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벌어지는 이 일들을 순간순간 아무런 조작 없이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라. 우리는 진리의 숭배자가 아니라 쓸데없는 생각과 집착의 숭배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업장 덩어리의 허망한생만남을 것이라는위기감도 들 것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하는 행동이 즉신설법, 곧 온몸으로 법을설하는 것이다. 한 수행자가사랑하는 남편을 사고로 잃은 부인을 만났다. 연못 바닥까지 온통 달빛뿐이듯이, 그의 온 몸과 마음은 그 부인의슬픔 그 자체가 되어 눈물을 글썽이며 "부디 어려움을 이겨내시고 힘을 내십시오" 하며 합장하고 머리 숙였다. 어떤 가식도 의도도 없었다.
자신의 행동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이것이바로 온몸으로 법을 설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이 속에다 있다.

「우빠니샤드』의 철인들은 우리가 행하는 행위는 그에 합당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힘을 남기고 이 힘은 존속된다고 생각했다. 『우빠니샤드』에서 ‘업(karman, 業)‘이라는 용어는 주로 행위의 결과로 남게 되는이 힘을 지칭한다. 『우빠니샤드』 시대에 이르면, 이 업에 의해 태어남과죽음을 반복하는 윤회가 있게 되며, 윤회의 와중에서 다음 생에 어떤몸을 받을까도 이전 생에서의 업이 선이냐 악이냐에 의해 결정된다고하는 통찰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윤회는 고통이며, 이 속박에서의해방인 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통찰도 이루어지고 있다.

"윤회란 이전 생의 오온(정신과 육체)을 원인으로 하여 또 다른 오온이라는 결과가생한다고 하는 태어남의 반복을 뜻하지만, 이 생에서 저생으로 옮겨가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다."
인과관계에 의한 새로운 오온의 이어짐은 있으나, 아뜨만과 같이다음 생으로 변함없이 영속하는 연속체는 없다는 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용수는 여러 비유를 든다. 그중의 하나가 경전복창의 비유다. 경전을 가르칠 때 스승이 먼저 경전 한 구절을 독송하면 제자는 그것을 듣고 복창한다. 이때 스승의 말이 스승의 입에서 제자의 입으로 그대로 옮겨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의 복창은스승의 말 이외의 다른 곳에서 온 것도 아니다.

어떤 것들이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다면 그것으로써 양자는 공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이 논지는 중관파의 시조 용수(150~250경)에서부터 후기의 거장 샨따라끄시따(Santaraksita, 725~788경)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았다. ‘불일불이‘는 자성 없이도 온갖 작용이 일어나 세상만사가성립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공은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이기 때문에 도리어 세계는 성립한다.

공의 진리 그대로 사는 도인은 산을 보면 산이 되고, 물을 보면 물이 된다. 산이 되었을 때 온 천지에 산만 있을 뿐, 도인은 없다. 산에 대한 분별이 없기에 비교 대상이 없는 산은 이미 산이 아니다. 일이 있으면 그냥 일하고 졸리면 푹 잔다.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는 철저히 죽는다. 집착이 없어 순간순간 눈앞의 그것과 하나가 되지만 그것에 물들거나 머물지 않으며, 불변의 나(我)와 사물이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중생인 나에게서 너란 항상 내 안경을 통해서 들어온 너다. 너를 본다는 것은 곧 나를 본다는 것이다.

세상에 똑같은 나뭇잎은 없다. ‘목련 잎‘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나뭇잎. 하지만 그중에 모양과 색깔과 결이 똑같은 잎은 단 한 쌍도없다. 한 장의 목련 잎도 시간의 간격을 두고 보면 다 다르다. ‘목련 잎‘
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똑같은 나뭇잎은 어느 경우에도 없다. 이름은 그야말로 이름일 뿐이다.
성인 남성의 평균 세포 수는 약 60조 개라 한다. 이 세포들은 약 3개월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된다고 한다. 매 순간 어마어마한 수의 오래된 세포들이 죽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세포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몸은 한순간도 정지함이 없이 시시각각으로 태어나고 죽는 생멸의 과정에 있다. 내 정신이라는 것도 몸과 다를바 없다. 매순간 새로운 느낌과 생각, 감정들이 일어났다가 소멸한다.
어제도 나이고 오늘도 나라고 확신하며 이 확신에 근거해서 온갖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위에서 살펴본 대로 내 몸과내 정신이 동일한 두 상태를 갖는 경우는 결코 없다. 어제도 나이고 오늘도 나이기 위해선 어제부터 오늘까지 변치 않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나에게는 ‘나‘라는 이름이 예상케 하는 ‘변치않는 무엇‘, 즉 ‘자성‘ 또는 ‘아뜨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름만 ‘나‘다.

따라서 부파불교가 생각한 이상적 경지는 궤적을 그리는 점의 완전한 소멸이었던 반면, 대승불교의 그것은 태어나고 죽는 궤적 위에 있으나 궤적을 초월한 점들의 연속이었다. 중생의 눈에는 그의 궤적이 있으나 본인에게는 궤적이 없는, 만물과의 경계가 허물어진 찰나적 점들이생멸하는 연속이 대승불교의 보살이 살아가는 삶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고 자신 속의 갈애와 만나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갈애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 비난을 하거나 칭찬을 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그것과 만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뭔가를 재잘거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온갖 것에 대해 ‘좋다 싫다‘, ‘밉다 곱다‘, ‘옳다 그르다‘ 이러쿵저러쿵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이러한 재잘거림과 그것을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 일련의 행동·말·생각이 바로 반응이다.
이런 반응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통절히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하여 반응들이 멈출 때 있는 그대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가 보이면 강압에 의한 인위적인 질서가 아니라 자연스런순리가 마음에 생긴다. 긍정도 떠나고 부정도 떠난, 칭찬도 떠나고 비난도 떠난 중도中道의 순리.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우리 모두는 어디를 향해 치달리고 있는 것일까?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죽는 날까지 과연 이렇게 살다가 임종을 맞으면, 그때 후회는 없을까?
우리는 갈애와 무명에 휘둘려 사는 가련한 중생들이다. 상당한 지위와 부를 소유하고 있어도 욕망의 유혹에는 대부분 약하다. 이래서는안 되는데 하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끄달려가다가 어느새 닮기싫었던 사람이 되어있기도 한다.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분노에 두 눈이 충혈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튀어나오거나, 죄의식에 짓눌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자포자기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모두 늦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말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대는 단지모든 생각을 내려놓기만하면 된다."
괴로움과 파멸로 가는 흐름을 진정 멈추고자 하는 자는 그 성공과실패를 미리 따지지 않는다. 아니, 그에게는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진정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고자 하는 자는 깨달을 가능성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더구나 이곳은 깨달은 자가 몇 명인데 저곳은 몇 명이라는 식으로 깨달은 자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며 그 우열을 논하는 데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좁은방 안에서 독사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온 몸과 마음은눈앞의 독사의 움직임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독사를 피한 사람의 숫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독사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쓸 겨를이 없다.

내가 행하는 몸짓 하나, 말 한마디, 생각 한자락은 결코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반드시 자신과 성질이 동일한 종자를 나의 아뢰야식에남기고 사라진다. 그 종자는 없어지지 않고 아뢰야식에 남아있다가 때가 갖추어지면 그에 맞는 결과를 가져온다. 악담이 남긴 종자로 인해나는 또다시 악담을 하게 되고 괴로움의 과보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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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라고 했다.
연기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물을 컵에 부으면 물은 컵 모양이 된다. 컵속의 물을 바가지로 옮겨 부으면 물은 금세 바가지 모양이 된다.
물이 처음부터 컵 모양을 한 것은 아니다. 컵이라는 조건(인연)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컵 모양이 생겨난다. 그러나 한번 컵 모양을 했다고해서 컵 모양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바가지로 옮겨 부으면,
다시 말해 컵이라는 조건은 없어지고 바가지라는 새로운 조건을 만나면 물은 순식간에 바가지 모양으로 변한다. 컵 모양이든 바가지 모양이든 그 조건에 의존해야만 있을 수 있고, 조건이 소멸하면 그 모양도 함께 소멸하니 연기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런데도 한때의 자기 모습을 영원히 고정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 곧 어리석음이다. 마치 물은 늘 컵 모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이 어리석음에 의해 괴로움의 씨앗이 뿌려진다. 자신의 어느 한 모습에 집착하는 순간이 괴로움을 부르는 순간이다. 나의 진짜 모습은 사장도 아니고 일용직 노동자도 아니다. 그러나내가 사장이라고 고집하는 순간, 회사 밖에서도 사장님 대우를 받지 못하면 화가 난다. 여기 오곡도에서 지게를 져야 할 때도 사장님인 내가대단한 하심을 했다고 은근히 뽐내며, 그 하심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사장‘이라는 한 모습에 집착하기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괴로움을 겪는 것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이 말은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의 이치 그대로 사는 사람이 연기의 냄새라고는 전혀 풍기지 않으면서, 살아있는 연기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이 말을 외워서 사람들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똑같은 말이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질은 천양지차다. 울림이 없는 말, 그 허황함을 통절히 안 사람은 선택에 눈을 뜬다.

그런데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이와 유사한오해를 하고 말았다. 그 오해의 연장선에서 구축된 그들의 사고방식은상당 부분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많이 닮아 있다. 설일체유부를 줄여서
‘유부有部‘라고도 부른다. 대승의 공사상은 유부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공을 이해하는 것은 유부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일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진단하고 바로 잡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성은 연기하지 않는 것이며, 연기와는 양립될 수 없는 모순 관계에 있다. 연기를 인정하면 자성이 부정되고, 자성을 인정하면연기가 부정되는 관계다. 연기하는 것은 조건이 충족되는 한도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에 조건 여하에 따라 변화·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성은 연기하지 않는 것이므로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고정불변이고 영원히 존속한다. 결론적으로, 자성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면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것‘을 말한다.

눈앞의 삶이 진정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올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산다. 행복이라는 안경도, 불행이라는 안경도 끼지 않고 그냥 맨눈으로 삶을 본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름에 필요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지금 여기 눈앞의 일에 온전히 몰두한다. 돌아올 대가를 생각하고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몰두가 될뿐. 더 행복해지려는 탐욕도 없고, 불행이라는 생각이 드리우는 우울한 그늘도 없다.

결론적으로 유부는 번뇌를 마치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는 도둑과같이 생각했다. 내 마음과 번뇌가 결합했다는 것은 도둑이 침범한 것이요, 양자가 분리되었다는 것은 도둑을 쫓아낸 것과 같다. 도둑이 침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도둑은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다. 도둑인 번뇌는 항상 존재하는 자성이다. 반면에 공사상에 의하면, 번뇌는 공이며자성이 아니다. 눈병 환자의 눈에는 있지도 않은 헛것이 보이듯이, 어리석음 때문에 번뇌가 아닌 것을 번뇌로 보고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초상집에는 액운이 늘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부의 사고방식이다. 있지도 않는 액운을 어리석은 마음으로 스스로 만들어 괴로워한다는 것이 공사상의 통찰이다.

의발을 찾으러 쫓아온 당신. 선악도 생각하지 말고, 고귀함과 추함도 생각하지 말고, 모든 규정과 결론에서 자유롭게 되어라. 이때 당신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가? 알았거든지금 당장 보여봐라.
과거의 결론에 붙들리지 말고 진실만을 보라. 지금 본진실을 결론으로 고정시키지 말고 다음의 진실을 보라. 말뚝에 매어둔 끈에 발이묶인 새는 한없이 펼쳐진 창공을 자유롭게 날지 못한다. 결론의 끈에 발이 묶인 초라한 새가 되지 말라.

"말의 허구(희론)를 초월한 불멸의 부처를 말로써 허구화하는 그들모두는 말의 허구에 손상 받아 여래를 보지 못한다(『중론』 제22장 제15송)"
라는 게송이 시사하듯이, 말이 주인 행세를 하면 사물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해 괴로움이 발생한다. 말의 속박인희론에서 자유롭게 될 때 모든편견에서 벗어나 비로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때 해탈이 있다. 희론은 공에서 소멸한다.

세상은 말에 의해 움직이고 말에 의해 질서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말의 허구(회론)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이 현실을 완전히 떠나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현실에서 말의 허구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그것이 해탈이다. 그곳에서는 죽었던 유와 무가진실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렇게 진리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풍광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하지만 우리 중생에게는 ‘색즉시공‘이 없이는 ‘공즉시색‘도 없다.

공을 생각할 때 두 가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공은 이론적으로는무자성을 뜻하고, 실천적으로는 무집착無착하지 않는 것이 공을 실천하는 것이다. 집착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모든 것에는 그렇게 집착할 만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상은고정불변의 요강이 아니기 때문에, 즉 무자성이기 때문에 요강에 대한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진실에 맞는 당연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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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켜면 소리가 난다. 없던 소리가 생겨난 것이다. 소리가 나는 것이 연기의 ‘기본‘에 해당한다. "소리가 왜 날까?"를 설명하는 부분.
이 연기의 ‘연‘으로, 소리가 날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라디오 소리가 나기 위해선 실로 무수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중에서 세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전파를 보내는 방송국이 있어야 하고, 전파를 수신하는 라디오라는 기계, 그리고 라디오를 켜는 사람의 동작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쟁이 나서 방송국이 파괴되었다고 하자. 그런데도 계속 나는 라디오 소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방송국이파괴되면 왜 나던 소리가 멈출까? 라디오 소리는 방송국에 의존해야만비로소 나기 때문이다. 만약 라디오 소리가 방송국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방송국의 파괴와 관계없이 소리는 계속 날 것이다. 따라서 의존해야만 있을 수 있는 것은, 다시 말해 조건이 갖추어질 때만 생겨나는 것은영원할 수 없다.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결과물인 그것도 함께 변하모든 것은 그렇게 생겨이다.
거나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기‘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이지만,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함께 변하고 소멸한다‘이다. 이때의 조건을 불교에서는 인연이라고 한다. 우주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연기의 이치에 따라 생겨나고 소멸한다. 연기의 이치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만고불변의 진리다.

멀리 소나무 숲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가 날 만한 조건이갖추어져 소리가 난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항상 있다가 지금 홀연히 여기에 나타나서 소리가 난다고 하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을 것이다. 이 소리가 더이상 나지 않을 때, "그 소리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대답하겠는가? "그 소리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이 갖추어졌기에 소리가 났다가 인연이 다했기에 그냥 소멸했을 뿐입니다."라고대답한다면 연기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파초 잎에 내리는 비는 근심이 없는데
단지 사람이 그것을 보고 애간장을 태운다.
비는 아무런 근심 없이 그냥 파초 잎을 적신다. 파초 잎에 떨어지는 자신을 정당화하려고도 않고 일부러 그 의미를 찾지도 않는다. 바람이 불면 파초 옆의 잡초에 떨어졌다가 날이 개면 발버둥치는 일 없이 깨끗이말라버린다. 인연이 되면 또다시 파초 잎에는 비가 내린다.
실제로 있는 세계는 인연이 되어 파초 잎에 비가 내렸다가 인연이다 되면 흔적도 없이 마르는 세계밖에 없다. 이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의세계다.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 이 세계를 슬픔과 기쁨 등 갖가지 색깔로 물들여 놓고는,
세계는 애초부터 그런 색깔로 되어 있다고 착각한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신비로운 바람을 맞듯이 이 생각 저 생각하지말고 그냥 눈앞의 일을 직시해보라. 화가나는 일이 있다면, ‘이런 이유로 화를 낼 수밖에 없다‘ 하면서 화를 내는 자신의 정당성을 되뇌지 말라. 화를 내는 것에 대해 자꾸 설명하거나 이유를 붙이면 화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럴수록 화의 뿌리는 더 깊어져 끝날 줄을 모른다. 화에서 도피하지도 말라.

편하면 편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살며, 죽음이 오면 죽는 것이다. 그날그날이 좋고 나쁨을 초월한, 매일매일이 그날밖에 없는 유일한날, 절대적인 날, 최고의 날이다. 이렇게 사는 자에겐 매 순간이 모든 것이므로 매 순간이 곧 영원이다. 순간순간의 장면은 편하거나 아프거나하는 무상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서 그는 영원을 산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진리인 연기 그대로 살기 때문이다.
인연이 되어 생겨날 때는 100퍼센트 생겨나고, 인연이 다 되어 소멸할때는 100퍼센트 소멸한다. 인연의 세계에서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는가? 살아갈 때는 100퍼센트 살고 죽을 때는 100퍼센트 죽는다. 결코 미진함과 씁쓸한 뒷맛을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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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꿈이라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남편이아내가 죽는 꿈을 꾼다면 꿈은 깊은 무의식의 적개심을 나타낼 수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이 아내와 헤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을의미할 수도 있다. 남편은 아내와 헤어질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유일한 해결책으로 그녀의 죽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경우에 꿈은 증오의 표현이 아니다. 혹은 억압되어 있다가 꿈에서 일시적으로 표현된 분노가 일으킨 죽음의 소망일 수도 있다. 세 가지 해석을통해 각각 다른 문제들이 열린다. 첫 번째 해석의 문제는 증오와 그증오를 억압한 이유일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의 문제는 남편이 더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세 번째 해석의 문제는도발이 이루어지는 현실의 상황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자기 분석을 빠른 만병통치약보다는 자기발전에 도움이 되는 진정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해도 지금부터 죽는날까지 이 작업을 꾸준히 해나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없다. 다음 장에 묘사되는 것처럼 어떤 문제에 대해 열심히 매달려분석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자신에 대한 분석 작업이 뒤로 밀려나는 시기도 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이런저런 놀라운 반응을 관찰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자기 인식의 과정을 지속해 나갈 테지만 분명 적극성은 줄어들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일이나 단체 활동에 열중할 수 있고, 외부의 어려움에 맞서 싸울 수있으며, 이런저런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 단순히정신적인 문제에 덜 시달릴 수도 있다. 이런 시기에는 단순한 삶의과정이 분석보다 더 중요하며, 그 나름대로 발달에 이바지한다.

우리는 감정과 무관한 생각은 쉽게 무시할 수 있지만 감정적인경험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클레어는 자신의 분노와 상실감을 이해하는 데 명백히 실패했지만 상실감에 대한 감정적 경험은 그녀의마음속에 남아 그 뒤에 시작한 분석의 경로를 따라가는 데 중요한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유로운 연상과 이해 사이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다면, 도대체 언제 연상을 멈추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아무런 규칙이 없다. 생각이 자유롭게 흐르는 한 인위적으로 연상을 막는 것은 무의미하다. 조만간 그 생각들은 그보다 더강한 무언가에 의해 저지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호기심을 느끼는 지점에 도달하면 멈출 것이다. 아니면 갑자기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무언가를 밝혀줄 감정적인 화음이 떠오를 수도 있다. 혹은 단순히 생각이 바닥났을 수도 있다. 이는 저항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그 주제를 샅샅이 살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또는 자유롭게 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더 늦기 전에 기록을 살피며 해석을 시도해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자기 분석을 하는 사람은 과학적 걸작을 만들고자 하는 대신 자신의 해석이 자신의 관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
단순하게 자신의 주의를 끌고, 자신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신 내면에 감정적인 화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뒤따라가야 한다.
스스로의 자발적인 관심에 이끌려 가게 둘 만큼 유연한 사람이라면, 그 순간에 자신의 이해에 가장 접근하기 쉬운 주제나 현재 다루고 있는 문제와 일치하는 주제들을 직관적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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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 것을 모두 말하는 것은 단순한 과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너무 큰 탓에 대략적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 방해되는 걸림돌이 클수록, 환자는 더 비생산적이 된다. 하지만자유 연상에 더 가까워질수록 환자는 자신과 분석가가 들여다보기쉽게 더 투명해진다.

통찰이 안도감을 줄 수 있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성이 낮은 사항부터 시작해보자.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던 어떤현상의 이유를 알게 되면서 만족스러운 지적 경험을 하는 경우가많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든지 단순히 진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현재의 특이한 태도를 설명할 때도 적용된다. 또한 자신의 발달이 시작됐을 무렵, 어떤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한 이해를 돕는 기억이라면, 지금까지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꺼내야 할 때도 이 생각이 적용된다.

그러나 통찰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안도보다는 고통일 수 있다. 앞 장에서 논의했듯이 통찰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통찰을 오직 위협으로만 느끼는 것이고, 다른하나는 낙담과 절망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두 가지는 달라 보이지만 본질을 따지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당사자가 삶에 대한특정한 요구를 포기할 수 없거나, 아직 포기할 수 없거나, 당연히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따라 반응이 정해진다. 물론 요구는 그 사람의 신경증적 경향에 좌우된다.

통찰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고 해도 그 문제에 관한 최종결론이 되진 않는다. 사실 부정적 반응은 비교적 짧은 시간만 지속되고, 재빨리 안도감으로 변한다. 특정한 통찰에 대한 환자의 태도를 추가적인 정신분석 작업을 통해 바꿀 수 있는지 결정하는 요인들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변화 가능한 범위에 있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하다.

성격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도 특별히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통찰이 진정한 감정적 경험이라면 통찰 그 자체도 하나의 변화가 될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억압되어 온 적대감에 대해 통찰이 얻어진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적대감은 여전존재하고, 그것에 대한 인식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것은 기계적인 의미에서만 사실이다. 자신이 거드름을 피우고, 피곤하거나, 짜증이 많이 났다는 것만 알았던 사람이 억압을 통해 이러한 장애를일으킨 구체적인 적대감을 인식한다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미 논의된 바와 같이 그는 발견의 순간에 자신을 완전히 다른사람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가 인식을 곧바로 버리지 않는 한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 인식은 자신에 대해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고, 적대감의 의미를 조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에 직면했을 때 느끼던 무력감을 없애고, 더 활기찬 생동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이 모습을 드러낼 때 알아보고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관련된 모든 문제를 철저히 규명한 뒤에 환자는 입장을 정해야 한다. 자신의 이상을 어느 정도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은지, 물질적 이익에는 어느 정도공간을 할애할 것인지 결단해야 한다. 이러한 지점, 환자는 통찰에서 태도 수정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할 수 있다.

더구나 분석가는 환자의 특정한 감정이나 생각이 왜 하필이면지금 떠오르는지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그것은 특정한 맥락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어 분석가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다면 첫 번째 맥락에서는 도움과 이해에 대한 진정한 감사를 나타낼 수 있다. 두 번째 맥락에서는 앞선 분석 시간에 새로운 문제에대처하느라 야기된 불안감이 환자의 애정 욕구를 증가시켰음을 암시할 수 있다. 세 번째 맥락에서는 분석가의 육체와 영혼을 소유하려는 욕구의 표현일 수 있다. 환자는 이때 새로 발견된 갈등이 ‘사‘랑‘으로 해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또한 분석 후반 단계의 저항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분석가가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분석가는 많은 작업을 하고 통찰도 많이 얻었음에도 환자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경우 분석가는 해석자의 역할을 버리고, 환자가 통찰과 변화의 어긋남을 대면하도록공개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때 분석가는 어떤 통찰도 자신에게 절대 손대지 못하게 만드는 환자의 무의식적인 의구심에 대해 의문을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존심을 쌓아 올린 가공의 토대가 흔들리면서 환자가 자신을의심하기 시작할 때도 있다. 자신에 대한 해로운 착각이 없어지는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신경증은 예외 없이 건실한 자신감을 크게 손상시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월함에 대한 허구적 관념이 자신감을 대신한다. 하지만 힘든 싸움의 한가운데에 있는 환자는 그 둘을 구별하지 못하다. 환자에게 부풀려진 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의 파괴를 의미한다. 그는 자신이 믿었던 만큼 성자 같지도, 사랑스럽지도, 강인하지도, 독립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고, 영광을 잃어버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시점에서 환자는 비록 자신조차 자기에 대한 믿음을 잃었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다.

환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보다 분석가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중에 자신의 특이성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불안한 성격의 특성들, 즉 소심함과 의존성, 오만함, 복수심, 사소한 상처에도 움츠러들고 얼어붙어 버리는 성향은 언제나 환자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자기 이익을 저버린다. 그러한 특성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불만족스럽게 여길 뿐 아니라 환자 자신까지불만족스럽게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의일반적인 관계에서는 이런 사실이 종종 흐릿해진다. 그는 의존적으로 지내고, 앙갚음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기면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고 느낀다.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려는 의지가 덜하다. 같은 특성이 분석에서 나타나면 환자의 이익에 반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 특성들의 해
‘로운 성격을 보지 않을 수 없고, 자연스럽게 그 부분에 대해 눈감고싶어 하는 환자의 충동이 상당히 줄어든다.

분석가와 환자 관계의 또 다른 측면은 분석가가 환자에게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으로 인간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분석가가주는 다른 지원은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는 데 반해 인간적 도움은그 정의상 자기 분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분석을 수행하는 사람이 운 좋게 자신의 발견에 관해 이야기할 이해심 있는 친구가 있거나 이따금 분석가와 함께 확인해볼 수 있다면, 자기 분석이덜 외롭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방편도 다른 인격체와 긴밀히 협력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인간적인 도움의 부재가 자기 분석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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