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의 모든 경험은 부정부터 긍정까지, ‘향유 수치‘의 눈금을구성한다. 어떤 경험에서 얻은 기분이 눈금에서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는지 묘사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명확하다. 어떤 것이 우리 내면에서 향유를 만들어내면,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철학자들은 향유가 언제나 경험과 동시에 나타나야 한다고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어떤 콘서트를 관람하고 난뒤 이미 음악은 몇 시간 전에 사라졌지만 계속해서 음악에 도취된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들은 것의 상相과 향유의 상은 일치할 필요가 없다.

칸트는 미에 보편타당한 것이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감각적인 생각과 이해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칸트는 ‘아무런 개념 없이도 보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아무런 개념이 없다‘고 말한 이유는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파악하거나 계속해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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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와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아름다운 것 목록‘의 오류는 명백하다. 너무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현대 이론은 각각의 대상보다는 아름다운 대상의 조화, 다양성, 대칭, 균형, 단순함 등에 주목한다. 유행이나 음악 스타일은 계속해서 바뀌지만, 그 근본에 놓인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

여기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미적 감각이란 없고, 모든 것은 문화적으로 학습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란 학습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고통을 느끼는 방법을 가르칠 수 없듯이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을 때 긍정적인 기분을느끼도록 가르칠 수 없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타인을 어떤 상황으로 몰아가서 특정한 것을 느끼도록 할 수는 있다. 그러려면 어쨌든 그 사람은 무언가를 느낄 능력을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 뇌에 있는 향유의 중추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이 입력되기를 추구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기본값이 있지만, 대개는 개인적인 경험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날에는 누가 예술가이고 누가 ‘예술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수작업 능력이 결정적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예술 시장에 스스로를 내놓는 재능이 결정적이다. 예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건 우리 애도 그리겠네"라고 말한다. 예술 종사자들은 "제일 처음이 되어야지"라고 반박한다. 둘 다 틀렸다. 우선 현대 예술의 품질을 객관화할 수 있는 표준이 없기 때문에 특별하게 독창적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 시장의 심리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갤러리 운영자와 큐레이터의 권력 관계, 누가 누구와 파티에 가고,
누가 누구를 추천하고, 후견인회에서 쏟아진 악평 중 어떤 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누가 결정적인 비평을 남기는지 등을 이해해야한다.

동물행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니콜라스 틴버겐NikolaasTinbergen이 이미 50여 년 전에 이와 비슷한 효과를 관찰했다. 붉은부리갈매기의 새끼들은 어미가 둥지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새끼들에게는 어미의 부리 위에 있는붉은 점이 열쇠자극Key stimulus이다. 연구진이 막대기 끝에 붉은 점을 세 개 칠해서 만든 부리 모조품을 내밀자 새끼들은 더욱 열렬하게 반응했다. 이 부리 모조품이 ‘초엄마‘가 된 셈이다.

예술은 우리의 감각과 감정을 건드린다. 그것은 문학일 수도 음악이나 그림일 수도 있다. 예술은 또한 우리의 문화적 지식이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능력을 자극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특별하다. 미적 향유, 경탄, 혼란 등 각각의 도발에는 신경학적 설명이 따라야 한다. 생각을 연구하기가 가장 어려운데, 생각은 무상하게 흐르며 다른 수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이어질 자연과 예술의놀라움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맹시의 존재는 우리의 의식에 적어도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측면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심리학과 신경과학 분야는 우리가정보로 가는 ‘진입로‘라고 말하는 측면, 즉 우리가 정보나 생각을 언제 이용 가능한지에 초점을 맞춘다. 맹시인 사람과 의학적으로 정상 시력인 사람은 이 진입로를 따라 특정한 정보로 다가간다. 이들은 예를 들어 어떤 표정이 친절한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정확히 진술할 수 있다.
이런 측면과는 반대로,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의식의 ‘경험적
‘특성‘에 관심을 보인다. 이것은 맹시인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이다.
이 경험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묘사하기는 어려운데, 더 어려운
"아니 애초에 불가능한 것은 그것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는일이다.

지각은 경험적 의식의 전형적인 두 가지 원천 중 하나다. 우리는 색, 소리, 냄새 등을 지각한다. 여기에 가려움, 치통, 배고픔, 오르가즘 등의 신체감각이 포함된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을 여러 색으로 볼 뿐만 아니라 3차원으로, 즉 여러 형태와 질량, 강도까지 함께본다.

‘의식적‘이라는 말은 곧 정보나 경험에 접근했다는 뜻이다. 의식의 두 가지 변종은 모두 1인칭 시점이 특징이다. 우리의 모든 경험,
생각,감정, 지각은 나 자신과 연결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의 ‘주관성‘을 언급한다. 우리의 경험은 아주 특수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속해’ 있다. 경험은 우리와 분리될 수 없다.

의식의 범위는 항상 변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의식을 강이나물의 흐름과 비교할 수 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실험심리학의 창시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생각의 흐름‘ 혹은 ‘의식의 흐름‘이라는말을 사용했다. 생각, 느낌, 소원, 인지 등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 곁에서 존속하고 있다. 물론 우리도 변한다. 우리는 점점 자라서 성인이 되고, 때로는 트라우마를겪거나 기분이 상하고, 때로는 행복하거나 만족하고, 때로는 지혜로워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다.

의식은 계속해서 변하는 들이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흐르기때문이다. 이때 몇몇 의식 상태는 들의 가장자리에서, 몇몇은 주의의 중심에서 나타난다. 이 초점이 바로 의식의 다른 의미를 설명하는 열쇠다. 어떤 일을 고의로 하려면 우리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잘 알 수 있는 것이 되고 곧언제든 불러올 수 있는 지식이 된다. 사고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의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

의식이 뇌에 속해 있다는 명제는 물리주의Physicalism의 근본적인가정이다. 이원론에 반대하는 물리주의는 애매모호한 영혼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은 물리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며 물리주의자들은 이원론의 모순을 피한다. 하지만 의식을 설명하기에는 아직 부족한데, 물리주의 또한 일방적인 의속만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삶과 의식은 체계의 현상이다. 우리 몸의 분자 중 단 하나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분자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삶이 탄생한다. 의식도 얼핏 보기에는 이와 비슷하다. 우리 뇌에 있는 뉴런 중 의식을 가진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약1조 개의 뉴런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냅스 연결을 지닌 우리만이 의식을 갖는다. 만약 우리가 모든 분자를 하나로 모아 합치면 적어도 생명체의 겉모습을 똑같이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의식은 다르다. 우리가 뇌에 있는 모든 원자의 특성, 예를 들어 모든 원자의 응집력과 무게와 다른 원자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효과 등을한데 모은다고 하더라도 의식을 손에 넣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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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철학 분야에서는 양립가능론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다만 점차 판세가 뒤집히는 것 같다. 가장 최근에는 신경과학자들이 논쟁에 참여해 간단한 실험만으로도 인간에게 행위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토론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이 주장의 근거는 철학의 연구 결과보다 훨씬 뒤처져 있지만, 언젠가 이들의 목소리가 커진다면 철학자들이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리벳은 이 실험에 따라 의지가 더 나중에 나타난다고 결론지었다. 즉 뇌가 이미 손가락을 움직여야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그로부터 약 300밀리초 후에 우리가 의지를 느낀다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가 과학적으로 반박당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그런 행동을 할 것이라는 사실이 결정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행위의 주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환상이었다는 말이다.

여러분의 무릎을 다시 한 번 눌러보라. 손가락으로 무릎을 누르기전에 매 순간마다 의지의 충동이 느껴지는가? 물론 어떤 사람들은
‘바로 지금이야"라고 되뇌며 행위에 나서기도 하고, 3까지 센 다음행위를 하기도 하고, 속으로 어떤 충동이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신체적인 행위보다 앞선 또 다른 행위이며,
가설에 따르면 이 행위 또한 의지의 충동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도덕과 법을 어떻게든 개혁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잘못되었다. 인간의 행위를 자세히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일상적인 도덕과 형법이 제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상황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없었다"라며 자신을 변호하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달리 하고 싶은마음이 없었다"라는 뜻이다.

미국의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는 헛소리에 관한논문을 쓴 적이 있다. 오랫동안 오직 전문가들만이 그의 논문에 관심을 보였는데, 곧 한 출판사가 그 잠재력에 주목했다. 프린스턴대학의 유명한 철학자가 그토록 철학적이지 않은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얇은 책으로 출간된 이 논문은 100만부 이상 팔렸다. 이 책에서 프랭크퍼트는 단순히 헛소리 혹은 개소리라는 단어의 사전적인분석에만 몰두하지 않고 인간적인 현상도 다루었다. 우리는 가끔진실인지 거짓인지 정확히 모르는 주장을 펼친다.

"물론 평소라면 진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 누구도거짓을 믿으려고 하거나 진실을 알지 못한 채로 머물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어떤 것이 진실이고 우리는언제 이에 대한 지식을 아는가? 진실과 지식은 서로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런 의문은 태초부터 철학 분야에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이와 관련된 논쟁은 철학의 다른 분야에 비해 조금 더 까다로웠다. 그럼에도 애써 토론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가 언젠가 진실과 지식 사이의 차이를 이해한다면 다른 주제를 더 명확하게 보게 될 것이다.

철학 분야에서 진릿값 지지자들은 다른 이들보다 무미건조하다.
이들의 선택지로는 발언, 주장, 논증, 생각, 문장, 이론 등이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선택지에 대해 때로는 참, 때로는 거짓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공통적으로 어떤 명제 Proposition(논리 명제)를 표현한다. ‘Proposition‘이라는 표현은 다루기 힘든 것이지만, 간단하게말하자면 발화된 문장 혹은 발언이나 논증의 내용이다.

진리대응론은 우리 인간과는 상관없이 어떤 명제가 참 혹은 거짓이라고 간주한다. 이런 접근법은 실재론적 진리론에 속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리대응론은 진리가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런 결점을 다듬고 손질하는대신 진리가 객관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실재론을 공격했다.

니체보다 먼저 상대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상대주의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다.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진리가 각 개개인의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뜻인데, 프로타고라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존재는 보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진리가 문화 혹은 시대, 사회적 계층, 성별, 아니면니체와 같이 종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다.

지식의 증대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지식이라고 말할 때 ‘정보‘를의미하지만, 사실 정보란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설명을 겹쳐서 생각한다. 즉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기본 지식을 품은 잠재의식이 있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간단한 원칙 몇 가지로 설명 가능하도록 만들고, 이를 통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원칙으로 더 많은 것을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다. 논증의 연결로 가는 길은 신뢰도가 높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에펠탑과 나 사이에 인과적인 연결이 있어야 비로소 나는 내가 에펠탑 앞에 서 있다는 논증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인식‘을 언급할 수 없다. 때때로 이런 연결은 매우 짧다. 에펠탑에서 반사된 빛이 내 망막에 곧장 부딪치듯이 말이다. 한편으로 이런연결은 매우 길기도 하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다른사람에게 들어서, 책으로 읽어서, 뉴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지식처럼 말이다. 오류에 저항력이 없는 인식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인식으로 논증을 연결하고 엮어나갈 수 있다.

과학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이 없는 어딘가의 실험실 네온 불빛 아래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과학은 모든 사람이 뛰어난 두각을보이는 어떤 능력을 방법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 능력은 바로 이성이다. 우리는 누구나 창문이 닫혀 있음에도 방 안이 갑자기 서늘해졌을 때, 그 원인이 무엇인지 탐구한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어릴때부터 자연과학자다. 우리는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진다거나 식물이 물을 필요로 한다거나 도발이 분노의 폭발을 불러일으킨다는 이론을 세운다.
이런 종류의 해석은 과학을 정확히 설명한다. 과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다양한 면을 최대한 가정이나 추측 없이보편적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이들의 명제는 항상 반론 가능해야하는데, 그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내용이 공허할 뿐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관찰 단계에서는 숫자를 활용한 체계적인 측량이 중요하다.

의학 분야에서는 "치유하는 사람이 옳다"라는 말이 통용된다. 의학의 가장 첫 번째 목표는 건강이며 우선 사람을 건강하게 만든 후에 치유 과정을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검증 없이는 위험이나 우연까지도 효과로 간주할 우려가 있으며 효과가 있는 것과없는 것 혹은 위험한 방법을 혼동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연금술은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학문이지만 아주 복잡하고 깊은 미궁일 뿐이었다.

우리는 하나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해진구성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여기저기서 속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진리는 객관적이다. 어떤 문장이나 주장의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여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때때로 우리는 미신을 따르지만 어떨 때는 원칙을 따른다.
"침묵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열어야 한다." » 17우리는 현명한 척하려면 입을 다물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말하며 그 과정에서 헛소리를 한다는 사실도 감수한다. 내가틀리지 않았다면 이것이야말로 그 무엇도 아닌 진리다.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듯이, 소크라테스 본인 또한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영원하게 만들었다.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예술가, 건축가, 과학자들이 자신이 진행한 프로젝트를 ‘아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향연》의 유쾌한 대화에서 철학적 미학Aesthetics, 즉 미나 예술에 관한 학문이 시작되었으며, 거기서 생겨난 고대의 근본 사상이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미를 성애와 향유는 물론 예술이나 창의성과도 합쳐 대화의 주제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각각의 주제를 섞지 않고 따로 제시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예술도 있으며 자연처럼 예술이 아닌 미도 있기 때문이다

펩시 테스트와 바그너 테스트에서 보았듯이 직접 느끼는 감성과판단 사이의 불일치를 우리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한다. 우리는 아름답고 편안하다고 생각한 경험을 여러 가지 근거로 잘못 평가할 수 있다. 상대방이 특정한 답변을 기대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상대방에게 맞춘 답변을 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여 취향을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성실하게, 더 열심히 자신의 경험에 간섭해야 한다.

칸트는 미와 관련된 현대 인과론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이란 향유를 일으키는 것이다. 칸트의 근본사상은 오늘날까지 미학을 지배하고 있다. 칸트는 자신의 저서 《판단력비판》에서 ‘향유‘가 아니라 ‘무관심한 만족‘을 언급했다. ‘무관심‘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자신의 관심이나 취향과는 무관하지만 마음에 든다고 생각할 때만 그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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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인 논쟁은 중세 시대 영국의 대주교이자 신학자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캔터베리의 안셀름‘이라고도 불림)가 시작했다.
논쟁의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전능하며 모든 이들에게 자비로운 완벽한 존재라는 개념 혹은 설명을 알고 있다. 이런 종류의 현존하는 존재는 현존하지 않는 존재보다 완벽하다. 그러므로 완벽한 존재라는개념 뒤에는 그 존재의 현존이 따라온다.

만약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신을 창조했으며, 도대체 누가 신을 창조한 존재를 창조했다는 말인가? 이렇게 질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것이 우주론적 논쟁의 함정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주론적논쟁은 우주의 탄생에 대한 논쟁도 아닐뿐더러 신이 현존한다는 증거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근거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을 설득할 뿐이다.

때때로 인간이 신과 직접 연결되기도 한다. 신은 언제나 선택된자들을 골라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의문은, 어째서 이런 회견이 늘 대중들 앞에서가 아니라 조용하고 작은 방에서만 이루어졌느냐는 것이다. 신의 의사소통 방식은 규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미국의 전 대통령 중 한 명은 신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계시를 내려 이라크를 상대로 국제법에 어긋나는 전쟁을 일으키도록 명령했다고 말했으며,
이 전쟁의 결과로 약 1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했다. 우리는 당연히 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지만, 이런 사건은 깨달음의 원천이 상당히 임의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영적인 감정을 품었거나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사람은 그것을 기반으로 전체 세계상을 구축하고 싶은 것인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물어야 한다. 론 하워드 Ron Howard 감독의 2001년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존 내쉬John Nash가 조현병을극복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어떤 사람들을 보지만 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이 몇년 동안 나이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로서도 매우 뛰어난 작품이지만, 이성이 비이성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철학자 헤르베르트 슈네델바흐Herbert Schnädelbach는 2000년에주간지 《디 차이트》에 게재한 <기독교의 저주>라는 기사에서 신 없이 모든 것을 주제화한다는 격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반대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격분했고 논쟁은 파렴치하고 궁색하게치달았다. 슈네델바흐는 원죄라는 기독교적 윤리가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분명히 말했다. 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지옥이니 묵시(아포칼립스)니 하는 상징적인 폭력 또한부당한 것이다. 슈네델바흐에 따르면 십수 세대에 이르는 사람들이이런 ‘경악스러운 환상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 그는 그러므로 기독교의 가장 큰 축복은 그것이 사라지는 데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 단계가 지나가면 본격적인 수면, 즉 눈이 빠르게 움직이는 렘수면과 눈의 움직임이 잦아들고 맥박도 낮아지는 논렘Non-REM 수면이 나타난다. 처음에 사람들은 정신이 렘수면 단계에서만 활발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우리의 정신은 조용히 쉬는 때가 없다는사실이 밝혀졌다. 다른 수면 단계에서도 우리는 꿈을 꾸지만, 꿈이그림처럼 자세한 경우는 드물다. 꿈속에서는 감정과 생각이 우세하다. 사고의 과정은 대개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때때로 강제적일때가 있다.

독일계 미국인 철학자 아돌프 그린바움Adolf Grinbaum 이 요점을짚었다. 해석이 그럴듯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고 해서 꿈이 의미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 더 첨예하게 다듬으면, 꿈에 관한 글이 언어적 기호, 즉 문자로 쓰였다고 해서 꿈 자체가 상징이라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하늘을 나는 꿈이 성관계를재해석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늘을 나는 꿈이 본능적인 신체적 환각이며 렘수면을 할 때의 근육 마비로 인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뇌의 운동중추는 근육으로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명령이 목표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근육이 긴장하는 자극이나 느껴지는 저항이 없기 때문에 서로 반대되는 신호를 하나로 통합하는 메커니즘이 발동된다.
그래서 몸이 가벼워지거나 중력을 잃은 것 같은 환각이 발생한다.
혹은 몸이 마비나 마취된 것 같은 환각이 발생하기도 한다.

스팬드럴은 건축 용어로, 아치의 양편과 위쪽에 있는 삼각형 및역삼각형의 공간을 가리킨다. 고대의 호화로운 건축물을 보면 스팬드럴 부분에 대개 화려한 조각이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를 잘보여주는 예시가 이슬람 사원이나 인도의 타지마할, 그리고 유럽의르네상스 시대 건축물이다. 하지만 이런 건물 장식은 그저 여백을채우기 위한 것으로, 다른 목적은 없다. 다리나 보도, 문, 사원 같은건축물은 아무런 장식이 없어도 제 기능을 한다. 플래나간에 따르면 꿈은 수면의 스팬드럴이나 마찬가지다. 꿈은 무의식으로 빚어진장식품이며 아무런 기능이 없다.

우리 힘 속에 행위가 있는 곳에 단념도 있다."
현대철학에서 ‘행위의 자유‘가 언급될 때는 쇼핑이나 약물 오남용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논의가 진행된다. 자유를 주제로 토론할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자유롭지 않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논의를 과격화한다. 예를 들어 숨 쉬기, 모든 생각, 모든 산책 모든 대화가 자유롭지 않을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 전에 우선 행위란 무엇인지 파헤쳐야 한다.

행위와 자동증 Automatism을 가장 잘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는 것은 행위다. 즉 스스로 몸을 움직이거나 스스로 생각을 이어간다면 행위다. ‘의도적으로 한다‘는 말은 ‘고의로 한다‘는 말과 같다. 어린아이들은 일찍부터 이것을 배운다. 아이들은 "일부러 그랬잖아!"라고 자주 말한다. 부모들은 "일부러 그랬니?"라고 자주 묻는다. ‘의도적으로‘, ‘고의로’, ‘일부러’는 모두 우리가 무언가를 ‘어떻게‘ 하는지를 나타내는 방식이자 행위의정확한 정의다. 이때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무언가를 의도하거나계획을 세운다. 단 ‘의도‘와 ‘의도적으로‘는 어원은 같지만 뜻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한다. 이들을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라고 하는데, 라틴어로 ‘liber‘는 자유를 뜻한다. 이들은 자유와 대립하는 것은 결정론뿐이므로, 세상만사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명제를 다루는 결정론을 직접 증명하거나반박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란 초자연적인 것혹은 비과학적인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장 보편적인 자연, 예를 들어 공간이나 시간 등을 다루는 철학 분야다. 형이상학적 명제는 관찰이나 실험 같은 경험적인 방법으로 근거를 댈 수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정말로 결정되어 있는지 여부를절대 알 수 없다. 다만 이 가정을 뒷받침하는 자연법칙이 과연 무엇인지는 탐구할 수 있다.

이세상우연이 자유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을비판하는 이들이 늘 하는 말이다. 이들은 "결정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구하려고 우연을 끌어들여야 한다"라고 덧붙인다. 우연으로는 그 어떤 가치도 더 잘 드러낼 수 없다. 만약 우리가하는 모든 일이 그저 동전을 던져 결정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행위의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세상에사는 사람들만큼이나 자유롭지 않다.

문제는 명백하다. 결정론의 반대는 비결정론Indeterminism이다.
하지만 비결정론이 곧 순전한 우연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비결정론적 세상에는 혼란이 가득할 것이라는 비난은 자유의지론자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연으로 자유를 수호할 수 없다.
그런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이 세상이 결정론적이지도, 혼란스럽지도 않으며 오히려 한 가지결말로만 결정되지 않았음에도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상만사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이 가능성들은 모두 지구에 생명체가 생겨나고 우리가 먼 미래까지 계획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질서는 절대적 필연성과 순전한 우연의 정중앙에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작가 알베르 카뷔Albert Camus를 비롯해 실존주의를 믿었던 사람들은 행위 속에 존재하는 우연적인 요소에 감명받았다. 우리는 모든 억압뿐만 아니라자신만의 근거에서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에 도달할수 있다. 프랑스어로 ‘무상행위Acte gratuit‘라고도 하는 완전한 자유의지 행위는 개인의 자유에서 가장 높은 단계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한편,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행위의 자유를 인정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논쟁을 접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소원을 직접 선택할 수 있을 때만 정말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소원은 사회에 의해, 환경에 의해, 관계에 의해, 유행에 의해, 유전자에 의해, TV 방송에 의해 혹은 다른 것들에 의해 결정되곤 한다. 우리가 직접 개입하지 않고 결정되는 것이다.

행위에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자유에 의문을 품을 수 있을 때가 바로 제약을 건너뛸 도약점이다. 오직 행위를 하는 존재만이 자유로울 수 있으며, 오직 자유로운 존재만이 행위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미 선택의 가능성이 행위라는 개념에 속해 있다. 선택지가 없는 존재는 행위를 한다고 볼 수 없다.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관련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들은 모든 것이 결정된 세상에서도 우리가 행위를 할 수 있다고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결정론적인 세상에는행위 하는 존재 대신 무엇을 하든 외계인 손 증후군 증상을 보이는로봇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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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의견은 가장 그럴듯하다. 사회적 감정이 기본 감정과 구분되는 근거는 사회적 감정으로 인한 행동 표현이 문화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아이들은 선천적인 언어능력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독일어나 일본어를 배우듯이, 감정능력 또한 국가에 따라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연모는 슬픔이나 증오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경향이다. 사랑과 연모는 뜻밖에 우리를 습격하는 것이며 다른 감정보다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에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거의 모든 문화권의 민속 문학에도 우리가 ‘유럽적‘이라고 말하는 사랑과 관련된 모티프나 행동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리움, 친밀함, 욕망, 꼭 지켜야 하는 약속 등이다. 즉 문화적 이론이 중세 시대의 문학 트렌드로 미루어 실제 삶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사랑을 서구적인 파트너십의 전개 방식과 혼동하게 되었다. 서로 만나고, 의례적인 말로 호감을 사고, 영화를 보고, 요리하고, 촛불을 켠 분위기 있는 장소에서 식사하고, 키스하고, 성교하고, 교회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과정 전부가 사랑인양 착각하는 것이다.

다마지오와 그의 동료 연구진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감정이판단을 이성적으로 조종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감정을 이렇게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혁신적인 결론이었는데,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감정이 이성을 가로막고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언어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두가지 답이 있다. 짧은 답변은, 약 6,000개 정도라는 것이다. 긴 답변은, ‘언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언어학자들이 ‘독일어‘ 혹은 ‘베를린어‘ 등을 나누어생각하는 것이 애초에 타당한지 의문을 품는다. 그보다는 개인어,
즉 각 개인 고유의 언어 습관을 연구하는 편이 더 유용하고 보람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두 사람이거의 비슷하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뭉뚱그려서 "두 사람은 독일어로 말하고 있다"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그 이상의 정보는 도출하지못한다. 얼핏 과장되어 보이는 이 주장은 세상에 만연한, 하지만 불확실한 의미론에 대항하는 예방책이다. 의미론에 따르면 언어는 추
‘상적인 ‘기호 체계‘로서 독자적으로 활약한다.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려면 우선 언어적 의미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 사용론자들은 ‘암시적 규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특히 미국의 언어철학자 로버트 브랜덤Robert Brandom이 주장한 것이다. 브랜덤에 따르면 언어는 규칙적이며 규범적이다. 언어사용에 ‘옳음‘과 ‘그름‘이 있기 때문이다.

어원이론에 대해 더욱 전반적으로 반박해보자. 각 단어의 역사를모두 꿰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우리는 모두 그 단어가 무슨뜻인지 안다. 즉 어원학 지식이 없어도 언어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게다가 조상들이 같은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도 상관없다.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를 현재 우리가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네‘, ‘아니오‘라는 표현은 ‘진실‘과 ‘거짓‘이라는 표현이나 마찬가지다. 콰인이 말했듯이 이 보조수단 덕택에 연구자는 미지의 언어세계의 문을 열고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문장 구조에 대한 명제를실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어는 고립되어 있을 때 아무런의미를 갖지 못하며, 완전한 문장 속에 있어야만 의미를 갖는다.

"어떤 문장을 이해한다는 건 그것이 사실일 때가 어떤 경우인지아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가 단어를 보고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은 오로지 그 단어가 전체 문장의 사실성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뿐이다. 그것이 그 단어의 의미다.

말하자면 형식적인 의미론은 언젠가 경계를 맞닥뜨린다. 어쨌든의미론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적인 의미다. 각각의 단어의 의미가문장의 의미에 기여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서로의 의사소통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학과창작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암시와 풍자, 은유, 다의어, 유머, 말장난 등을 생각해보라. 이런 현상은 화용론, 즉 언어 사용 이론과 관련이 깊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이렇게 창의적이고 생산적이다. 언어는반복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의 한 부분을 다른 상황에서 사용하거나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왕자‘는 ‘우울한 왕자‘가 될 수있고, 다시 ‘우울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왕자‘ 혹은
‘우울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만 이해받은 적은 없는왕자‘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 머릿속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부위는 마치 프로그램처럼 기나긴 문장을 만들고 가공한다. 촘스키의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모든 언어의 문법이 똑같은 구조를 기반으로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로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보편문법이다.

‘모든 것에는 저마다 자리가 있다‘는 말을 고차원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내용은 똑같다. 그는 후기 작품에서 더욱 창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통찰이 번쩍임이 되고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져목격되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기술의 위협에 대해서는 몰아세움Gestell13 이 위험으로서 존재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이데거에게 친숙하지 않은 유머나 아이러니와 같은 언어유희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견해에 덧붙여 이야기를 꾸며내는 유희에서는나쁜 철학만이 탄생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를 겨냥하지 않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언어가 ‘휴가를 떠나면‘ 철학적 문제들이 발생한다."

일신론자들은 신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초인, 다른하나는 추상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화를 내고 귀 기울여 듣고 용서하기도 하는 인격적인 신은 인간이라는 견본을 무궁한 존재로 확장한 것이다.

수많은 유일신 종교에서 신은 여러 측면이 조화된 존재다. 신은이 세상의 창조자이자 도덕적 권위자이자 광대하고 인간으로서는이해할 수 없는 정신이자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는 존재이자 현명한 아버지로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우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존재다. 종교인이 되려면 이런 존재가 필요한 걸까? 신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우리는 과연 종교를 갖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먼저 탐구해야 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영성과 종교적 믿음이 같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 헬멧을 쓴 사람과 교회에 가는 사람은 각기다른 것을 체험한다. 두꺼비의 피부선 분비물에는 DMT가 들어 있는데, 이것을 핥는 행동과 기도가 똑같은 체험을 불러일으키지는않는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영적인 감정이 발생하는 데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이 요소란 이 세상의 발생과 질서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가정, 권위자의 존재 인정, 더 높은 감각에 대한 바람 등이다.
이런 요소는 베일에 싸이고 신비로운 감각이 아니라 복잡한 사고과정에서 나타난다. 많은 유신론자들이 신의 현존을 기꺼이 증명하려고 하지만 신을 느꼈다는 예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도과연 우리는 신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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