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는 리지 스칼렛의 집 앞을 지났다. 리지는 집에 없었다. 그녀는 낮 동안 엔니오의 식당에서 일하는데, 그녀의 손녀딸이 그집 아들 마르코와 약혼한 사이였다. 디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리지는 남편 머티와 사별하고 몇 년 동안 혼자서 조용히 지냈다. 그 집에서는 어딘가에 다리를 올려놓고 차를 마실 시간이 넘쳐나겠지, 디는 생각하며 부러워했다. 리지의 아이들은 전부 안정적으로 독립했고 그녀의 보살핌을 기대하지 않았다.
로지는 쉬는 시간에 느지막이 점심을 먹으려고 집에 들른 듯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고객들에게 무료로 메이크업을 해주는일을 했다. 화장품을 살 것 같은 여자를 골라서 파운데이션과 블러셔와 아이섀도를 발라주었다. 그러고는 고객들이 구매한 대금의 일부를 수수료로 받았다. 제대로 된 일자리는 아니었다. 수많은 여자들에게 황갈색의 이 제품 아니면 반짝이는 저 제품을 사야만 한다고 설득해야 수입을 어느 정도 챙길 수 있었다.
디는 뼛속까지 피곤했다. 그녀는 식탁 앞에 앉았다. 리엄이 차를 새로 끓여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이 어딘지모르게 불안했다. 아주 천천히 걸었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찻주전자를 헹구는 모든 동작에서 신중을 기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그녀는 사온 식료품을 정리하지 않았다. 요구르트를 냉장고에당장 넣지 않은들, 빵을 큼지막한 밀폐용기에 담지 않은들 무슨상관일까? 비스킷을 플라스틱 통에 넣은들 십 분 뒤에 누가 내려와서 꺼내 먹으면 그길로 도루묵이었다.
디는 안 그래도 피곤하던 차에 이제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은 채 다리를 뻗었다. 리엄이 그녀 옆으로 의자를 옮겨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가엾은 내 마누라." 그가 말했다. "당신한테 이것보다는 멋진 삶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진심으로"
디는 놀라워하며 아들을 쳐다보았다. 앤서니는 어렸을 때부터 키우기 쉬운 아이였다.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꿈을 꾸는 스타일이었다. 같은 말을 대여섯 번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이긴했지만, 언제든 즐겁게 일을 도왔다. 항상 조만간 자신의 음악적재능이 인정받을 수 있길, 그래서 유명해지고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길 바랐다. 그러면 부모님에게 바닷가의 쾌적한대저택을 장만해드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앤서니조차아버지의 해고 소식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았다.
다는 쏘아붙였다. "이런 자기들밖에 모르는 짐덩이들! 거기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나를 하인처럼 부리려고만 드는 너희들모습을 좀 봐라. 너희들도 이제 정신 차릴 때가 됐어. 앞으로 집안 분위기가 좀 달라질 거야. 그래, 충격적일 수 있다는 건 나도알아. 하지만 이 집에서 계속 지낼 작정이면, 이 집에서 나가지않을 작정이면, 다른 데서 지내는 수준만큼의 생활비를 보태주어야겠다."
먼저 알아서 챙겨 먹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내가 상을 다차려주겠거니 생각하지 마. 지금보다 일을 늘리면 식사 준비까지 도맡을 여력이 없어. 빨래와 다림질도 너희들이 알아서 해. 너희 셋 모두 세탁기 돌리는 법 알잖아. 앤서니, 이제 너도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로지, 헬렌, 너희 둘은 방값으로 얼마를 낼 수 있을지 생각해봐."
로지는 늦은 오후와 이른 저녁 쇼핑몰에 방문하는 고객에게무료로 메이크업을 해주고 화장품 대량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복귀했다. 앤서니는 여전히 전자기기에 헬렌은 사진과 일정표무더기에 빠져 있었다. 리엄은 석간신문에 실린 구인란을 뒤지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게 달라지게 될지 그들 가운데 누구도 알지 못했다.
디는 어쩔 줄 몰라하는 조시를 남겨둔 채 버스 정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시는 샌드위치와 우유 거품을 잔뜩 얹은 커피를 상상하며 오전을 버텼지만 지금은 디가 준 초록색 봉투를 들고 곧장 집으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디가오늘 하루종일 워낙 수상했던 터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앤서니는 자리를 뜨는 다를 눈으로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엄마는 그에게 차를 끓여주고 애플 타르트를 한 조각 건네며 말을붙였을 것이다. 엄마는 앤서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항상 궁금해했다. 그는 주로 음악 생각을 했고 가끔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엄마는 예전과 전혀 달랐다. 그를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대했다. 집과 가족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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