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집단 경험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한 남자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이자 남편인 것과같고, 여자이면서 동시에 아내이자 어머니인 것과 같다. 이런 경험들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경험들 중 일부는 집단적이고, 일부는개인적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개인적으로는 아버지로서 삶을 경험하면서 한 팀에 소속된 야구 선수로서 경험할 수 있다. 거기서 당신은 집단 에너지 시스템에 참여하게 된다. 당신은 자신이 참여하고있는 각각의 집단적 의식의 발전과 진화에 도움을 주게 된다. 어떤사람이 프랑스인이라면 그는 프랑스인이라는 집단 의식의 발전에기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카톨릭 신자라면 그는 카톨릭 신자라는 집단의식에 기여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자신과 타인들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지닐 때비로소 따뜻하고 자비로운 세상이 된다."

이렇게 깨닫기까지 어쩌면 수많은 생들을 거쳐야 할지 모르지만당신은 이루어낼 것이다. 이루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하며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기가 언제냐가 문제다. 따라서 당신이 만들어 내는 모든 상황, 부딪히게 되는 모든 상황들은 사랑을 깨닫기 위한 것이다.

영혼은 실제 현실에서 서로의 발전에 도움을 주게 될 다른 영혼들과 상의한다. 그런 다음 거기에 맞춰 자신의 에너지를 대폭 줄이고 다시 물질과 융합시켜 적당한 규모와 주파수에 맞춰 조정한다.
그렇게 해서 한 명의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내보내지고, 세상을 학교삼아 학습을 시작한다. 그것으로 새로운 인간으로의 진화 과정이 시작된다.

원형(archetype)이란 집단적인 인간의 아이디어다. 결혼의 원형은육체적인 생존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할 때 그둘은 결혼이라는 에너지 원동력에 참여한다. 육체적으로 살아남기위해 둘의 삶을 합친 결혼의 원형은, 이제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영적 성장을 돕는 새로운 원형으로 바뀐다. 이것은 영적이면서 신성한 동반자 관계의 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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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외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세상에서는 사랑 없이 지식을 이용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지적인 힘이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적인 능력이 무기를 설계하고 개발하고 생산하는 데 사용될 때, 지적 능력은 본래의목적에 맞게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의 산업이나 공장이 지구나 인간의 생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되거나건축되고 운영되는 것은 지식의 본래 목적을 왜곡하는 일이다. 남의 돈으로 자기 이익을 얻으려는 것 또한 지식의 원래 의도를 벗어나는 일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우리를 악에 물들지 않게 하며 우리에게 힘을 준다. 물론진리에는 여러 단계가 있지만 어느 단계의 진리라도 해를 주지는않는다. 진리는 무엇도 훼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인 세계(nonphysical reality)란 무엇인가?
영적인 세계는 당신의 고향이다. 당신은 영적인 세계에서 왔고영적인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당신의 영혼은 현재 영적인 세계에살고 있고 영적인 세계에서 진화하고 있다. 지구상에 사는 수십 억의 인간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교감은 대부분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난다.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있다면 강한 의지를 가져야 실현된다.
자신의 현실과 마래는 각자가 의자를 가지고선택한 결과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자기의 의식을 바꾼다는 것은 몸 전체에 흘러내리는 빛의 형성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마음을 바꾸기로 마음먹고 의식적으로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자 노력했을 때에만 빛의형성 방식이 바뀌게 된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욕구도 이해하도록 의식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때, 빛은 여러 형태의 생각과 감정, 행동을 만들게 되고 결국 당신이 겪어야 할 경험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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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법칙은 초자연적인 에너지의 원동력이다. 인연의 결과들이 개인적인 것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인격의 관점에서 체험되었을 때 그 결과들은 의지를 가졌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는데, 이는그 사람의 ‘의지 에너지(energy of intention)‘라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반대인 반작용이 있다는 운동 제3법칙에 의해 설명된 초자연적인원동력을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증오를 보낸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증오를 고스란히체험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보낸 사람은 역시 다른 사람이 보낸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황금률(golden rule), 즉 성경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대접하라‘는 교훈도 인연의 법칙에 근거한 행동지침이다.

그 인격은 다른 인격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전생에 있었던 원인의 결과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전체적인 영혼의 진화 과정이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영혼의 관점이 아닌 인격적인 관점에서 반응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기적이고 적대적이며 부정적인 인격들이 많다. 그런경우에도 우리는 그 이유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모든 이유는 감추어진 채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현실에서 부정적인 것과 마주쳐도 그것을 절대 인식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심판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심판하는 것은 우리 영역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싸움을 보게 되었을 때 싸움을 벌이는 당사자들을 심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확실히 알 수 있는 한가지는 그들이치유가 필요한 불균형적인 영혼의 인격이라는 것뿐이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영혼이라면 사람을 해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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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새로운 진화의 방향임을 인정하지 못한 채 오감에 의한 진화를 논하는 것은 이제 낡은 방식이다. 진정한 힘을 부여받는 것이 진화의 목표이자 존재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진화를 배우기 위해 오감만으로 현실을 탐구하던 방식은 이제 버려야 한다. 한정된 오감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진화를 이해하던 방법은 미래의 우리 모습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

다양한 감각의 인간은 넓어진 이해력을 통해 인격(personality)과영혼(soul)이 어떤 의미의 차이점이 있는지 알고 있다. 인격은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태어난 것이며 생을 살다가 죽을 때까지 인간은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된다는 것과 인격을 가진다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인격은 육체처럼 진화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만일 한 인격이 다양한 감각을 갖추게 되면 직관력(육감과 미묘한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양한 감각의 인격은 자신뿐만 아니라다른 사람들까지도, 심지어는 오감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뭔가설명할 수 없던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어떤 행동이나 말보다는 그 안에 있는 의지를 먼저 알아보게 되고 거기에 더반응하게 된다.

인격과 육체는 영혼이 형상화된 모습이다. 영혼의 환생이 막바지에 이르고 인격과 육체가 수명을 다했을 때, 영혼은 비로소 인격과육체를 떠난다. 인격과 육체는 끝이 있지만 영혼은 끝이 없다. 인간의 육신을 떠난 뒤 영혼은 다시 영원불멸인 영겁의 상태로 돌아간다. 다시 자비와 완전한 순수함 그리고 끝없는사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진정한 진화가 일어난다. 영혼 에너지의 끊임없는 구현과 환생이 물리적인 환경,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승이라는 학습의 장으로 돌아오면서 진화가 진행된다.

영혼의 일부분은 위대한 사랑을 경험할 수도 있고, 두려움이나정신분열을 경험할 수도 있으며, 중용적일 수도 있고, 대단히 자비로울 수도 있다. 이것은 영혼이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어느 일부분이 완전하지 않다면 그 영혼이 형성하고 있는 인격은 조화롭지 못하게 된다. 조화로운 인격이란 치유를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영혼의 일부분과 완전한 영혼이 어려움 없이교감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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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카프카적인 것이란 차라리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인 가능성,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영원히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의 표현처럼 느껴진다.

이른바 민주주의적인 사회 역시 비인격화와 관료주의화의과정을 겪고 있다. 지구 전체가 이 과정의 무대가 되어 버렸다. 카프카의 소설은 이러한 세계에 대한 몽환적이고 상상적인 과장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것의 산문적이고 물질적인 과장이다

신비화와 전설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 프란츠 카프카의 정치적 관심 어디에도 의미 있는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막스 브로트, 프란츠 베르펠, 에곤 에르빈키슈 같은 그의 프라하 친구들이나, 역사의 의미를 알려고 한다면서 미래 모습을 그려 내기만을 즐겼던 다른 전위주의자들과 구별된다

내가 카프카의 유산에 이토록 열렬히 집착하는 것이나 그것을 내 개인적 유산으로 옹호하는 것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을모방하는 것(그리고 카프카적인 것을 한 번 더 찾아내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이 바로 소설(소설이라는 시)의 근본적인 자율성의 모범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바로이것에 의지하여 프란츠 카프카는 다른 어떠한 사회학적, 정치학적 성찰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었던 우리 세기에 입증된그대로의) 인간 조건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것을 나는 『농담』에서 이미 발견했다. "나는 먼지 이는 도로를 따라 걸으며,
내 삶을 짓누르는 공허, 그 공허의 무거운 가벼움을 느꼈다."
『삶은 다른 곳에』. "야로밀은 때로 끔찍한 꿈을 꿨다. 지극히 가벼운 물체, 찻잔이나 숟가락, 깃털 같은 것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도저히 안 되고 물체가 가벼울수록 자신이 약해지는 꿈, 물체의 가벼움 아래 짓눌려 버리는 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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