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극한 상황까지 치닫고 싶었고, 피로감 덕분에 그런극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가 솔직하게 인정한 피로감이었고,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피로감이었다. 그러나 공평하기 위해서는 도시까지도 ‘피로하게 만들어야 했다. 우리가잔혹하기 때문도 아니었고, 도시의 약점을 잡아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곳 주민들이나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도시의 진정한 얼굴을 우리에게드러내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면 적어도 우리 자신의목소리를 듣지 않는 효과가 있다. 예컨대 주변에서 흔히 충고하는 ‘우리 몸의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이 잘못된 충고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몸이 대상과 주체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먼저 대상으로서 몸은 결코 완전히 우리 자신이 아니며, 우리가 몸을 보살피는 모양새를 띤다. 한편, 주체로서의 몸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우리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우리 각자가 대화에서 차례로 주도권을 쥐는 것처럼, 듣기도 대화에서 소극적인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상대의 말이 어렵지 않게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창조적인 내면성과 주의력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듣지 않으면, 결국 같은 말이지만 건성으로 들으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것과 다를바 없다. 하지만 타인의 말, 모든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걸 사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북하게 느껴질 때가 적지 않다. 그래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내 말에만 귀 기울여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리스도는 너를 위해서 그렇게 피를 흘리셨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좋아한다.

여하튼 존재론적인 경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안에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 공간은 순전히 내 노력으로만 마련될 수있다. 폴 리쾨르 * 같은 철학자들은 이런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서, 얼핏 생각하면 모순되는 표현, 즉 ‘적극적인 수용성 réceptivitéactiv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런 권태 못지않게 우리가 조심하고 피해야 하는 또 하나권태가 있다. 이 권태의 영향권에 든 사람은 어떤 것에도 감동하지 못한다. 그는 뭔가에 관심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무엇(과일, 사람, 건물 등)에 몸을 던져 달려드는 적극성이 없다. 따라서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공연,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을 소개해줘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가 과거에는 그런것들을 좋아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런 것들에 대한 의욕을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상황을 힘들어하지만 벗어날수 없다. 그의 의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시각장애인을 나무라고 말을 하지 못한다고 실어증 환자를 질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지진 등 어떤 것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가 사서 고통을견디는 이유는 그의 가치관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고통을 몸으로 직접 느끼며 저항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살아갈 도시, 밥벌이를 위한 직업, 평생을 함께할 미래의 반려자와 친구를 선택할 때 지혜의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선택한 도시가 조그만 충격에도 뒤흔들리고, 무책임한 말을 쏟아내며, 매일 아침 새로운 얼굴을 드러내고, 문화적 활동들을 끊임없이 계획한다면, 또 도시가 장벽을 높이 쌓아가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는 다시 저항의 깃발을 치켜든다면, 당신은 봇물 터지듯 닥쳐오는 사건을 피할 수 없게 되고결국에는 그런 상황에 길들여질 것이다. 따라서 아무 사건도일어나지 않고 달콤했던 시간, 다시 말해서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아 순수하게 시간만 흘러가던 시간을 까맣게 잊게 될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권태의 원인은 현재의 우리 위치에 대한 현기증에서 비롯된다. 또한, 여러 사람이 확신하며 즐겁게비슷한 상태에 있게 될 때, ‘불확실‘, ‘전부‘와 ‘전무‘라는 상황앞에서 겪는 그런 번민은 사라진다.

나는 내게 허용된 자유를 지키고 싶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나 자신과 관련된 것에서 변화를 도모한다. 어떤 제약도 없이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내가 어떤 근본적인 권태에 몰두했다는걸 깨달으면, 그런 나를 질책한다. 권태롭다는 것은, 우리가 상대에게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걸 어떤 식으로든 알리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고 지금도 많은 선물을 아낌없이 받는 내가 그런 세상을 권태롭게 대했다면 나는 배은망덕한놈이 된다. 또한, 진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불만을 터뜨리는 응석받이 꼬마처럼 행동하는 셈이 된다. 이런 자책이 있고 나서도 나는 다시 속임수에 놀아나며 이리저리 채인다. 결국 나는 다시 권태에 의지하게 된다. 권태만이 나를 노예처럼 부렸던 세상의 힘들로부터 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는 활기찬 생명력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순수한 충동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충동이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하고 그러지 않는 것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만을 기억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절제된 권태를 권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어떤 편견도 없이 권태를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미래는 두 가지 방법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두 방법은 각각다른 철학으로 뒷받침된다. 하나는 의지주의적 방법으로, 이방법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약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미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자주적으로 우리 자신을 미래의 시간에 투영해본다. 우리가이루어내려는 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거리가 미래라 일컬어진다. 미래의 계획을 포기한 사람은 짧은 시간의 폭에 갇혀버린다. 이런 경우에 기다림은 물건이 배달되는 시간, 혹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용해야 하는 교통수단과 지름길을합산한 시간이란 뜻이다.

벌그러나 기다리던 행복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다른 모든 즐거움에 대해서는 하나의 징조를 정해두었다.
봄이 정말로 돌아왔을 때, 다시 말해서 오월에야 문을 여는 술집이 있다. 단골손님은 물론이고 뜨내기손님도 저녁이면 시원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팔월의 숨 막히는 열기도 없다. 한여름에도 그곳 기온은 견딜 만하다. 튀긴 요리를 먹을 수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춤까지 출 수 있다. 강물은 청록빛을 띠어, 물고기가 무척 많을 거라는 생각까지 떠오르게 한다.
사람들은 쌍쌍이 강변을 거닌다(모두가 합법적인 관계일까?).
별들이 그 술집의 오색 등불 위에서 흔들리며 단골손님들의얼굴을 환히 비춘다.

성당에서 의자 사용료를 받는 여자들과 어둑한 성당에서 행해지는 그들의 하찮고 비천한 역할과 편협한 사고방식을 대놓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그들의 사고방식을 세밀히 조사해서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고약한냄새를 풍기고 때로는 콧수염까지 듬성듬성 보이던 그녀들은자신들에게 맡겨진 성직을 충실히 이행하며 그렇게 늙어갔을것이다. 그녀들의 몸에 양초 냄새와 짙은 백합 향이 배고, 대체로 그녀들이 거의 씻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성당에서 가장 덜 영광스럽더라도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부분이그녀들의 몸에 스며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믿음을 유지한 채 계속 사랑하기를 바라며, 두 손을 이리저리 분주하게 놀리지 않고 다소곳이 모은다.
기도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한길을 택하고, 옅은 빛이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해주기를 바라는것과 같다.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사물과 사람이 존재하는 걸 깨닫는다. 우리는 이런 깨달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와 다른 존재를 발견하면 오싹한 한기가 밀려오고 그런 충격에서 회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것, 즉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레디메이드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언어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언어를 찾아내거나 언어에서 몇몇 요소의 위치를 바꿔놓을 뿐이다."

예컨대 사월의 화창한 아침에 한 남자가 분홍빛 포도주를앞에 두고 카페 테라스에 혼자 앉아 있다. 그는 아직 포도주에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하늘은 청명하고, 거리에는 정겨움이 넘쳐흐르며, 누구도 귀찮게 굴지 않았다. 그 때문에만 그가 행복하게 보였던 것일까? 분홍빛 포도주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분홍빛 포도주가중대한 역할을 하며 그날 아침의 특별한 다른 요인들과 겹쳐졌기 때문일까? 테이블에 놓인 투명한 잔은 햇살을 받아들이며 경쾌한 세상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질서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든 그 역할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하지 않고 포도주잔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듯하다.

시의 역할이 존재의 일부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이고, 시가 때로는 인간과 장소와 계절의 미묘하고 은밀하며 감동적인일치에서 잉태된다면, 일상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풍습 자체가시적인 행위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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