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의견은 가장 그럴듯하다. 사회적 감정이 기본 감정과 구분되는 근거는 사회적 감정으로 인한 행동 표현이 문화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아이들은 선천적인 언어능력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독일어나 일본어를 배우듯이, 감정능력 또한 국가에 따라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연모는 슬픔이나 증오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경향이다. 사랑과 연모는 뜻밖에 우리를 습격하는 것이며 다른 감정보다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에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거의 모든 문화권의 민속 문학에도 우리가 ‘유럽적‘이라고 말하는 사랑과 관련된 모티프나 행동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리움, 친밀함, 욕망, 꼭 지켜야 하는 약속 등이다. 즉 문화적 이론이 중세 시대의 문학 트렌드로 미루어 실제 삶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사랑을 서구적인 파트너십의 전개 방식과 혼동하게 되었다. 서로 만나고, 의례적인 말로 호감을 사고, 영화를 보고, 요리하고, 촛불을 켠 분위기 있는 장소에서 식사하고, 키스하고, 성교하고, 교회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과정 전부가 사랑인양 착각하는 것이다.
다마지오와 그의 동료 연구진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감정이판단을 이성적으로 조종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감정을 이렇게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혁신적인 결론이었는데,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감정이 이성을 가로막고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언어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두가지 답이 있다. 짧은 답변은, 약 6,000개 정도라는 것이다. 긴 답변은, ‘언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언어학자들이 ‘독일어‘ 혹은 ‘베를린어‘ 등을 나누어생각하는 것이 애초에 타당한지 의문을 품는다. 그보다는 개인어, 즉 각 개인 고유의 언어 습관을 연구하는 편이 더 유용하고 보람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두 사람이거의 비슷하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뭉뚱그려서 "두 사람은 독일어로 말하고 있다"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그 이상의 정보는 도출하지못한다. 얼핏 과장되어 보이는 이 주장은 세상에 만연한, 하지만 불확실한 의미론에 대항하는 예방책이다. 의미론에 따르면 언어는 추 ‘상적인 ‘기호 체계‘로서 독자적으로 활약한다.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려면 우선 언어적 의미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 사용론자들은 ‘암시적 규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특히 미국의 언어철학자 로버트 브랜덤Robert Brandom이 주장한 것이다. 브랜덤에 따르면 언어는 규칙적이며 규범적이다. 언어사용에 ‘옳음‘과 ‘그름‘이 있기 때문이다.
어원이론에 대해 더욱 전반적으로 반박해보자. 각 단어의 역사를모두 꿰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우리는 모두 그 단어가 무슨뜻인지 안다. 즉 어원학 지식이 없어도 언어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게다가 조상들이 같은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도 상관없다.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를 현재 우리가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네‘, ‘아니오‘라는 표현은 ‘진실‘과 ‘거짓‘이라는 표현이나 마찬가지다. 콰인이 말했듯이 이 보조수단 덕택에 연구자는 미지의 언어세계의 문을 열고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문장 구조에 대한 명제를실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어는 고립되어 있을 때 아무런의미를 갖지 못하며, 완전한 문장 속에 있어야만 의미를 갖는다.
"어떤 문장을 이해한다는 건 그것이 사실일 때가 어떤 경우인지아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가 단어를 보고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은 오로지 그 단어가 전체 문장의 사실성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뿐이다. 그것이 그 단어의 의미다.
말하자면 형식적인 의미론은 언젠가 경계를 맞닥뜨린다. 어쨌든의미론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적인 의미다. 각각의 단어의 의미가문장의 의미에 기여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서로의 의사소통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학과창작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암시와 풍자, 은유, 다의어, 유머, 말장난 등을 생각해보라. 이런 현상은 화용론, 즉 언어 사용 이론과 관련이 깊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이렇게 창의적이고 생산적이다. 언어는반복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의 한 부분을 다른 상황에서 사용하거나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왕자‘는 ‘우울한 왕자‘가 될 수있고, 다시 ‘우울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왕자‘ 혹은 ‘우울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만 이해받은 적은 없는왕자‘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 머릿속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부위는 마치 프로그램처럼 기나긴 문장을 만들고 가공한다. 촘스키의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모든 언어의 문법이 똑같은 구조를 기반으로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로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보편문법이다.
‘모든 것에는 저마다 자리가 있다‘는 말을 고차원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내용은 똑같다. 그는 후기 작품에서 더욱 창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통찰이 번쩍임이 되고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져목격되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기술의 위협에 대해서는 몰아세움Gestell13 이 위험으로서 존재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이데거에게 친숙하지 않은 유머나 아이러니와 같은 언어유희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견해에 덧붙여 이야기를 꾸며내는 유희에서는나쁜 철학만이 탄생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를 겨냥하지 않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언어가 ‘휴가를 떠나면‘ 철학적 문제들이 발생한다."
일신론자들은 신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초인, 다른하나는 추상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화를 내고 귀 기울여 듣고 용서하기도 하는 인격적인 신은 인간이라는 견본을 무궁한 존재로 확장한 것이다.
수많은 유일신 종교에서 신은 여러 측면이 조화된 존재다. 신은이 세상의 창조자이자 도덕적 권위자이자 광대하고 인간으로서는이해할 수 없는 정신이자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는 존재이자 현명한 아버지로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우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존재다. 종교인이 되려면 이런 존재가 필요한 걸까? 신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우리는 과연 종교를 갖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먼저 탐구해야 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영성과 종교적 믿음이 같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 헬멧을 쓴 사람과 교회에 가는 사람은 각기다른 것을 체험한다. 두꺼비의 피부선 분비물에는 DMT가 들어 있는데, 이것을 핥는 행동과 기도가 똑같은 체험을 불러일으키지는않는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영적인 감정이 발생하는 데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이 요소란 이 세상의 발생과 질서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가정, 권위자의 존재 인정, 더 높은 감각에 대한 바람 등이다. 이런 요소는 베일에 싸이고 신비로운 감각이 아니라 복잡한 사고과정에서 나타난다. 많은 유신론자들이 신의 현존을 기꺼이 증명하려고 하지만 신을 느꼈다는 예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도과연 우리는 신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