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인 논쟁은 중세 시대 영국의 대주교이자 신학자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캔터베리의 안셀름‘이라고도 불림)가 시작했다. 논쟁의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전능하며 모든 이들에게 자비로운 완벽한 존재라는 개념 혹은 설명을 알고 있다. 이런 종류의 현존하는 존재는 현존하지 않는 존재보다 완벽하다. 그러므로 완벽한 존재라는개념 뒤에는 그 존재의 현존이 따라온다.
만약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신을 창조했으며, 도대체 누가 신을 창조한 존재를 창조했다는 말인가? 이렇게 질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것이 우주론적 논쟁의 함정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주론적논쟁은 우주의 탄생에 대한 논쟁도 아닐뿐더러 신이 현존한다는 증거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근거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을 설득할 뿐이다.
때때로 인간이 신과 직접 연결되기도 한다. 신은 언제나 선택된자들을 골라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의문은, 어째서 이런 회견이 늘 대중들 앞에서가 아니라 조용하고 작은 방에서만 이루어졌느냐는 것이다. 신의 의사소통 방식은 규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미국의 전 대통령 중 한 명은 신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계시를 내려 이라크를 상대로 국제법에 어긋나는 전쟁을 일으키도록 명령했다고 말했으며, 이 전쟁의 결과로 약 1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했다. 우리는 당연히 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지만, 이런 사건은 깨달음의 원천이 상당히 임의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영적인 감정을 품었거나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사람은 그것을 기반으로 전체 세계상을 구축하고 싶은 것인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물어야 한다. 론 하워드 Ron Howard 감독의 2001년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존 내쉬John Nash가 조현병을극복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어떤 사람들을 보지만 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이 몇년 동안 나이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로서도 매우 뛰어난 작품이지만, 이성이 비이성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철학자 헤르베르트 슈네델바흐Herbert Schnädelbach는 2000년에주간지 《디 차이트》에 게재한 <기독교의 저주>라는 기사에서 신 없이 모든 것을 주제화한다는 격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반대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격분했고 논쟁은 파렴치하고 궁색하게치달았다. 슈네델바흐는 원죄라는 기독교적 윤리가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분명히 말했다. 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지옥이니 묵시(아포칼립스)니 하는 상징적인 폭력 또한부당한 것이다. 슈네델바흐에 따르면 십수 세대에 이르는 사람들이이런 ‘경악스러운 환상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 그는 그러므로 기독교의 가장 큰 축복은 그것이 사라지는 데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 단계가 지나가면 본격적인 수면, 즉 눈이 빠르게 움직이는 렘수면과 눈의 움직임이 잦아들고 맥박도 낮아지는 논렘Non-REM 수면이 나타난다. 처음에 사람들은 정신이 렘수면 단계에서만 활발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우리의 정신은 조용히 쉬는 때가 없다는사실이 밝혀졌다. 다른 수면 단계에서도 우리는 꿈을 꾸지만, 꿈이그림처럼 자세한 경우는 드물다. 꿈속에서는 감정과 생각이 우세하다. 사고의 과정은 대개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때때로 강제적일때가 있다.
독일계 미국인 철학자 아돌프 그린바움Adolf Grinbaum 이 요점을짚었다. 해석이 그럴듯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고 해서 꿈이 의미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 더 첨예하게 다듬으면, 꿈에 관한 글이 언어적 기호, 즉 문자로 쓰였다고 해서 꿈 자체가 상징이라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하늘을 나는 꿈이 성관계를재해석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늘을 나는 꿈이 본능적인 신체적 환각이며 렘수면을 할 때의 근육 마비로 인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뇌의 운동중추는 근육으로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명령이 목표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근육이 긴장하는 자극이나 느껴지는 저항이 없기 때문에 서로 반대되는 신호를 하나로 통합하는 메커니즘이 발동된다. 그래서 몸이 가벼워지거나 중력을 잃은 것 같은 환각이 발생한다. 혹은 몸이 마비나 마취된 것 같은 환각이 발생하기도 한다.
스팬드럴은 건축 용어로, 아치의 양편과 위쪽에 있는 삼각형 및역삼각형의 공간을 가리킨다. 고대의 호화로운 건축물을 보면 스팬드럴 부분에 대개 화려한 조각이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를 잘보여주는 예시가 이슬람 사원이나 인도의 타지마할, 그리고 유럽의르네상스 시대 건축물이다. 하지만 이런 건물 장식은 그저 여백을채우기 위한 것으로, 다른 목적은 없다. 다리나 보도, 문, 사원 같은건축물은 아무런 장식이 없어도 제 기능을 한다. 플래나간에 따르면 꿈은 수면의 스팬드럴이나 마찬가지다. 꿈은 무의식으로 빚어진장식품이며 아무런 기능이 없다.
우리 힘 속에 행위가 있는 곳에 단념도 있다." 현대철학에서 ‘행위의 자유‘가 언급될 때는 쇼핑이나 약물 오남용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논의가 진행된다. 자유를 주제로 토론할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자유롭지 않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논의를 과격화한다. 예를 들어 숨 쉬기, 모든 생각, 모든 산책 모든 대화가 자유롭지 않을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 전에 우선 행위란 무엇인지 파헤쳐야 한다.
행위와 자동증 Automatism을 가장 잘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는 것은 행위다. 즉 스스로 몸을 움직이거나 스스로 생각을 이어간다면 행위다. ‘의도적으로 한다‘는 말은 ‘고의로 한다‘는 말과 같다. 어린아이들은 일찍부터 이것을 배운다. 아이들은 "일부러 그랬잖아!"라고 자주 말한다. 부모들은 "일부러 그랬니?"라고 자주 묻는다. ‘의도적으로‘, ‘고의로’, ‘일부러’는 모두 우리가 무언가를 ‘어떻게‘ 하는지를 나타내는 방식이자 행위의정확한 정의다. 이때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무언가를 의도하거나계획을 세운다. 단 ‘의도‘와 ‘의도적으로‘는 어원은 같지만 뜻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한다. 이들을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라고 하는데, 라틴어로 ‘liber‘는 자유를 뜻한다. 이들은 자유와 대립하는 것은 결정론뿐이므로, 세상만사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명제를 다루는 결정론을 직접 증명하거나반박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란 초자연적인 것혹은 비과학적인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장 보편적인 자연, 예를 들어 공간이나 시간 등을 다루는 철학 분야다. 형이상학적 명제는 관찰이나 실험 같은 경험적인 방법으로 근거를 댈 수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정말로 결정되어 있는지 여부를절대 알 수 없다. 다만 이 가정을 뒷받침하는 자연법칙이 과연 무엇인지는 탐구할 수 있다.
이세상우연이 자유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을비판하는 이들이 늘 하는 말이다. 이들은 "결정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구하려고 우연을 끌어들여야 한다"라고 덧붙인다. 우연으로는 그 어떤 가치도 더 잘 드러낼 수 없다. 만약 우리가하는 모든 일이 그저 동전을 던져 결정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행위의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세상에사는 사람들만큼이나 자유롭지 않다.
문제는 명백하다. 결정론의 반대는 비결정론Indeterminism이다. 하지만 비결정론이 곧 순전한 우연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비결정론적 세상에는 혼란이 가득할 것이라는 비난은 자유의지론자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연으로 자유를 수호할 수 없다. 그런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이 세상이 결정론적이지도, 혼란스럽지도 않으며 오히려 한 가지결말로만 결정되지 않았음에도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상만사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이 가능성들은 모두 지구에 생명체가 생겨나고 우리가 먼 미래까지 계획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질서는 절대적 필연성과 순전한 우연의 정중앙에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작가 알베르 카뷔Albert Camus를 비롯해 실존주의를 믿었던 사람들은 행위 속에 존재하는 우연적인 요소에 감명받았다. 우리는 모든 억압뿐만 아니라자신만의 근거에서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에 도달할수 있다. 프랑스어로 ‘무상행위Acte gratuit‘라고도 하는 완전한 자유의지 행위는 개인의 자유에서 가장 높은 단계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한편,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행위의 자유를 인정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논쟁을 접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소원을 직접 선택할 수 있을 때만 정말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소원은 사회에 의해, 환경에 의해, 관계에 의해, 유행에 의해, 유전자에 의해, TV 방송에 의해 혹은 다른 것들에 의해 결정되곤 한다. 우리가 직접 개입하지 않고 결정되는 것이다.
행위에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자유에 의문을 품을 수 있을 때가 바로 제약을 건너뛸 도약점이다. 오직 행위를 하는 존재만이 자유로울 수 있으며, 오직 자유로운 존재만이 행위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미 선택의 가능성이 행위라는 개념에 속해 있다. 선택지가 없는 존재는 행위를 한다고 볼 수 없다.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관련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들은 모든 것이 결정된 세상에서도 우리가 행위를 할 수 있다고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결정론적인 세상에는행위 하는 존재 대신 무엇을 하든 외계인 손 증후군 증상을 보이는로봇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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