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전까지 문학계라는 곳이 무척 폐쇄적이고 권위적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문인들이 ‘몇 년도에 등단한 누구‘라는식으로 자기소개를 하고는 서로 누가 더 선배인지 따지지 않을까, 멋대로 공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군더더기 없이 ‘나누어떤 분야의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곧 나도 "소설 쓰는 장강명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설명하게 되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자기규정도 서서히 바뀌었으려나? 이동진 평론가의 독서 에세이 『밤은 책이다』에는 그가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뿔테 안경을 사게 된 계기가 나온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울적하게 지내다가 동네 안경점에 가서 빨간 테 안경을처음으로 걸치게 되는 이야기다. 그는 "변화의 순간은 일종의 의식(儀式)을 필요로 할 때가 많은데, 내게 그 의식은 빨간테 안경을 사는 일이었다"고 썼다.
막 집어 든 관계의 과학의 저자 소개 문구도 대단히 훌륭하다. 김범준 교수는 자기소개를 책 뒷날개까지 이어지도록 길게썼다. 이런 식이다. "논문 출판을 걱정했던 연구로는 「혈액형과성격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 윷놀이에서 업는 것과 잡는 것중, 어떤 것이 더 유리한지 살펴본 연구 등이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마무리한 연구 결과를 모두 학술지에 출판할 수 있었다." 저자에 대한 신뢰와 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면서, 통계물리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에 대한 부담은 줄어드는 일석이조의 소개다. 내가 드러내고 싶은 나의 모습과 출판사에서 원하는 문구가다른 경우도 있다. 특히 장르소설을 내거나 앤솔로지에 참여할때 그렇다. 나는 책날개에 있는 문장도 책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본문 내용과 어울리게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편집자들은 그보다는 무슨 문학상을 받았고, 무슨 문학상도 받았고 하는 내용을넣으려 한다. 그 심정도 이해는 간다. 그 편이 손톱만큼이라도 책판매에 더 유리하리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그런 문구가 자신에 대한 규정이 되어버릴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발랄한 상상력‘ 같은 딱지를 누가붙인다면, 글쎄, 나는 싫을 것 같다. 운신의 폭이 좁아지지 않을까. ‘발칙한 상상력‘은 더 나쁘다. 그 상상력의 수준이 감당할 수있는 범위에 있음을 거꾸로 암시한다. 발랄이고 발칙이고 간에30대 중반이 넘어가면 어색해지는 수식어다. 오래도록 소설을쓰고 싶은 야심 있는 젊은 작가라면 그런 문제를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다.
작가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아마 작품이 곧 자기소개가되는 경우이리라. 무슨무슨 소설을 쓴 사람으로 소개되는 것.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성공이 있을까.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작가와 작품이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난 요즘 하루키를 읽고 있어" 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다. 나도 내 소개가 될 수 있는 소설, 피와살이 있는 인간 장강명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기자일 때는 전화도 늘 "장강명입니다"라고 말하며 받았다. 그게사람을 넓게 많이 만나야 하는 작업 종사자의 비즈니스 매너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그냥 ‘여보세요‘ 하여 받는다. 10년 넘게인 습관을 바꾸려니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다.
최민석 작가의 에세이 『꽈배기의 맛』을 읽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도대체 왜 한국 소설가들은 프로필 사진을 찍을 때 옆으로 얼굴을 돌려 찍는 걸까, 다들 담합이라도 한 걸까"라는 대목에서다. 최 작가의 말이 옳다. 정말 한국 소설가들은 프로필 사진도 그렇고 인터뷰 사진도 그렇고, 측면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다. 90도까지는 아니고, 45도 정도로 얼굴이 돌아간 옆모습이 대세다. 고개는 살짝 들고 있고,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다. 소설가들은 사진 속에서 약간 슬픈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아련한표정을 짓고 있다.
이제는 저작권이 문제 되지 않는 다른 고화질 이미지 파일이 생겨서, 과도하게 보정한 그 프로필 사진은 쓰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정말 다행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가하자는 대로 따르는 편인데, 저 과도한 보정 사진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태도가 꼭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나한테 어울리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라고 고집부리는 게 바람직한것 같지도 않고,
한국소설가들의 생활은 팍팍한 게 맞다. 졸업 후 바로 전업 작가가 되겠다는 계획은 한사코 말린다. 다만 공포에 짓눌려 꿈을포기하거나 세상을 원망하는 예비 작가가 있다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다른 일면도 보여주고 싶다. 2020년대 한국 소설가는소한 한가지 점에서는 다른 나라 소설가나 20세기의 선배들보다 처지가 낫다. 21세기 한국이 세계적인 영화·드라마 강국인덕분이다. 빛과 그늘이 있는 사안일 텐데, 밝은 부분만 먼저 적어본다.
닭이 글은 2020년에 썼다. 2021년과 2022년에 영화나 드라마로joten만들어진 한국 소설은 다음과 같다. 정소현 작가의 단편 너를김영하 작가닮은 사람 구상희 작가의 『마녀식당으로 오세요의 단편 「아이를 찾습니다. 김혜정의 판타스틱 (KBS 드라마안녕? 나야!」의 원작), 김해원 작가의 장편 동화 오월의 달리기』(KBS 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원작), 강미강 작가의 옷소매 붉은 끝동, 정은궐 작가의 홍천기, 김언수 작가의 뜨거운 피 정한아작가의 친밀한 이방인(쿠팡플레이 오리지널 드라마 안나의 원작).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흥행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 영상물에대한 해외 제작사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덩달아 한국 소설의 영상판권 시장도 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형제정부의 탄압은, 음………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박근혜가 탄핵된 뒤 문화예술계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가 열심히 조사해 발표해준 덕분이다. 그 위원회가 출범하도록 힘을 보태고 그 안에서 민간 위원으로 활동하며 노력하신 선후배 예술인들께 감사드린다. 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몇몇 지원 사업에서 배제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이 싫어서』와 『댓글부대』가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지. 처음부터 ‘얘는 빼라‘는 지시가 있었던 경우도 있었고, 나중에 심사 표를 조작해 적격 판정을 부적격으로 바꾼 사례도 있었다. 정말 쪼잔하고 유치하다. 치사하고 기괴한 정권이었다.
그에 비하면 알지도 못했던 지원 사업에서 배제되어 입은 손실은 솔직히 하찮다. 정부가 이런저런 지원을 해주면 고맙지만그런 도움을 받는 게 작가로서 나의 당연한 권리라고 여기지도않았다. 그런 정부 지원에 정치적 개입이 이뤄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당위와 별개로 말이다. 그래서 나 역시 화가 났음에도 "영혼을 말살하는 행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라든가 "문학의 존재 근거를 흔드는 것" (한국작가회의 대변인) 같은 말을 들으면 좀 머쓱했다. 그대로 넘기면 결코안 되는 불의이고, 그런 표현이 나온 앞뒤 맥락도 있지만, 그래도머쓱했다. 내 영혼은 아직 멀쩡하다. 그 무렵부터 문학계나 문인 단체의 수사(修辭)에 신경을 쓰게됐다. 정부 지원 사업 관련 문제에 대해 문학계의 언어는 너무 당당하거나, 반대로 너무 비굴했다. 정부는 당연히 우리를 도와줘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굶어 죽는다는 식이었다. 그런 때 지원의이유로 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보는 기분은 착잡해졌다.
근본적으로는 철학의 문제다. 나는 적극적 복지에 순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배고픈 사람을 먼저 도와야 하고, 노약자와 장애인이 건강한 젊은이보다 우선이다. 그런데 배고픈예술인과 배고픈 비예술인도 구분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직업에 관계없이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창작 지원에 찬성한다. 거기에 더해 많은 예술인이 프리랜서로 일하니 고용보험 같은 사회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특수성을 더 살펴주면 좋겠다. 반면 자기 부담금 없는 예술인 연금같은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주저하는 마음이 든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누구나 웹소설 플랫폼에 글을 올려 작가 호칭을얻을 수 있는 시대에 예술인의 자격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국가가 그 기준을 정하는 게 바람직한가?
위에는 이런 고차원의 딜레마가 있고, 아래에서는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힌다. 그러다 보니 문화 지원 정책이 실행된 결과물을 보면 비판할 지점들이 늘 여러 각도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 사업을 추진하는 공무원들도 참 답답할 것이다. 나는 최근에국립한국문학관에 대해 그런 감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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