도 혼자만의 삶이 가능하다. 물론.
리는 기혼자이고 배우자의 죽음을 바라지도 않는다. 돌봐야할 아이들도 있고, 막내아들의 수학 공부를 도와줘야 한다. 막내딸의 영국 여행 일정을 짜주기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우리 영혼의 죽음을 슬퍼하고, 사라진 세월을 애도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옛 모습을 지닌 공원에서는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 그런 공원에서 우리는 방황하는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며 슬픈 마음을 서로 교환한다.

5깊이 생각해야 할 때 나는 사상가인 척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생각에 잠긴다. 온갖 개념들이 은유의 효과에 의해서, 또 이상하게도 평범한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신속하게 사라진다. 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며 내 마음이 활짝 열린다. 나는 고산지대 방목지에서 여름밤을 생각하는 목동이 된 듯한 기분에젖는다. 하나의 의미를 지닌 것도 확산해 관대해질 수 있다는걸 기꺼이 인정하며, 불확실한 항해를 포기한다. 내 능력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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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전반적으로 자유롭고 한결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애쓰지 않을것이다. 또 성공의 증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성스러운태도와 자기 자신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의식하는 만큼타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기 위해서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너그러움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상황은 타협의 연속, 승패를 결정해야 하는 전쟁, 일단 부여된 후에거부되는 자유로 수놓인다.

나이가 든 후에도 많은 사람이 더 분주하게 살아간다. 그들은 구경해야 할 것도 많고, 맛보아야 요리도 많으며, 관광해야할 지역도 많고,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도 많다고 생각한다. 이런 공복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회 활동을 할 때 디저트와 오늘의 요리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었던 사람도 이렇게 변한다. 휴가는 옹색하기 그지없어, 그들이 다시 일터로 나가기전에 원기를 회복하는 기간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의 열정을 되찾고 싶어 한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그들은 더는 지체하지 않는다.

나태함(이것도 느림의 한 형태일까?)의 원인은 어떻게 변호할 수 있을까? 나태함은 일종의 전략, 즉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리라 생각하며, 불만을 사지 않기 위해 아예 행동하지 않겠다는 타산적인 계산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나태하면 결국 마비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느린 사람은 원하면 언제든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차분하게 보이라는 충고를 곧잘 받는다. 이런 사회적 명제는 우리가 느림에 부여하는 기본적인 존재 방식이 아니다. 이 충고는 긴장을 완화해야 할 상황에나 어울리며 사회성과 공생을 순조롭게 촉진하고, 즐거움을추구하는 경우에나 필요하다. 따라서 이 충고에 따르는 삶은하나의 방법이고 수단이지, 우리 자신이나 세상의 진실을 탐구하는 삶은 아니다.

‘느림과 독창성‘. 영감을 받은 사람은 최적의 기간 내에 최적의 해결책을 생각해낸다. 그는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며, 꾸준히 창조적인 행동을 해낸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영감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신속하게 대답한다면, 그것은 경험으로 습득한 지식 덕분이다. 새로운 방향을 창안해내고, 자신을 바꿔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빠름은 자신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모른다.
그러나 느림은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당혹스러워하고, 자신이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곧잘 지루한 훈계로 나타나는 선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사는 시대의 조건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는 끊임없이 변하고, 그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이런 변화들은 우리에게 대단한 적응능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속히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느리면 살아남지 못하거나 아무도 원하지 않는 소외된존재로 전락한다. 민첩하게 움직여야 승리한다. 느림은 전통적인 사회, 경직된 사회에서나 이해될 수 있는 태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속도보다 박자와 유연성 및 다른 선수들과의 조화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사람들이 찬양했던 ‘카이로스(적절한 순간)‘가 더 중요하다.
이는 직관적인 요소지만, 훈련을 통해 더 갈고닦을 수 있는 능력이다. 훈련은 경기의 의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구체화할수 있지만, 그 자체로 충분하지는 않다.

나는 다른 이유에서도 기민함을 찬양하기가 망설여진다. 말에의미와 형태를 부여하는 단어들이 언제나 예측된다면 기민함은 본래의 특성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그런 말보다 과거에존재한 표현을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진중하게, 때로는 답답할정도로 새로운 표현을 찾아내려고 심혈을 기울인 말을 더 좋아한다. 그런 말을 만나면, 나는 지금까지 시도한 느림에 대한찬양에서 다시 한번 위안을 얻는다.

따라서 연속성보다 불연속성을 중시하고, 신중한 태도보다돌발적인 행동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듯하다.
철학의 불확정성이란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나는이런 돌발적인 기습의 원칙에 정반대의 원칙, 하지만 그 역시제도화된 원칙을 견주어보려 한다. 바로 망설임의 원칙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회와 반박, 준비와 후퇴 등이 당사자의 마음속에서 맴돈다는 원칙이다. 우리가 이런 망설임을 거의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나는 그런 망설임의 흔적들을 떨쳐내고 싶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침묵의 늪에 몰아넣었다. 세상이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뛰어난 노래를 부르는 걸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덕분에 우리는 세상에 가득했던 신들, 강과 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신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또 현대 과학은 원자를 숫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세상을방정식과 십진법으로 환원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몇 걸음만더 내디디면 세상의 입을 완전히 부리망으로 씌울 수 있다.

이제부터 나는 더는 우물쭈물하지 않을 것이다. 매사에 조심하는 태도를 버릴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느림의 예찬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밀고 나갈 것이다. 느림은 내가 세상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삶의 방식이기때문이다.

문화의 과잉에 대한 불평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있을까? 이런 불평은 어떤 사람이 너무 지적이거나 너무 친절하다고 혹은 너무 예쁘다고 비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문화의 과잉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경계심을 품어야 한다. 문화의 영역이 아닌 영역들까지 침범하면서 문화 자체와 어떤 면에서문화를 벗어난 분야까지 탈진시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또 문화의 소멸을 한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마당에 문화의 과잉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개인은 온갖 형태의 몰수와 조작 및 반드시 떨쳐내야 할 막연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발언권과 욕망을 빼앗길 수 있다. 문화는 사치품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심심풀이를 위한오락거리도 아니다. 문화는 내가 나 자신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문화는 우리가 더큰 행복을 얻기 위해 소유하고 사용하는 재화의 집합체만이아니다. 문화는 우리를 창조의 과정에 끌어들여서 우리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우리에게 제안된 것을 받아들여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실업으로 삶의 형편이 어려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반드시 불합리한 행동을 강요당하지는 않는 듯하다. 오히려 은퇴자들즉 경제활동에서 은퇴한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열정을 뜨겁게 드러내 보인다. 따라서 그들이 뒤늦게라도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하다.

공간을 문화적으로 점령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몰지각하게 시간마저 점령하겠다고 공언했다. 고대 문명을 넘어 문명의 요람까지, 더 나아가서는 선사시대의 발전 단계까지 밝히겠다고 나섰다. 또 세상을 떠난 후로 영생의 안식을 얻었으리라 추정되던 죽은 사람들까지 되살려냈다. 고대문화의 대열병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었는데! 우리는 제단과 석기, 두개골과 유골, 동굴을발굴해내면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재활용하며, 거기에서 인류를 위해 최대한의 이익을 끌어내려 애썼다. 그것들이 우리를태어나게 해주지 않았던가. 따라서 내 생각에 우리는 경건한마음으로 조용히 그 유물들을 생각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것들은 우리에게서 그런 감사의 행위를 당연히 받을 만했다.

이런 불안감이 정당한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문화제국주의의 불안한 징조들을 지적해왔다고 생각한다. 현재 존재하는다양한 형태의 차별에 문화적인 차별까지 더해질 수 있다는징조들 말이다.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문화는 약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위험과 위기에 직면할때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에 다가가야 하는 순간을 뒤로 미루는 핑계와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 지구를 내보이며 자랑하고,
지구의 모든 부를 발굴해내려는 갸륵한 욕심에 지구를 약탈하지만 않는다면 불안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요즘에는 자주 사용되지 않지만 ‘지각하는 사람‘
이란 표현은 과거에 경멸적인 의미로 쓰였다. 지각하는 사람은 우연히 늦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학교생활과 소풍 약속 시간, 성당 예배 시간에 정확히 나타나지 못하는 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집단의 질서에 해를 끼쳤지만, 그 대가로 악의없는 질책을 받는 것으로 끝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가악의적으로 지각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그는 학교가 시작하는 날부터 다른 학생들보다 늦게 도착했고, 그 못된 습관을 결단코 버리지 못했다.

느림은 그 자체로는 어떤 가치도 없다. 우리가8
불필요하고 헛된 계획에 힘을 쏟지 않고 우리 사회 내에서 명예롭게 살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느림이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끝내느냐는 그다지중요하지 않다. 수직적인 접근 방법을 어떤 의미에서의 수평적인 시각으로 바꿔보자. 예컨대 우리에게 제안되는 것에 개입하는 정도에서, 움켜잡지 않고 살짝 건드리기만 하겠다고맹세해보자. 그럼,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현재의 모습, 앞으로 선택하기로 합의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본연의 속도로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릿하게 우리를 향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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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극한 상황까지 치닫고 싶었고, 피로감 덕분에 그런극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가 솔직하게 인정한 피로감이었고,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피로감이었다. 그러나 공평하기 위해서는 도시까지도 ‘피로하게 만들어야 했다. 우리가잔혹하기 때문도 아니었고, 도시의 약점을 잡아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곳 주민들이나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도시의 진정한 얼굴을 우리에게드러내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면 적어도 우리 자신의목소리를 듣지 않는 효과가 있다. 예컨대 주변에서 흔히 충고하는 ‘우리 몸의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이 잘못된 충고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몸이 대상과 주체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먼저 대상으로서 몸은 결코 완전히 우리 자신이 아니며, 우리가 몸을 보살피는 모양새를 띤다. 한편, 주체로서의 몸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우리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우리 각자가 대화에서 차례로 주도권을 쥐는 것처럼, 듣기도 대화에서 소극적인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상대의 말이 어렵지 않게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창조적인 내면성과 주의력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듣지 않으면, 결국 같은 말이지만 건성으로 들으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것과 다를바 없다. 하지만 타인의 말, 모든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걸 사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북하게 느껴질 때가 적지 않다. 그래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내 말에만 귀 기울여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리스도는 너를 위해서 그렇게 피를 흘리셨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좋아한다.

여하튼 존재론적인 경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안에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 공간은 순전히 내 노력으로만 마련될 수있다. 폴 리쾨르 * 같은 철학자들은 이런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서, 얼핏 생각하면 모순되는 표현, 즉 ‘적극적인 수용성 réceptivitéactiv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런 권태 못지않게 우리가 조심하고 피해야 하는 또 하나권태가 있다. 이 권태의 영향권에 든 사람은 어떤 것에도 감동하지 못한다. 그는 뭔가에 관심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무엇(과일, 사람, 건물 등)에 몸을 던져 달려드는 적극성이 없다. 따라서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공연,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을 소개해줘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가 과거에는 그런것들을 좋아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런 것들에 대한 의욕을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상황을 힘들어하지만 벗어날수 없다. 그의 의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시각장애인을 나무라고 말을 하지 못한다고 실어증 환자를 질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지진 등 어떤 것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가 사서 고통을견디는 이유는 그의 가치관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고통을 몸으로 직접 느끼며 저항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살아갈 도시, 밥벌이를 위한 직업, 평생을 함께할 미래의 반려자와 친구를 선택할 때 지혜의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선택한 도시가 조그만 충격에도 뒤흔들리고, 무책임한 말을 쏟아내며, 매일 아침 새로운 얼굴을 드러내고, 문화적 활동들을 끊임없이 계획한다면, 또 도시가 장벽을 높이 쌓아가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는 다시 저항의 깃발을 치켜든다면, 당신은 봇물 터지듯 닥쳐오는 사건을 피할 수 없게 되고결국에는 그런 상황에 길들여질 것이다. 따라서 아무 사건도일어나지 않고 달콤했던 시간, 다시 말해서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아 순수하게 시간만 흘러가던 시간을 까맣게 잊게 될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권태의 원인은 현재의 우리 위치에 대한 현기증에서 비롯된다. 또한, 여러 사람이 확신하며 즐겁게비슷한 상태에 있게 될 때, ‘불확실‘, ‘전부‘와 ‘전무‘라는 상황앞에서 겪는 그런 번민은 사라진다.

나는 내게 허용된 자유를 지키고 싶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나 자신과 관련된 것에서 변화를 도모한다. 어떤 제약도 없이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내가 어떤 근본적인 권태에 몰두했다는걸 깨달으면, 그런 나를 질책한다. 권태롭다는 것은, 우리가 상대에게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걸 어떤 식으로든 알리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고 지금도 많은 선물을 아낌없이 받는 내가 그런 세상을 권태롭게 대했다면 나는 배은망덕한놈이 된다. 또한, 진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불만을 터뜨리는 응석받이 꼬마처럼 행동하는 셈이 된다. 이런 자책이 있고 나서도 나는 다시 속임수에 놀아나며 이리저리 채인다. 결국 나는 다시 권태에 의지하게 된다. 권태만이 나를 노예처럼 부렸던 세상의 힘들로부터 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는 활기찬 생명력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순수한 충동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충동이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하고 그러지 않는 것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만을 기억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절제된 권태를 권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어떤 편견도 없이 권태를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미래는 두 가지 방법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두 방법은 각각다른 철학으로 뒷받침된다. 하나는 의지주의적 방법으로, 이방법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약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미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자주적으로 우리 자신을 미래의 시간에 투영해본다. 우리가이루어내려는 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거리가 미래라 일컬어진다. 미래의 계획을 포기한 사람은 짧은 시간의 폭에 갇혀버린다. 이런 경우에 기다림은 물건이 배달되는 시간, 혹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용해야 하는 교통수단과 지름길을합산한 시간이란 뜻이다.

벌그러나 기다리던 행복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다른 모든 즐거움에 대해서는 하나의 징조를 정해두었다.
봄이 정말로 돌아왔을 때, 다시 말해서 오월에야 문을 여는 술집이 있다. 단골손님은 물론이고 뜨내기손님도 저녁이면 시원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팔월의 숨 막히는 열기도 없다. 한여름에도 그곳 기온은 견딜 만하다. 튀긴 요리를 먹을 수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춤까지 출 수 있다. 강물은 청록빛을 띠어, 물고기가 무척 많을 거라는 생각까지 떠오르게 한다.
사람들은 쌍쌍이 강변을 거닌다(모두가 합법적인 관계일까?).
별들이 그 술집의 오색 등불 위에서 흔들리며 단골손님들의얼굴을 환히 비춘다.

성당에서 의자 사용료를 받는 여자들과 어둑한 성당에서 행해지는 그들의 하찮고 비천한 역할과 편협한 사고방식을 대놓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그들의 사고방식을 세밀히 조사해서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고약한냄새를 풍기고 때로는 콧수염까지 듬성듬성 보이던 그녀들은자신들에게 맡겨진 성직을 충실히 이행하며 그렇게 늙어갔을것이다. 그녀들의 몸에 양초 냄새와 짙은 백합 향이 배고, 대체로 그녀들이 거의 씻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성당에서 가장 덜 영광스럽더라도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부분이그녀들의 몸에 스며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믿음을 유지한 채 계속 사랑하기를 바라며, 두 손을 이리저리 분주하게 놀리지 않고 다소곳이 모은다.
기도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한길을 택하고, 옅은 빛이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해주기를 바라는것과 같다.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사물과 사람이 존재하는 걸 깨닫는다. 우리는 이런 깨달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와 다른 존재를 발견하면 오싹한 한기가 밀려오고 그런 충격에서 회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것, 즉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레디메이드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언어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언어를 찾아내거나 언어에서 몇몇 요소의 위치를 바꿔놓을 뿐이다."

예컨대 사월의 화창한 아침에 한 남자가 분홍빛 포도주를앞에 두고 카페 테라스에 혼자 앉아 있다. 그는 아직 포도주에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하늘은 청명하고, 거리에는 정겨움이 넘쳐흐르며, 누구도 귀찮게 굴지 않았다. 그 때문에만 그가 행복하게 보였던 것일까? 분홍빛 포도주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분홍빛 포도주가중대한 역할을 하며 그날 아침의 특별한 다른 요인들과 겹쳐졌기 때문일까? 테이블에 놓인 투명한 잔은 햇살을 받아들이며 경쾌한 세상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질서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든 그 역할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하지 않고 포도주잔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듯하다.

시의 역할이 존재의 일부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이고, 시가 때로는 인간과 장소와 계절의 미묘하고 은밀하며 감동적인일치에서 잉태된다면, 일상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풍습 자체가시적인 행위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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