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엄은 공사 현장에 가기 싫었다. 아침이면 차를 마시고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던 곳이었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문 목수나 소목장이나 배관공에게 미래는 없다는 걸 알았다. 요즘 같은 시장 분위기에서는 어림없었다.
다들 그곳을 피하고 싶어했지만 매시가 가서 뭐든 모조리 들고 가라고 했다.

그는 매시가 조금 안심하는 것을 보고, 난생처음으로 그게 사실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부모가 자기들을 얼마나 힘들게 먹여 살리고 있는지 두 딸과 아들이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리엄은 리엄인지라 그런 생각을 했다는 데 곧바로 죄책감을 느꼈다.

리엄은 딸 헬렌과 얼추 비슷한 시각에 집에 도착했다.
헬렌은 아빠의 문제를 까맣게 잊었는지 문턱을 넘기도 전부터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속 좁은 인간, 그렇게 못된 인간의 손에 학교를 맡기다니!" 그녀는 말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교장이 됐을까? 그러면서 애들이 왜 교육이 제대로 안 된 채로 학교를 졸업하는지의아해하지!" 그녀는 들어와 식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저녁 없어."앤서니가 말했다.
"아, 앤서니, 제발 먹을 거 말고 다른 생각도 좀 해봐. 저녁 메뉴가 뭐가 됐든 상관없어, 뭘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오늘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아? 엄마, 제 얘기 듣고 계세요?"

찍한다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럴 리가 있나.
나도 청소하느라 끔찍한 하루를 보냈고, 너희 아빠도 매시 매켄을 만나고 회사에서 잘리느라 끔찍한 하루를 보냈으니까 솔직히 우리 둘 다 그게 어떤 건지 모를 수가 없지."

"무슨 소리야!" 헬렌은 쏘아붙였다가 멈칫했다. 아빠에게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필요한 지금 같은 때 엄마가 이런식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뭘까? 엄마는 가끔 아주 이기적일 때가 있었다. 지금도 공감하는 말 한마디는커녕 헬렌의 고민에 귀를기울이지조차 않았다.

로넌은 이 집 식탁에서 온 가족이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로지와 수도 없이 싸우던 것을 떠올렸다. 그와 로지가 한두 번 조금 소란스럽게 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장모님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로넌은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앤서니도 마침내 자신 역시 쫓겨나야 하는 신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들고 다니는 가죽가방에 아이팟과 공책과 이어폰을 챙겼다.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미심쩍은 눈빛으로 뒤돌아보니 어머니가 식탁 위로 종이와 장부를 펼치고 있었다.

디와 리엄은 종이에 적힌 숫자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소용없겠어." 마침내 리엄이 말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일거리를 따낸다 한들 별 도움이 안 되겠네."
"뭘 포기해야 할까?"디가 물었다.
"내가 술을 끊을게." 리엄이 말했다.
"그건 얼마 되지도 않지."디가 말했다. "당신이 마시면 얼마나 마신다고. 그리고 술집에 가서 일거리가 있는지 사람들한테 물어보기도 해야 하고."
"그럼 줄일 만한 게 또 없잖아." 그는 걱정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시 가고 싶다." 리엄이 말했다.
"그럼 가자." 디가 말했다.
그들은 종이를 더 꺼내서 다시 숫자를 계산했다. 방세로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이 일대의 방 한 칸 월세가 얼마인지는 그들도 알고 있었다. 시칠리아 여행 경비를 위한 사기 단지를 채우는데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근사한 여행이 될 거야."디는 선언했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자신 있지 않았다. 앞으로 수많은 싸움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디는 딸을 쳐다보았다. 예쁘게 꽃단장을 했고 반짝이는 금발은 전문가에게 손질을 받았다. 그 일을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조건 중 하나였다. 로지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걱정도 관심도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디는 그녀의 딸이 어쩌다 이렇게 철없는 아이로 자랐는지 궁금했다.

로지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디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니, 나는 훌훌 털어버리지 않을 거야. 나는 오늘 사무실 바닥을 닦고, 지저분한 테이블 냅킨을 빨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긴 복도를 따라 청소기를 돌리면서 힘든 하루를 보냈거든.
여기서 몇 시간 더 진열대 채우는 일을 하게 돼서 기뻐. 지금까지는 내가 몇 년 전에 그 일을 시작해서 여태 하고 있고 앞으로도 몇 년 더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궁금하네. 내일 새벽 네시에 일어나야 하니까 이제 그만 자러 들어가서 거기에 대해 좀더 고민해봐야겠다."

로지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나도 네 엄마랑 생각이 같다." 아버지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방을 남한테 빌려주고 싶었으면 진작 말씀하지 그러셨어요."로지는 말했다. "저희가 하나같이 능력 있거나 뭐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잘 자라."
로지는 그렇게 거리감이 느껴지고, 그렇게 냉랭한 아빠의 표정은 처음 보았다.
오늘은 특이한 날이었다. 조만간 대책 회의가 열릴 게 분명했다.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지탄의 대상이 될 이유는 없었다. 자식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헬렌이었다. 앤서니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로지는 결혼하고 집을 떠났다가 금세 돌아와 쇼핑몰에서 제물을 찾아다녔다. 적어도 헬렌은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고 교사 연수를 받았다. 부모님은 아무 보상도 없이 방을 비워달라고 할 게 아니라 그녀를 기록하게여겨야 마땅했다. 작년 졸업식 때만 해도 부모님은 그녀가 정말자랑스럽다고 했었다. 지금은 왜 그 마음이 없어졌을까? 왜 그녀의 방을 써야 하니 나가달라고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얼굴 좀 그만 찡그려, 헬렌 그러다 얼굴에 흉측한 주름살이라도 생기면 네 언니가 그거 없애자며 끌고 다닐 거야." 모드가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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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루스의 충동적인 면이 덜 극적이고 덜 걱정스럽게 발현될 때도가끔 있었지만, 엉뚱한 곳으로 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장을 찾아가, 내가 토요일 아침엔 쉬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내가 피곤해하는 것 같으니. 나한테 맞게 시간표를조정해줄 수 있겠느냐고, 그건 아름다운 일이었지만, 나는 그뒤로몇 학기 동안 열심히 해명해야 했다. 루스는 우리 모두가 아는 누군가의 전 남자친구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그녀가 헤어진 이후 수녀가 되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일어난혼란과 당혹스러움은 결코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루스는 패자가 되었다. 그녀는 부모님에게 드리려고 패키지여행 상품권을 두 장 샀는데, 부모님이 이틀 전에 못 간다고 통보를 해온 바람에 일주일 동안 울었다. 여행사에 지불한 계약금을 날렸고, 그때문에 부모님도 몹시 속상해했다.

그녀의 결혼 상대는 아주 뜻밖의 남자였다. 그래, 맞다. 모두 그러지 않는가. 하지만 루스의 결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고, 별거중이었으며(혹은 이혼했거나, 아니면 신비하게 보일 만큼 충분히 모호한 상태이거나), 아주 부유했고, 자신의 분야에서 상당히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들은런던에서 결혼했고, 이후에 성대한 칵테일파티를 열었다. 거기에내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루스가 가장 낯설었다. 루스는 사람들에게 아양을 떨고, 잘 보이려 하고, 정말로 믿기지 않는 말을 했다. "네, 제가 행정과에서 일했었는데, 아주 재미있고 아주 도전적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그 일은 더이상 안 해요." 그녀는 내게 40파운드를 넣은 봉투를조용하고 은밀하게 건네면서 너무 미안하다고, 이 년이 지났으니그에 대한 이자가 있어야겠지만 메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20파운드를 주라고, 우리가 굶지 않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루스는 그가 지낼 방을 준비했고, 방을 장식하기 위해 말과 시골 풍경이 담긴 사진을 구입했으며, 그에게 빨간색과 파란색 카펫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어보는 엽서를 끈질기게 보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엽서라 아들은꽤 난처했는데, 그의 고용인이 그에게 떠날 건지 떠나지 않을 수지-마음을 정했는지?―자꾸 물어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와인 한 병을 우편으로 보냈고, 그 병은 깨져서 도착했다. 또 정원이 없는 사촌에게 장미나무를 선물했다. 내게는 내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 어느 여자에게 주라고 돈을 보냈다.
그 여자가 받지 않으려 해서 내가 적당한 기관을 통해 익명으로 전달하겠다고 하니, 루스는 그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면서 아쉬워했다.

월을 지겹게 만들기는 아주 쉬웠다. 그는 금세 지겨워했고, 그의흥미를 끌지 않는 주제에 대해서는 이른바 도화선이 아주 짧았다.
향수가 그중 하나였고,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나는 이 사실을 하루에 몇 번이고 상기했다. 그에게 가을 낙엽이 체스트넛 스트리트에 떨어져 금빛 카펫을 이루면 걸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한숨을 쉬는 것 같다고 말해봤자 소용없었다. 윌은 어깨를 으쓱했다. 노란 잎, 누가 그런 게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를 아주 많이 사랑해서, 그가 낙엽을 어떻게생각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나는 가슴에 납덩이가 들어앉은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은 크게 한 걸음 올라가는 것이며 윌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동시에 그녀는 그에게 사랑은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궁금했다. 그는 그녀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와 함께 갈 거라고생각했다. 간단했다. 서로 사랑하니까. 그리고 지나는 런던에 오기위해 이미 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러니 그 일로 마음이 무거워질 이유가 뭐가 있는가? 윌은 캘리포니아로 가면 지나가 돌아와 부모를 돌보기가 어려우니 그와 함께 갈 수 없다는 걸 이해하지못하는가?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은혜를 갚아야 했다. 그녀의 부모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고, 세 자식에게 줄곧 잘해왔다. 지금 버려져서는 안 되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했다.

지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 하이 스트리트에서 내리면서 무거운한숨을 쉬었다. 집에 가기 전에 쇼핑을 조금 할 작정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건포도 번을 구워줄 것이다. 어머니는 길쭉하게 생긴쇼트브레드를 좋아했다. 부모님이 이런 것을 직접 사거나, 클라우드 부인에게 사다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검약하게 살아온 그들이라. 이런 소소한 간식을 사는 습관이 없었다.
슈퍼마켓에서 그녀는 매슈 케인을 만났다. 그는 늘 그녀를 보면 미소를 지었다.

월은 미국인 관계자가 이곳에 와 있어서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지나는 집으로 돌아가면 파이를 만들어야 했다. 미국인은 집에서 만든 파이를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날 밤을 위해 치장도 좀 해야 했다.

지나는 일흔세 살인 어머니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오르는것을 보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기보단 더 많이 웃었는데, 아버지의 이름이 조지였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에는 할일이 많을 것이다. 형제들에게 전화하고, 병원에 연락하고, 노인 주간보호센터를 알아봐야 한다. 건축설계사를집으로 불러서 체스트넛 스트리트의 집을 개조하는 문제도 상의할것이다.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 빈자리가 있는지도 알아볼 것이다.
강아지도 보러 갈 것이다. 크림드 라이스만 먹어야 하는 불쌍한 강아지들. 그녀는 부엌 식탁에 앉아 결정을 내릴 것이다. 중대한 결정을.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어떤 결정이든 캘리포니아로 가는 것과는 무관했다.

아이비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편지를 쓰길 바랐다.
봉투가 우체통 안으로 떨어질 때면 아주 기분좋은 소리가 나곤 했다. 요즘은 청구서와 공짜로 뭘 준다는 내용의 우편물, 그리고 알고 보면 아무것도 당첨되지 않았는데 크루즈 탑승권에 당첨됐다고말해주는 우편물밖에 오지 않았다.
한동안 아이비는 조카들에게 직접 편지를써서 보냈다. 꽃집에서 일할 때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도 편지를 보냈고. 하지만 반응은 늘 똑같았다. 그들은 크리스마스카드 뒷면에 죄책감이 담긴 문장을 휘갈겨 써서 보냈다. 정말 미안하다고, 당연히 답장해야 하지만 사는 게 몹시 바쁘다고, 아이비가 문자메시지나 이메일을 사용할 수 없는 게 유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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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는 리지 스칼렛의 집 앞을 지났다. 리지는 집에 없었다. 그녀는 낮 동안 엔니오의 식당에서 일하는데, 그녀의 손녀딸이 그집 아들 마르코와 약혼한 사이였다. 디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리지는 남편 머티와 사별하고 몇 년 동안 혼자서 조용히 지냈다.
그 집에서는 어딘가에 다리를 올려놓고 차를 마실 시간이 넘쳐나겠지, 디는 생각하며 부러워했다. 리지의 아이들은 전부 안정적으로 독립했고 그녀의 보살핌을 기대하지 않았다.

로지는 쉬는 시간에 느지막이 점심을 먹으려고 집에 들른 듯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고객들에게 무료로 메이크업을 해주는일을 했다. 화장품을 살 것 같은 여자를 골라서 파운데이션과 블러셔와 아이섀도를 발라주었다. 그러고는 고객들이 구매한 대금의 일부를 수수료로 받았다. 제대로 된 일자리는 아니었다. 수많은 여자들에게 황갈색의 이 제품 아니면 반짝이는 저 제품을 사야만 한다고 설득해야 수입을 어느 정도 챙길 수 있었다.

디는 뼛속까지 피곤했다. 그녀는 식탁 앞에 앉았다. 리엄이 차를 새로 끓여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이 어딘지모르게 불안했다. 아주 천천히 걸었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찻주전자를 헹구는 모든 동작에서 신중을 기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그녀는 사온 식료품을 정리하지 않았다. 요구르트를 냉장고에당장 넣지 않은들, 빵을 큼지막한 밀폐용기에 담지 않은들 무슨상관일까? 비스킷을 플라스틱 통에 넣은들 십 분 뒤에 누가 내려와서 꺼내 먹으면 그길로 도루묵이었다.

디는 안 그래도 피곤하던 차에 이제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은 채 다리를 뻗었다.
리엄이 그녀 옆으로 의자를 옮겨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가엾은 내 마누라." 그가 말했다. "당신한테 이것보다는 멋진 삶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진심으로"

디는 놀라워하며 아들을 쳐다보았다. 앤서니는 어렸을 때부터 키우기 쉬운 아이였다.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꿈을 꾸는 스타일이었다. 같은 말을 대여섯 번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이긴했지만, 언제든 즐겁게 일을 도왔다. 항상 조만간 자신의 음악적재능이 인정받을 수 있길, 그래서 유명해지고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길 바랐다. 그러면 부모님에게 바닷가의 쾌적한대저택을 장만해드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앤서니조차아버지의 해고 소식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았다.

다는 쏘아붙였다. "이런 자기들밖에 모르는 짐덩이들! 거기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나를 하인처럼 부리려고만 드는 너희들모습을 좀 봐라. 너희들도 이제 정신 차릴 때가 됐어. 앞으로 집안 분위기가 좀 달라질 거야. 그래, 충격적일 수 있다는 건 나도알아. 하지만 이 집에서 계속 지낼 작정이면, 이 집에서 나가지않을 작정이면, 다른 데서 지내는 수준만큼의 생활비를 보태주어야겠다."

먼저 알아서 챙겨 먹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내가 상을 다차려주겠거니 생각하지 마. 지금보다 일을 늘리면 식사 준비까지 도맡을 여력이 없어. 빨래와 다림질도 너희들이 알아서 해.
너희 셋 모두 세탁기 돌리는 법 알잖아. 앤서니, 이제 너도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로지, 헬렌, 너희 둘은 방값으로 얼마를 낼 수 있을지 생각해봐."

로지는 늦은 오후와 이른 저녁 쇼핑몰에 방문하는 고객에게무료로 메이크업을 해주고 화장품 대량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복귀했다. 앤서니는 여전히 전자기기에 헬렌은 사진과 일정표무더기에 빠져 있었다. 리엄은 석간신문에 실린 구인란을 뒤지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게 달라지게 될지 그들 가운데 누구도 알지 못했다.

디는 어쩔 줄 몰라하는 조시를 남겨둔 채 버스 정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시는 샌드위치와 우유 거품을 잔뜩 얹은 커피를 상상하며 오전을 버텼지만 지금은 디가 준 초록색 봉투를 들고 곧장 집으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디가오늘 하루종일 워낙 수상했던 터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앤서니는 자리를 뜨는 다를 눈으로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엄마는 그에게 차를 끓여주고 애플 타르트를 한 조각 건네며 말을붙였을 것이다. 엄마는 앤서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항상 궁금해했다. 그는 주로 음악 생각을 했고 가끔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엄마는 예전과 전혀 달랐다. 그를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대했다. 집과 가족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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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는 패션 잡지의 반응에 실망했다. 어떤 곳에서는 답변이 아예 없었고, 어떤 곳에서는 이번 박람회는 도매상만을 위한 것이라 독자들이 전혀 관심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전화를 걸어와 프랜시스의 편지를 전달받았다면서, 그 내용에 대한 독점 보도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앞서나가는 마켓타운의 부티크가 어떻게 성공을 거두었는지 런던의 경쟁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한 개인이 이룬 승리의 이야기로 그려질 것이다.

맥은 일요일 아침에 새 재킷을 입으면서 아주 괜찮아 보인다고,
그를 보러 온 사람들을 위해 대학에서 마련한 브런치에서 자신의눈길에 반응하지 않을 여자는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특히 새까만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르고 짧은 치마에 긴 부츠를 신은 밝고 자그마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시선을 끄는데다, 그냥 얼굴이예쁜 것 이상이었다.

웬디와 리타는 성공을 기념해 다소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했다. 그들은 마치 영화 대본인 것처럼 그 모든 일을 되짚어보았다. 신나게 웃었고, 끝없이 건배를 했다. 종업원은 친절하고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었다.
"두 숙녀분이 아주 행복해 보이십니다. 정말 보기 좋은데요." 그가 말했다.
"우리 둘이 회사를 같이 경영해요." 웬디가 설명했다.
"WR이라는 회사인데, ‘불의를 바로잡다‘라는 뜻이에요." 리타가 덧붙였다.
"그런 문제로 많은 연락을 받을 것 같네요." 나이가 지긋한 종업원이 말하더니, 그들이 대부분의 다른 손님과는 다르게 아주 즐거워 보인다며 포트와인을 작은 잔에 따라 공짜로 주었다.

체스트넛 스트리트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차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건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반경 안에 모두 서른 채의 작은 집이 있었지만, 차는 열여덟 대뿐이었다. 물론 2번지에 사는 케빈 월시 같은 사람은 큰 택시를 몰아서 넓은 공간을 차지했다. 하지만 11번지에 사는 버킷 매과이어는 오래전부터 자전거를 타고다녔기 때문에 그런 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치와 필립은 22번지에 살았다. 그들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둘 다 뉴욕에서 일했다. 숀과 브라이언은 매년 7월에 각자 가족을 데리고 늙은 부모를 보러 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미치와필립은 스무 살 때 결혼했기 때문에 그렇게 늙지는 않았다. 이제겨우 사십대였고, 장성한 두 아들의 부모이자 미국 국적인 네 꼬마의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하지만 숀과 브라이언은 당연히 그들이아주 늙었다고 느꼈다.

아들들은 정말로 화가 났지만, 그들이 목격한 젊은 여자 이야기는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졌을 때, 아버지에게무슨 말이라도 꺼낼 수 있었을까? 숀은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브라이언은 그러면 상황이 더 나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뭔가 말해본다면? 둘 다 어떤 식으로 그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밤에 아버지는 나가고 없었다. 아홉시까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공장에 잔업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해본 가장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 나중에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어른이 된 후 많은시간을 쏟아가며 친구들을 구하려 했던 그 상황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갔던 것이다. 그녀는 가슴을 찢고 또 찢을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곧 친구들의 동정과 인내심이 사라질 테고, 결국엔 친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엘라는 자제력이 있고 세상을 침착하고 현실적인 시선으로 볼 줄 아는 사람으로 여겨졌는데, 그런 엘라가 매력이넘치는 공작에게 반한 것이다. 가장 어리석은 여자조차 해리하고그런 사이가 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공작을 옆에 둘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엘라 자신이 아니었던가. 친구들이 사귀는 남자들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면서, 그녀는 누구라도 참새는 유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는 정말이지 늙은까마귀 같았다. 엘라만이 공작을 번번이 고개를 젓던 눈부신 해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녀는 그가 다른 여자를 보고 미소를 지어도개의치 않았다. 여자들은 그가 자기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실제로 미소를 짓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미소가 사람들을 기분좋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자주 웃었다. 이따금 그는 자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엘라는 앉아서그를, 그의 얼굴 근육이 당겨지면서 상대를 기분좋게 해주는 따뜻한 미소가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혹은 그런 게 하나 있었다고 말했던 것도 같았다.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은 아니더라도캐시가 가서 그 책이 다른 모든 책과 함께 자기만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거라고 그에게 말해주는 것이었다.

"에뮤는 어떤 새인지 말해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에뮤가크고 날지 않으며 늘 자동세차장을 통과시켜야 할 것처럼 보이는,
혹은 자동세차장처럼 보이는 새라고 설명했다. 순수하고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이는 새라고 우리가 차 안에 앉은 채 창밖으로 손수건을 흔들면 그 큰 새의 무리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어슬렁어슬렁 덤불숲에서 나올 거라고.
엘라는 그 얘기가 정말로 사랑스럽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그레그와 해리가 그녀를 감탄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엘라는 해리가 그녀 바로 옆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 뒤에 낡은 거울이 있었다. 그의 모습이 멋지게 비쳤을 것이다.
"이번 세일즈 컨퍼런스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그레그가 말했다.
엘라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음주예요." 그녀가 말했다. "제가 가서 힘이 되어드릴게요."

그녀는 렌즈콩 수프만 있으면 충분하고 빵은 직접 만들 수 있다고 멀리가 음식을 챙겨주고 갈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별이나 탄생 별자리 같은 것에 관한 책이 있으면 아주 좋겠다고 말했다.
멜리는 이제 글래스턴베리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집은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관리될 것이다. 축제에는 점술가가 있을 것이다. 애그니스는 자신을 마담 매직이라 칭하면서 오후 세시에 등장할 것이다.

열리는 어깨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글래스턴베리에서 누군가 빵을 만들고 있고 오브라이언 씨의 채소로 만든 맛좋은 카레가 있는 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 작년에 아무도 없는 빈집으로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기분좋았다.
마담 매직은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어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을것이다.

늘 아주 모호하거나 심지어 "아빠 미안해요. 내일은 바빠서 꼼짝 못해요" 같은 핑계를 댔다. 그래서 그는 딸이 더이상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누알라를 만나러 그녀의 직장을 찾아갔다.
누알라는 근처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근무중에 누가 찾아오는 건 곤란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 마이클 역시 한때 이 모든 것이었다. 케이티는 톰에게 완전히 빠졌다. 톰을 만나고 얼마 안 돼, 케이티는 따로아파트를 얻어 살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톰을 전혀 언급하지않고 그 모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케이티가 사랑에 빠졌고, 그애가 선택한 사람이 이 남자라는 사실은 한낮의 햇살처럼 분명했다.
누알라는 케이티가 언젠가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톰과 함께는 아니기를 바랐다.

이유는 정확히 몰랐지만, 그녀는 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케이티에게 깊이 빠진 것 같았다.
다른 여자애들과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이 사귄 지도 여러 달이 지났다. 둘이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그는 충실한 남편이자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누알라는 왜 그가 딸의 상대로 내키지 않는 걸까?

그들은 큰 그릇에 수프를 담아 먹곤 했고, 케이티는 그것이 아주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케이티와 톰은 요즘 초밥과 카나페만 먹고 사는 것 같았다.

케이티의 목소리는 고단하게 들렸고, 교사 일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사업이 전부였다. 회사를 꼭 설립해야 하고, 이제 최고의 의뢰인이 그들을 찾아올 것이었다.
4케이티는 크리스마스에 집들이 파티를 크게 할 거라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두 주전으로 날짜를 잡을 것이고, 초대장은 일찍 나눠줄 거라고. 인기 있는 파티가 될 것이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은확실히 마이클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었다. 불행했던 그 시절에 그녀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고 방식을 바꾸라고 사정했다. 이제 그녀는 덤덤하고 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이야기도 조금만 했다. 그건 놀랄 정도로 잘 먹혔다. 누알라가 집에 같이 가자는 뜻을 조금만 내비쳤다면 마이클은 그녀와 함께 왔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녀는 지금 그러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톰과 케이티에게 아무 말 하지 않은 건 옳았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파티가 끝나고 두 주가 지났을 때였다. 파티는 그들이 바란 만큼크게 성공적이지 않았다. 케이티와 톰은 현실에 직면했다.
누알라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집을 빨리 팔겠다고, 가능한 한 빨리 팔겠다고 했다.
회사 건물 소유주가 이 나라를 떠날 계획이어서 컨설팅회사는 빨리 정리할 수 있었다.

"언제나 지혜로우셨어요, 누알라. 처음부터요. 제가 케이티에게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당신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가진 분이라고. 내일 병원에 가서 제가 그 일을 맡을 수 있는지 알아볼게요. 그리고 여기서 지낼 수 있다면 정말 영광일 거예요. 영광이고행운이고 자랑스럽고요."
마이클이 떠난 뒤로 크리스마스는 종종 힘든 시기였다. 이제는 훨씬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걸 지혜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멋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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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은 지금 살고 있는 체스트넛 스트리트의 아담하고 우아한집에서 테이블에 은색 트로피를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올해 말에 키 낮은 흰색 꽃꽂이 작품을 만들어 그 옆에 둘 것이다.
스위트피와 작고 하얀 장미 봉오리, 카네이션이 나올 때, 배경으로는 하야스름한 양치식물을 쓸 것이다. 하지만 아니, 그건 현실적이지 않았다. 봄이 되면 그는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다. 겨우 일주일남았고, 그 문제는 다시 생각해보면 된다.

그 모든 것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내 생일 바로 전에 나는 5월7일에 아홉 살이 되었는데, 집안에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주 나쁜 일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문을 쾅쾅 두들겼다. 욕실 문, 차문, 정원 헛간 문, 그야말로 모든 문을 두들겼다.

아빠는 아홉 살짜리 아이를 데려가기 좋은 곳을 신문에서 찾아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았고,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늘 정확히 여섯시에 엄마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아빠가 나를 아빠 집으로 데려가지는 않아서, 나는 문에데코라고 쓰인 방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해리는 나보고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부모님이 다시 합치지는 않을 거라고, 같이 살던 집을 팔고 나면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리는 아주 똑똑하다. 이런 것을 다 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제 그게 내 잘못이 아니라는것을, 뭔지 몰라도 ‘면접교섭권‘이란 게 있다는 것을, 이대로 괜찮다는 것을 아니까.

그들은 매년 일주일 동안 휴가를 떠났다.
해외로는 아니었다. 해리 켈리가 외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네사켈리가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아일랜드에도 갈 곳은 충분했다. 어느해에는 리스둔바르나에 갔고, 어느 해에는 욜에 갔다. 그들은 좋은민박집을 찾아냈고, 혹시 다시 갈지 모르니 늘 명함을 챙겼다. 하지만 다시 가는 일은 없었다.
이십사 년의 여름휴가 동안 그들이 한 번 간 곳을 다시 간 적은한 번도 없었다. 그때 당시엔 얼마나 멋진 곳이냐고 아무리 말했다해도.

네사는 은제품 다섯 개를 은행에 맡겼다. 각각을 면으로 된 천으로 싸서 작은 노란색 가방에 전부 넣고 지퍼를 잠근 뒤에.
휴가 때 외에는 찬장 맨 아래 칸에 두었다. 선반 같은 데 진열해서 강도를 유혹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해리는 집안을 돌면서 창문잠금쇠를 일일이 점검했고, 경보기도 몇 번이나 작동시켜보았다.
후회하기보다 확인하는 게 낫다고 그는 늘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정원에 물을 줄 믿을 만한 이웃이 있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26번지에 사는 자유분방하고 단정치 못한 빨간 머리 여자와 밤에 그 집에서 자고 가는 남자친구밖에 없었다. 그 여자에게 뭔가 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이런 사람과는 적2
이 되기보다 친구가 되는 편이 늘 더 나았다. 그녀는 "안녕, 네사해리?" 하고 소리치곤 했다. 그녀의 나이가 그들의 절반도 되지 않을 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켈리 부부는 클리프덴으로 출발하기 전날 저녁에 떠나기 위한모든 준비를 끝냈다. 샌드위치는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아침에 삶아서 먹을 달걀 두 개와 토스트로 만들어 먹을 빵을 챙겨두었다.

집은 단정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채로 일주일 뒤에 돌아오는 그들을 반겨줄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해리가 다시 출근하기까지 회복에 필요한 닷새가 온전히 남을 것이다. 길고 긴 여정이 될 터였다.
그들도 알았다. 두 사람 다 아주 피곤할 것이다.

그들은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면 클리프덴에 도착하는 시간이아주 늦어질 터였다. 그래서 그들은 샌드위치를 먹었다.
하지만 멜리는 먹지 않았다. 그리고 멀린가에 도착하자 무단 점유한 건물에 사는 두 히피 친구가 빵가루를 많이 넣은 아주 맛있는렌즈콩과 토마토 요리를 만들어놓았다. 히피 친구들은 해리와사를 아주 편안하게 대했고, 애슬론에 사는 셰이가 목 상태가 안좋으니 꿀을 좀 가져다주라고 부탁했다.

네사와 해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묻고 있었다.
집으로 가야 할까? 지금 당장? 그럴 시간이 없었다. 멜리가 이미휴대전화로 아덴라이에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손을 흔들어 셰이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다시 차에 올라타고 서부로 했다.

"제가 누구냐고요? 멜리예요. 켈리 부부의 가장 좋은 친구이고이웃이에요. 그분들이 나를 구해준 셈이죠. 아니요, 전혀 까다로운분들이 아니에요. 아주 편한 분들이에요. 다른 사람들로 착각하셨나봐요. 아니요, 정말로 시원시원한 분들이에요. 아덴라이에서 공연을 보고, 골웨이에서 한잔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고, 맘크로스에서 차를 세우고 내려 염소와 양을 구경하며 대서양 냄새를 맡을 거니까, 새벽 한시나 두시 전에 도착하긴 힘들 거예요. 하지만 두 분이 회복하는 데 필요한 한 주라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멜리는 차의 뒷좌석에서 그들 사이로 몸을 기울였다. "자, 이제다 해결했어요."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네사와 해리는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편하고 정말로 시원시원하다‘는 말에 터무니없이 우쭐해진 기분이었다.
멜리는 진심으로 그들이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클리프덴에 다다를 때쯤, 아마 그들은 더이상 까다로운 사람이 아닐 것이다.

ad웬디와 리타는 학교에 다닐 때 언젠가 함께 회사를 경영하는 계획을 세우곤 했다. 어쩌면 사설 탐정소를, 아니면 레스토랑, 아니사이면 헬스클럽.
하지만 열다섯 살이 되면 상황은 으레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고, 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웬디는 런던에 있는 대학교로 가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그것은그녀가 꿈꿔온 일이자 그 이상이었다. 웬디는 1학년 상을 받았고,
2학년 메달을 받았다. 대학 과정을 절반쯤 밟았을 때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잘생기고 불같이 열정적인 맥이라는 강사를 만나 사랑에빠졌다. 그도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웬디는 그뒤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맥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요리나 빨래나타이핑 같은 일상적인 일뿐 아니라 그가 대학 외에 다른 곳에서도 강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맥은 정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웬디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눈물로 가득한 시간이 뒤따랐고, 맥은 새 이력서로 아주아주먼 곳에 직장을 구했다. 그는 미안하지만 아이를 낳는 문제는 물어볼 것도 없다고 말했다. 웬디가 혼자서 모든 일을 수습해야 할 것이었다.
웬디는 3학년 시험에서 상을 못 탔을 뿐 아니라 시험을 치지도 못했다.

다른 많은 사람은 웬디에게 맥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리타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그러지 못했다. 리타의 직장에 관한 이야기도 별로 대수로울 게 없었다. 길고 검은 머리칼과 큰 갈색 눈을가진 리타는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을 했다. 집에서 100마일 넘게 떨어진 타운에 있는 마담 프랜시스라는 부티크였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독립심이 생기고 혼자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녀에게 많은 외로움과 숱한 텅 빈 밤을 안겨주었다. 혼자 있다보니 일에 관련된 생각을 많이 했고, 자신이 일하는 여성복 가게에 적용할 멋진 아이디어를 몇가지 뽑아냈다.

"우리가 전에 이 정도 나이가 되면 회사 이사나 거물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 기억나?" 리타는 말하며 웃었고, 자기가 웬디를 보러 런던으로 가겠다고 했다. 적어도 아기는 익숙한 환경에서 덜 혼란스러워할 테니까.
"우리는 여전히 뭔가 해볼 수 있어. ‘불의를 바로잡다‘ 뭐 그런거, 복수의 천사가 할 법한 일이랄까. 심지어 우리 이름의 첫 글자와도 같아. WR, 웬디와 리타, "어쩜!"

다시 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빨간 머리 웬디와 검은 머리리타의 대화는 술술 풀렸다.
리타는 활기 넘치는 꼬마 조를 보자 웬디가 부러웠다. 조는 방긋웃으며 까르륵거렸고, 절대 큰 소리로 울어대지 않았다. 웬디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리타가 남은 천으로 자신이 입을 우아한 치마를 만들고 커튼을 수선하고 쿠션 커버에 테두리를 두르는 것을 보고 리타의 기술이 부러웠다. 와인을 두 병째 비웠을 즈음 그들의계획은 정리되었다. 신체적으로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그럼으로써 피를 흘리지 않고 큰 만족을 얻는다.
그들은 그 계획을 실행하는 데 한 달은 걸릴 거라고 결론을 내렸고, 삼십 일 안에 다시 만나 불의를 어떻게 바로잡았는지 이야기하기로 했다. 약간의 숙제가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서로 배경이 되는 자료를 주고받아야 한다. 못돼먹은 맥과 못돼먹은 프랜시스는더이상 벌받지 않은 채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불의를바로잡는 일이 곧 시작되니,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

웬디는 대학 본부에서 어렵지 않게 맥의 동선을 알아냈다.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척하면서, 그가 언제 참석할 수 있는지 물어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의 학과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들을 초청해 정치학 강연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어서 다음 삼주 동안은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뒤에는? 어쩌면………

프랜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낯선 사람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프랜시스가 리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이가게가 진실로 리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정확히 리타가 예상했던 대로 프랜시스는 그 문제를 자기 가족안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더블린에 사는 여동생 로니 레인저에게이쪽으로 와서 사흘만 가게를 봐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로니라면젊은 리타가 분수를 지키며 손님과 너무 친해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법을 알 것이다.

맥은 자신의 강연 시리즈가 기사로 다뤄진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특히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는 사실에그는 잘생기고 젊은 선동가 강사로 묘사되었다. 그게 나쁠 건 없었다. 웬디가 오래전에 그에게 그런 수식어가 따라붙도록 해주었다.
웬디.
결말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정착하길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이따금 그녀가 그리웠다. 그에게 그만큼 언론의 주목과 미디어의 관심이 쏠리게 해주고, 또 그를 위해 그런 눈부신 이력서를 써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강연 시리즈에 사람들이 얼마나 야단법석을 떠는지 보라. 마치 웬디가 그의 옆에 있는 것 같았다.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맥이 수강 신청을 한 학생들뿐아니라 모든 젊은이에게 강의를 공개한 일이었다. 그는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도록 하려면, 강의를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는일부 특권층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맥은 실제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하긴 했던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의 강연이 일요일에 텔레비전에서 생방송으로 방영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그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었다면,
그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사색가의면모와 선동가의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검은 가죽재킷을 새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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