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좋고 나쁜 행위들은 변형의 직접적인 원인들이 아니다. 농부가 수로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면 물이 흘러들어오듯이, 그것들은 자연적인 진화의 장애물들을없애는 역할만을 한다.
여기에서 빠딴잘리는 농업의 예를 통해 힌두의 종의 진화 이론을설명한다. 저수지로부터 자신의 밭에 물을 대는 농부는 물을 끌어올필요가 없다. 물은 이미 거기에 있다.
농부가 해야 할 일이란 수문을 열거나 댐을 터뜨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면 물은 자연적인 중력의 힘에 의해 밭으로 흘러 들어간다.
빠딴잘리에 따르면 "물"은 우리들 각자 안에 있다. "저수지"로부터방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진화의 힘이다. "수문을 여는" 우리의 행위로, 물은 밭으로 흘러 들어간다. 작물이 결실을 맺는다. 그로 인해변형된다. 다른 말로 하면, 다음 재탄생의 형태가 결정된다.
"모든 발전과 힘은 이미 모든 사람 안에 있다." 비베까난다는 말한다.
"완벽은 모든 사람의 본성 안에 있다. 단지 그것은 가두어져 있고적절하게 순리대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방해되고 있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 그 빗장을 치운다면, 자연은 몰려든다."
저수지의 이미지를 계속 따르면, 악행을 행하는 것과 그에 따른 나쁜 까르마의 축적은 댐의 엉뚱한 곳을 무너뜨려서, 그로 인해 밭을 망치고 흉하게 만들게 될 끔찍한 범람을 일으키는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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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지는 모든 장애물들을 만든다. 그것들은 잠재적으로 있든지, 흔적으로 있든지(약하든지, 간헐적으로 나타나든지, 완전히 나타나든지 한다.

금욕, 공부, 자신의 일의 결실들을 신에게 바치는 것은 앞의 수뜨라에서 보았듯이, 완벽한 요가의 상태를 가능하게 해 주는 집중의 힘에 대한 세 가지 예비 단계이다.
이것이 그것들의 긍정적 가치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똑같이 중요한 부정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집중과 깨달음에 대한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수단이다.
"장애물"이라는 단어는, 이 주제에 대한 힌두와 기독교의 사상을 구분하는 강조에서의 차이를 암시하기 때문에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기독교인이 "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 그는 신에 대한 명백한 불복종과 배은망덕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신"이라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 즉 시간과 공간 안에서 부모의 측면으로 나타나는 실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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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위대한 개혁 운동이나 사회 구제 사업에 너무 깊이 관여하게 되어 일상적 일의 실질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어떤 것도 생각할수 없게 된 존경스럽고 성실한 사람들의 예를 알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고요하지 않다. 그들은 불안과 동요로 가득 차 있다.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마음은 고요하다. 이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욕구에 대해 이기적으로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들의 안에 있고, 심지어 고통, 질병, 갈등과 바람의 겉모습 안에도 있는 아뜨만의 평화를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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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카르마Karma 자체는 이 다섯 가지 장애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번 생 아니면 미래의 어느 생에서 결실을 맺어야 한다.
물질적 차원의 인간이 이 장애들에 종속되거나 지배되는 한 그는 필연적인 결과를 낳는 행위들을 일으킬 것이고 그만큼 윤회의 수레바퀴에 묶여있을 것이며 형상을 취할 운명이 될 것이다. 학도는 이 다섯 가지 장애들이 인성자아, 즉 하위 인간의 모든 행위들의 원인이라는 것을 신중하게 주목해야 한다. 그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 장애들 중 이러저러한 것에 근거하고,
삼계 안에 존재하는 평범한 인간의 어떤 행위도 무지의 결과 아닌 것이 없고 그에 수반되는 왜곡된 동일시와 반응 아닌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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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이런 지각 상태 역시 제어될때(혹은 넘어설 때), 순수한 사마디가 성취된다.
위대한 스승 파탄잘리는, 의식이 확장되는 여러 단계들을 지나서 "종자있는" 명상에서부터 감각들과 마음을 넘어서는 명상에 이르기까지 우리를인도하고 나서, 우리로서는 표현할 적당한 용어가 없는 어떤 경지로 이끈다. 동양의 요기는, 사마디 Samadhi란 말을 그런 의식 상태에 적용시키는데,
그 의식의 경지 안에서 영적 인간이 활동하고 있는 세계와 우리 태양계 무형의 레벨들 혹은 차원들을 접하고 보고 알게 된다. 보는 자 the seer는 자신에게 갖추어진 도구를 사용해 삼계에 관한 지식 영역과 마야와 환영의 영역을 마음대로 접촉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이 모든 다른 에너지들, 즉신적 생명의 의식적 현현들과 하나임을 보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환영의 마지막 장막이 걷히고, 분리라는 거대한 이단을 그 진정한 본성에서 보게 된다. 보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위하여 나를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서이다." (요한복음 17장20-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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