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기진은 택시에 선주를 태워주고 눈앞에서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곤 택시가 사라지자마자 엄마에게 에코백을 건네지 않은 걸 깨달았다. 정신이 온통딴 곳에 있어 의식을 못한 듯했다. ‘빵은 어쩔 수 없고 검사지만이라도 택배로 부쳐야겠네.‘ 기진이 한쪽 어깨에 보냉백을,
다른 쪽에 에코백을 멘 채 서둘러 택시에 올라탔다. 엄마와 헤어지고 나니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비로소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안타까움과 미안함, 짜증과 홀가분함, 연민과 죄책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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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두워진 현관 한쪽에서 종이상자를 가만 내려다봤다.
집 우울, 집 주宙. 옛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큰 집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떤 존재들은 왜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못할까. 실은 돌아왔는데, 몇 번 돌아왔었는데 문이 굳게 잠겨있어서, 우리가 깜빡하고 닫아놓은 문만 한참 바라보다 떠난건 아닐까? ...사실 남편과 타임머신 대화를 나눴을 때 나는 남편이 우리만 아는 그때, 우리 아이를 구할 수 있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어쩌면 나를 배려해 일부러 엉뚱한 소리를 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왠지 그게 순도 높은 진심 같아, 앞으로도 같은 답을 할 것 같아 가슴 아팠다. 그리고 나는 손에 든 책을 보고야 비로소 종일 나를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그 낯선 당혹 앞에서 나는손에 쥔 책을 다시 어느 자리에 두어야 할지 몰라 불 꺼진 현관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2021년 어느 가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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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닭 울음과 새소리, 풀벌레 소리에 잠에서 깼다. 서둘러 욕실에서 씻고 떠날 준비를 했다. 이부자리를 반듯이 정리한 뒤 깃털베개를 손으로 두드려 적당히 부풀리고 그 위에화려한 색상의 쿠션까지 완벽하게 올렸다. 짐은 전날 미리 싸둔 터였다. 쓰레기를 한곳에 모아 버리고 물걸레로 숙실 마루를 훔쳤다. 우리가 떠난 뒤 어차피 메이드가 한번 대청소를 할테지만 마지막까지 깔끔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이해 못할 허영이겠지만 당장 누가 들어와도 새집처럼 보였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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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 여행에서 돌아와, 평소엔 잘 가지 않는 방에 가보니그녀의 크리넥스 더미가 있다. 거기에는 침대도 있다. 나는 더 이상 침대 시트를 갈 수도 없고, 그녀의 흔적을 치울 수도 없다. 아니, 그게 그들 중 누구의 흔적이든 상관없다. 대체 왜 그렇게 자주 코를 풀었을까? 속옷은 왜 두고 간 걸까? 속옷이라기보다는 그저 벗겨져서 침대에 널브러지기 위해 존재한 하늘색 천 조각이다.
나중에야 발견한 그 조각은 세탁기 옆에 불가사리처럼 붙어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마른 몸매를 살찌우려 노력하는 나.
우리가 사귀는 동안 나는 매년 0.5킬로그램씩 살이 빠졌다. 내 살은 드레스를 벗듯 우아한 움직임으로 빠져나갔다. 우리 침실에서P.R. 이 드레스를 벗고 있다. 코를 풀고 있다. 코를 풀고 있다. 어떤빌어먹을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으나 코를 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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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 다음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딱딱한 벤치 다음엔 열병과 오물통이라니. 조니 미첼이 불렀던 헤로인 중독에 관한 노래 같았다. 여느 노래가 그렇듯 중독을 미화하지는 않았지만, 차갑고 푸른 금속*은 완전히 끔찍하게 들리진 않는다. 모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릴리즈 부인**을 찾는 건 당연하다. 차갑고 푸른 금속을 통해서든, 다른 노래의 더 자극적인 가사처럼아찔한 연애 중독을 통해서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독이자 강력한약은 바로 사랑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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