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쓴소리를 써놓기는 했지만 물론 국립한국문학관이 잘되길 바란다. 문을 열면 나도 몇 번 찾아갈 것 같다. 물리적인 장소의 의미를 넘어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을 기획하는 기관이 되면좋겠다. 개인적으로는 2020년대 상황을 이야기하는 리얼리즘 노동문학에 내 자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노동문학만 쓰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2020년대의 한국 노동자들은 자기착취와 상호 착취에 시달리고 있고, 과거 민중문학의 틀로 이를포착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가끔 내 소설에 대해 너무 깔끔하다거나, 인물에 대한 애정이안 느껴진다거나, 진짜 같지 않다는 평을 받는다. 내 생각에 그런 평가는 어떤 면에서 정확하다. 그리고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않다. 열심히 청소한 집에 대해 누군가가 ‘먼지 한 톨도 없어서인간미가 안 느껴진다. 사람 사는 집 같지 않고 화보 같다‘고 평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의미 있는 세계와 깨끗한 집은 원래부자연스럽다. 플롯이라든가 윤이 나는 마루 장판 같은 것은 비정상적이다. 사람의 노력 없이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좀 더 혼란스럽지만 더 인간적이고 궁극적으로 진실을 지향하는 글쓰기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한다. 나는 회의적이다. 애초에 언어라는 것이, 세계에 가짜 의미를부여하기 위해 만든 도구이기 때문이다. 빗자루와 쓰레받기와걸레가 청소를 위한 도구인 것처럼. 글과 글쓰기로는 결코 세계의 실체에 이를 수 없다. 굳이 그 언저리에 가고 싶다면 소설이 아니라 시를 써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마침내는 언어를 포기하고 명상에 잠겨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러는 대신 소설을 쓰고 청소를 한다. 나는 그냥 내 주변 세계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꾼다.
지금 이 순간 ‘작가의 일상‘을 주제로 에세이를 써야 한다는사실이 퍽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최근 한동안 작가의 일상에대해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보름쯤 전에 그 일상을 위해 꽤비싼 비용을 지불하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원하는 대로 살았다. ‘그래, 그토록 원하던 작가의 일상을 제대로 누려본 소감이 어때?"라는 질문에 답안지를 써내야 하는 기분이다. 아직 잘 모르겠는데……….
유난 떤다 싶겠지만, 사실 짧은 외출 한 번으로도 의식이 얼마간 흐트러진다. 햄버거를 먹거나 편의점 도시락을 사러 가까운거리에 가는 정도라면 모자를 눌러쓰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나간다. 그럼에도 한번 집 밖에 나가면 가벼운 흥분 상태에 빠진다. 서울 길거리는 포털 사이트 첫 화면과 비슷하다. ‘여기 좀봐주세요!‘라고 호소하는 수많은 미남 미녀의 사진들이 걸려 있고 ‘이건 도저히 못 지나치겠지? 궁금하지?‘라고 외치는 간판도있다.
우리가 함께 만든 책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변덕스러운 시장 반응을 놓고 나중에 누가 옳았는지 따지는 게 의미 있을까? 우리는 성공하면 함께 성공하고 실패하면 함께 실패한다. 다만 그렇게 성공하거나 실패하기 전에 활발히 두 머리를짜내어 후회 없이 좋은 책을 만들 수 있기를 원한다. 한쪽에서는이런 관계를 맺는 힘을 에디터십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다른쪽에서는 파트너십이라고 표현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 되면 ‘문학이 내게 무엇일 것인가‘는 주어가 바뀐 질문이지 싶다. 내가 할 일과 그 일에 임할 태도는 정해져 있으므로, 지금 나에게 중요한 질문은 ‘내가 문학에 (문학계에? 문학장에? 문학사에?) 어떤 작가일 것인가‘다. 그러고 보면 문학이 뭔가의 도구가 아니라, 내가 문학의 도구인 것 같다.
인간이라는 종은 행복보다는 고통에 더 마음깊이 묶이게 되는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글자로 그 고통을 전하는 기술이 문학이 아닐까. 위대한 문학 작품은 모두 행복이 아니라 고통을 다루었다. 문학이 위안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위안이라는 게 문학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체험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직은 설익은 생각인데, 언젠가 이 주제로 보다명확하게 글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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