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詩가 그리워
글씨를 써봅니다.
글씨를 읽어봅니다.
문득 내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어봅니다.
언젠가 잘라버린 내 팔,
베어진 그 부위의 기억이 소름돋습니다.
고통처럼 행복처럼 소름돋습니다.

그러면 다시 말해볼까.
삶에 관하여, 삶의 풍경에 관하여,
주리를 틀 시대에 관하여.
아니 아니, 잘못하면 자칭 詩가 쏟아질 것 같아
나는 모든 틈을 잠그고나 자신을 잠근다.
(詩여 모가지여,
가늘고도 모진 詩의 모가지여)
그러나 비틀어 잠가도, 새어나온다.
썩은 물처럼,
송장이 썩어나오는 물처럼.

답신을 기다리지는 않아요.
오지 않을 답신 위에
흰 눈이 내려 덮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응시할 뿐.
모든 일이 참을 만해요.
세포가 늙어 가나봐요.
가난하지만이 房은 다정하군요.
흐르는 이 물길의 정다움,
물의 장례식이 떠나가고 있어요.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내가 이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내가 꿈속에서 다시 한번만 돌아누울 때까지
내가 내 시야를 스스로 거둘 때까지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일찍이 나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하나이지만,
잠시 눈 감으면 다시 닫히는 벽,
다시 갇히는 사람들.
갇히는 것은 나이지만,
벽의 안쪽도 벽, 벽의 바깥도 벽이지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나는 나를 모르고
무지한 돌멩이처럼 채이면 차이는 대로
잠시 굴러갈 뿐, 굴러다가 멈출 뿐,
이 후반전 인생은맥도 긴장도 없이,
그러나 얼마나 두려운가,
속살 밑의 속살이 속살 위의 속살이 모르게
저 혼자 울부짖는.

미처 깨어나지 못한
내 머릿속 공장에서는 뇌세포들이
샛된 새소리들을 실[M] 삼아
꿈과 생시를 넘나들며
황홀한 환상의 숲을 짜고 있다.

창가에서
창가의 無의 침상에서
나는 한평생을 손짓으로
흘려, 흘려보낸다.

오늘 밤 깊고 깊은
골방의 심연에서
죽음은 불을 밝힌다.
불을 켜도 골방의 내부는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죽음만이 홀로
심장의 불을 켜들고
환히 녹으며 타오른다.

유혹이여 그때 스며들지 않았겠는가.
유혹이여 그때 스며들고 싶지 않았겠는가.
나는 안다너의 유혹에 내가 굴복했음을,
나의 유혹에 마침내 너의 유혹이 굴복했음을.

심혈을 기울여 해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한 사람이 죽고
심혈을 기울여 지구가 돈다, 돌 때,
나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계를 내다보고

당신의 외로움이 날 불러냈다.
내 그리움이 당신을 불러냈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만나찬란하구나.
이 밤의 숱한 슬픔의 천적들이 만나
다정히 꼬리를 깨물고 깨물리우는
이 밤 슬픔의 불꽃놀이여.
當代의 當代의 슬픔의 집합들이여,

우리 서로 비밀스런 추억을, 비밀스런 치욕을
아파라 아파라.
서로 몰래 밟으며, 짓밟으며

굴복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워
가장 강한 강함이든
가장 약한 약함이든
그것에 굴복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워

이 허약한 난간에 기대어
이 허약한 삶의 규율들에 기대어
내가 뛰어내리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내가 뛰어내려야만 하는
이 삶의 높이란,
아니 이 삶의 깊이란.

그리하여 이제 휘황한
고통의 춤은 시작되고,
슬픔이여 보라,
네 리듬에 맞추어
내가 춤을 추느니
이 유연한 팔과 다리,
평생토록 내 몸이
얼마나 잘
네 리듬에 길들여졌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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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혼자 지낸 이후에 내가 그 수치심을 어떻게느꼈는지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건 잘된 일이었다. 나는 혼자 사는 내 삶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이렇게 혼자 살게 될 것 같다고, 그리고 롤랑 바르트가 언급한 바 있는, 심장이 메마른 상태인 아케디아 같은 느낌을받았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파마라에서 뭔가가 내마음을 움직였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약간 느슨해져 있었다. 물론 팬데믹으로 인해 외롭게 지내는 동안 돌이킬 수없어 보였던 진실은 여전히 진실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강도는 조금 약해졌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말할 수 없었다. 그 삶이 실제로 깔끔하게 모범 사례들에 들어맞는지 아닌지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내게 선물해 주었다. 바로 확신이었다

인간은 원래 늘 외로운 존재였다. 인간은 외로움을 언제 어디에서나 느꼈기 때문에 기를 쓰고 이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외로움은 근대나 현대에 들어와 생긴 현상이아니다. 과거 시대와 문화에 대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
어떤 신앙적, 종교적, 사회적 이상향을 과거에 투영하든 상관없다. 이미 철학과 문학에서는 외로움이 늘 거론되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외로움은 피할 수 없는 실존적 경험이다. 어쩌면 꼭 필요한 경험이기도 하다.

요즘은 주로 ‘셀프케어 Self-Care‘라는 용어로 사용되는자기관리의 개념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다. 셀프케어라는 용어는 이제 우리 시대의 핵심적 자기 보수의 기술로 격상했을 뿐 아니라 자율 최적화라는 개념을 상당 부분대체했다. 현재의 셀프케어는 결코 급진적이지 않다. 오히려 집합 용어로서 스파를 비롯해 소셜미디어 다이어트, 아유베다 요가, 명상하기, 치료적 개입에 이르는 모든 행동을아우르고 있어 파악하기도 힘들고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다. 포괄적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을 의미하는 셀프케어는 오늘날 어디에나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으로는원래 우리가 세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셀프케어를 행하지 않는 게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놀랍게도 동시대인들이 하는 셀프케어의 핵심은 대부분 미국의 서정시인이자 수필가이자 정치적 행동주의자인오드리 로드한테서 가져온 것이다. 몇 주 동안 나는 오드리로드의 책을 다시 읽었다. 그녀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일기 에세이 《빛의 폭발: 암과 함께 살아가기》의 에필로그에서 셀프케어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했다.

그건 단순히 세상을 조금씩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더 나은곳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살아남는 것 대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관리는 철저하게 급진적인 이념이다.

모든 정신적 작업은 육체에서 시작된다.

팬데믹 시기에 경험한 바에 의하면 나는 디지털로 연결되는 관계들이 언젠가 우리 인간들의 실제 관계를 대체할 거라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린다. 전화로 혹은 줌으로 나랑 대화를 나눈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제일 그리워한 것은 사람들이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명확한 격리 상태, 명확한 외로움에 대해 하소연했다.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거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확실하게구축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모두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아마 우리 같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설령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젠98가는 그것을 수용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적어도 철학자 오도 마쿼드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에 따르면, 외로움의핵심은 그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외로움을 다스리는 우리의 능력, 즉 ‘외로움 처리 능력‘이다. 마쿼드는 ‘혼자 살 수있는 힘‘ ‘혼자인 것을 견딜 수 있는 능력‘ ‘외로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있을 때 비로소 정말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했다.

진실은, 고통의 감정들 역시 우리를 위해 무언가 선물을 준비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건 힘들다. 그리고 고통의 감정들에 사로잡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안간힘을 쓸 때는 그 감정들을 쉽게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고통의 감정들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배우지못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심리학자 클라크 E. 무스타카스는 외로움이 그것이 가져다주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항상 매우 긍정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몽테뉴를 잇는 수많은 철학자가 자기 인식에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이런 형태의 외로운 독백이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외로움 없이는 묵상하는 삶vita contemplativa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제야 비로소 어쩌면 우정의 유일한 원칙을 깨뜨린것은 바로 나였을지 모른다는 것을 명확히 깨달았다. 우정은 사회적 강요나 제도화된 의무가 아니라 자유를 바탕으로 한 관계이다. 친구는 나 자신의 소망과 기대, 혹은 요구에 따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 놀라운 자유야말로 친구 관계가 유지될 수있는 조건이다. 나는 자크 데리다가 우정의 사랑 선언이라고 했던 바로 그것을 무시했다. "나는 너를 떠날 거야. 나는그렇게 하고 싶어."

눈가에서 전에 없던 주름살이 몇 개 눈에 띄었다. 몇 분 동안 나는 뚫어져라내 얼굴을 쳐다보며 그 형태를 관찰했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피부를 살살 문지르며 주름살을 폈다. 그런데 서서히 당혹감이 물러가고 평온함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주름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주름살은 내 모든경험의 표식이었다. 주름살은 나의 경솔했던 행동들과 작년의 모든 심리적 기복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끝끝내 버텨내 이제는 지울 수 없는, 내 삶의 일부가 된 현실의 흔적이었다. 주름은 내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심지어 주름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다.

역사상 최초로 겨우 일 년 만에 위험한 바이러스의 백신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상상도 못 했던 의학적 발전에 감사하는 마음 대신 절망감만 커졌다. 몇몇 소수의 국가만 자국민들한테 더 일찍, 그리고 더 빨리 백신을 접종시키는 데성공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세상이 최고의 특권을 가진사람들한테 맞춰서 돌아가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사람들은 자신이 두 번째 계급으로 밀려나는 걸 참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희망의 빛이 하늘을뒤덮은 잿빛 구름을 뚫고 나왔다.

몇 년 전 어느 지인이 내게 사람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자꾸 가르치려 들었다. 마치 자기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만나기만 하면 그 말을하는 바람에 나는 오히려 반감이 들어 제대로 듣지 않았다.
모든 문제는 모름지기 충분히 노력하고 스스로 방법을 찾고 제대로 된 발걸음을 내디디고 최선을 다하면 잘 해결될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팬데믹의 압박 속에서 비로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불확실한 소식을 듣고도 무기력해지지 않고 그 소식들에 귀를 기울이고 계속 삶을 이어나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 방법이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정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미래를 믿어야 하고 미래를 위해일해야 하지만 삶을 온전히 다 쓸 수 있는 것은 단지 현재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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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자신의 책 《우정의 정치학》에서 두 사람이 강조한 동질성 개념, 즉 ‘다른 자아‘로서의 우정이라는 개념이 철학적 관점에서 얼마나 문제가되는지 규명했다. 데리다는 우정에 대한 대부분의 고전적담론이 다른 사람, 즉 동일한 성향을 가진 - 그리고 동성의-두 사람 사이의 합일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동질성‘ ‘동성애‘ ‘동등한 가문 출신, 태생부터 동일한 공동체에의해 형성된 친화력‘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뜻이다."

서양 정신사Geistesgeschichte는 상류층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 간의 우정이 아닌 것은 전부 무시하고 폄하하고 조롱했다. 모든 증거에 반하는 폭력적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아마도 이런 우정이 가부장적 지배 구조에 위협이 될 거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또한 동질성에 근거하지 않고 삶의 다양성을 찬미하는 우정관이 어떤 폭발력을가졌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위트레흐트대학에서 진행된 비슷한 연구에서도 친구를 선택할 때 ‘제2의 자아‘라는 개념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수행하기는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학생들은 우정을 맺기 위해 서로 닮을 필요가 전혀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전혀 닮은 점이 없는데도 자신들이비슷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르시시스트의 재인식과 비춰보기 욕망에 굴복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한테서 자기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재발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만난 친구들을 돌이켜 보면, 친구의 숫자만큼이나 다들 개성이 제각각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고, 제약이 많은 사람도 있고, 사랑스러운 사람도 있고, 냉정한 사람도 있다. 흥분을 잘하는 사람도 있고, 재미없는 사람도 있다.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사람도 있고 짜증 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동일함의 이상에 부합하지 않고 누구와도 늘 화기애애하지는 않다. 우정이라는 단어의 의미론이나 시대에 뒤처진 우정의 이상은 현실 속 실제 우정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간단히 말해, 우정에는 그 어떤 규칙도 없고, 함축적이든명시적이든 어떤 규약도 없으며, 계약 같은 것도 존재하지않는다. 우정 문제에 관해서는 제재권을 가진 법도 없고 외부의 강제도 있을 수 없다. 단지 나와 상대방, 그리고 우리사이에 생겨나는 우정이 있을 뿐이다. 실재하는 것들만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우정은 완벽하게, 그리고 완벽하지 않게 우리의 삶에 얽혀 있다.

몇 주 동안 집에서 혼자 끙끙 앓으면서 계속 독서와 글쓰기로 소일하는 동안 나는 거의 살아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인생에 소중한 사람들과의 대화는 중단되지 않았다. 거리감과 친밀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 그들과의 대화로 세상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친밀함을 요구할 수 있었고 내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않았다. 근본적으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혼자 사는 삶에 외로움이 빠질 수 없다 해도 그런삶이 반드시 외로운 것은 아니다. 나는 혼자 있는 삶이 두렵지 않다. 종종 외로움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외로움을 결핍이 아니라 즐길 거리로 생각한다. 게다가 나는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내 집은 정확히 내 미적취향에 맞춰져 있다. 나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일상적 리듬을 따라가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내 취향에 대해 어느 누구한테도 변명할 필요가 없는 것도 좋다. 물론 나는 내 삶에서 무언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하지만 혼자 있는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프롬 라이히만에 의하면, 이런 회피 전략은 정신치료과정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외로움은 상대방 곁에 있을 때소위 ‘전염의 공포’라는 특별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심리치료사들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아주 미약한 외로움에 시달릴 때조차 자신의 외로움을 이야기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외로움이 사람들과 충분히 대화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비밀이 되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충격적인 뉴스들을 검색했다.
특히 예전에 살아본 적이 있거나 한때 체류했던 국가의 뉴스들을 찾아봤다. 무능한 정치로 인해 많은 국가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에서는 위기 정책이 과거보다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듯했다. 뉴욕과 런던에 있는 친구들이 걱정됐지만 간간이 주고받는 이메일과 통화는 아무런 힘이없었다. 한때 내게 몹시 중요했던 뉴욕과 런던의 삶이 돌이킬 수 없는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클라인은 외로움을 느낄 때 종종 수반되는참을 수 없는 감각상실 현상에 대해 심리분석적 측면에서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혼자 던져졌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정신은 이 불가피한 실존적 외로움을 통찰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이정말로 이해받고 있고 자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다. 클라인은 이런 판타지가 붕괴되면서, 즉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허구가 무너지면서 외로움의 고통이 생겨났다고 했다.
또한 그 고통은 우리가 믿고 있던 판타지가 실은 허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나는 때로는 비교적 잘 대처했고, 때로는 잘 대처하지못했다. 어쩌면 그건 내가 느낀 외로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질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 소중한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경멸감으로 예방수칙을 철저히 무시하고 팬데믹을 가속화시키는 사람들에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아무튼 예외적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나는 끝없는 임시방편 조처들에 지쳐 비틀거리고, 숨을 죽인 채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특히 혼자 남겨졌을 때 힘들다. 언젠가는제 삶에서 늘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믿었던 친구한테서두 번째, 세 번째 줄로 밀려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것을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다. 입장을 바꿔 내가 그 상황이라도 비슷하게 했을 테니까. 세월이흐름에 따라 변하는 게 모든 우정의 속성이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혼자 사는 사람의 인생 전체는 폴린보스가 말한 ‘모호한 손실‘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는 없는, 또는 아직은 없는 파트너 때문에 슬퍼한다. 그들은 확신과 슬픔, 강박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응급처치 차원에서 둘이 함께하는 삶이라는 이념으로부터 결별을 시도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보류한다.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혼자 사는 삶을 고착시키는 발걸음을 내디디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친밀과 사랑에 관한 판타지에서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다. 부족하기는커녕 오히려 판타지 과잉 상태였다. 하지만 모호한 손실들과 포기해야 했던 인생 계획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내게 꼭 필요한 판타지들조차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판타지들을 계속 품고 가느니 차라리 그것들과 결별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게 더 의미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물론 나는 희망이 없다는 말이 내가 느낀 바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자문했다. 아무튼 나는 상황이 더 막히고 더 절망적인 것 같이 느꼈다. 이와 관련해 롤랑 바르트가 그의 책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에서 도입한 ‘아케디아Akedia‘라는 개념이 내 가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바르트는 원래 기독교에서 유래된 이 단어를 ‘답답함‘ ‘괴로움‘ ‘메마른 심장‘으로 해석했다. 그에게 아케디아는 사랑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흥미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는 아케디아를 사랑에 대한 ‘무관심과 사랑의 ‘무능력‘으로 정의하고 이 상태를 보다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어떻게 내 삶의 관대함으로혹은 사랑으로 돌아가야 할지 몰라서 두려워하는-
것. 어떻게 사랑하지?" 내가 느낀 게 바로 그거였다. 내가자문했던 것도 바로 그거였다.

나는 그건 동성애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믿는다. 여성 동성애자든남성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트랜스젠더든 상관없이 그는우리 같은 많은 사람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인다. 종종 아무리 좋은 의도였더라도 우리가 젊었을 때 자주 듣던 경고였다. 우리의 이질성이 우리를 사랑 없이 혼자서 살아가게할 거라는 이야기 말이다.

특히 동성애자들의 삶에서 수치심은 단순한 하나의 감정 이상이다. 이브 코소프스키 세지윅은 수치심을 일종의자유로운 급진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수치심이 자신의 몸에 대한 우리의 이해, 특정한 태도, 우리의 감정과 욕정 등거의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의 의미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세지윅은 동성애자의 수치심이 우리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의방식까지 규정한다고 했다."

수치심은 감출수록 더 커진다. 란차로테섬에서 나는처음으로, 팬데믹으로 인해 오랫동안 혼자 지내면서 겪은삶의 문제는 내가 오로지 내면의 대화에만 집중한 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마음속으로 나 자신을 비난하고 트집 잡고 창피해하고 있었던이다. 혼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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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 나는 종종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유명한명제 ‘거대 서사의 종언‘을 떠올리곤 했다. 리오타르는 이미 칠십 년대 말 자신의 책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지식‘
을 제시했다. ‘거대 서사의 종언‘이란 문구는 소설의 형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신뢰상실을 표현한 문구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서사‘는 정치와 철학이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두 영역 가운데 어느 한쪽도 자신에게 그 자체로 구속력 있는 ‘합리성‘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의 불행이 개인적 실패로 규정될 때가 많다. 실제로는 전적으로 세상과 사회에 대한 타당한 반응일수도 있는데 말이다. 애인이 없는 것 또한 일반적으로 개인의 실패로 인식된다. 매력 결핍, 경제적 빈곤, 정신적 불안정 등으로 보는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한테는 늘 이런 식의 억측이 따라다닌다. 특히 동정심과 혐오, 저들보다는 내가 낫지, 하는 은밀한 우월감을 얼굴에 내비치는 사람들 역시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정은 오로지 자유의지에 근거한 유일한 관계이다.
두 사람은 상호 동의하에 다양한 수준으로 교류하고 함께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배려한다. 우정은 태어날 때부터 나름의 의식과 의무를 가진 가족 관계와는 다르다. 또한우정은 일반적으로 배타성을 기초로 한 연인 관계의 규칙들과도 전혀 상관없다. 우정은 연인 관계에서 중시되는 욕망과도 전혀 상관없다. 우리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고려해 친구를 선택하며, 반대로 나 역시 그들의 기준에 의해친구로 선택된다.

우리가 가족 관계나 연인 관계와 비교해 우정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우정을 명확히 규정하는 게매우 힘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직 사랑만이 거대 서사를 요구할 수 있다. 우정은 작은 서사들을 수반한다. 미리만들어진 모범 사례들을 마지못해 따라가는 수많은 작은서사들 말이다.

하지만 과연 로맨틱한 연애 없이 혼자서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친밀함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과연 우정으로 달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삶의 모델이 과연 사람들한테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을까? 언젠가 친구들 대부분이배우자나 반려자를 찾고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바꿔 말해, 아프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고 독신생활을 꾸려가는 법을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이게 바로 답을 찾지 못한 나의 질문들이었다.

우리가, 특히 혼자 사는 사람이 우정을 쌓는 것은 아마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현실의 발판을 잃지 않기위해서, 시대의 변화와 증가하는 엔트로피에 조금이라도대항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일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또한어쩌면 우정은 자신감과 포기와 수용의 연습이 아닐까? 위압적인 세상의 현실에 직면해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미래를 그려보려고 할 때 혹시 우정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잃고 싶지 않을 때 우정이 아주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정말 내가 그렇게 믿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단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자부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 몇 가지는 치유 효과가 있다. 다른 것들은 인생에서 거의 극복하기 힘든 장애가 될 수 있다. 나는 내 일에 자부심을 느낄 때가 극히 드물다. 일이 내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는지와는 상관없다. 내가 그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도 상관없다. 내가 쓴책이 출간되고 나면 나는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지 않다. 내글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쓰였다는 느낌이 들기 전까지 적어도 몇 년 동안은 그렇다. 또는 시간이 아주 많이흘러 어떤 면에서는 실제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 글이 적힐 때까지는 말이다. 나는 이루고자 했던 많은 것들을 성취했고 그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또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룩한 삶에 대해 실제로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때로는 그런 행동들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때로는 그게 강박관념이나 조증으로 변해 정신 상태를 무너뜨리려 한다. 아직 본격적인 우울증이라 할 수는 없지만 우울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 상태가 몇 주 내지 몇 달 동안 내 삶을 완전히 장악해버린다. 그 단계가 되면 갑자기 모든 게 시들해진다. 일 년중 가장 긴 시간 동안 나를 지탱해주던 자기 환상이 깨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삶의 근거로 삼고 있는 고의적 망각에 실패한다. 어떤 상태인지 더 잘 설명해 보자면,
그건 마치 중요한 판타지를 상실한 것 같은 기분이다. 결국나는 혼자 사는 내 삶이 좋은 삶이라는 믿음을 버린다.

호숫가에 자리한 보세주르라는 이름의 호텔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두 명의 호텔 공동대표는 ‘좋은 체류‘라는 뜻의 이름이 약속한 모든 것을 지켰다. 나는그들의 관대함에 감동했다. 그들은 내게 집기가 구비된 작은 사무실과 호수와 산이 보이는 전망 좋은 침실을 제공했다. 아침이면 침대에 누운 채 해가 뜨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발코니에 앉아 담배를 피울 때면-사 년 전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이래 아직 금연에 성공하지 못했다―잔잔한 호수의 수면 위를 유유히 스쳐가는 커다란 흰색 증기선이 보였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겨울 하늘과 눈 덮인산맥을 배경으로 필라투스산과 뷔르겐스톡, 그리고 리기산을 향해 항해 중인 유람선이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이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 있다는 것에 절로 감탄이나왔다. 정말이지 엄청난 위로였다.

친밀하거나 밀접한 사이가 아닌 관계들 역시 우리와우리의 심리적 균형에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친밀한 친구와 가족, 동반자로 구성된 범주 안에서만 사는게 아니다. 우리는 훨씬 더 넓은 사회적 범주들 안에서 활동한다. 일반적으로 ‘네트워크‘라고 부르는 이것은 때때로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일상에 생각보다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피어발트슈테터호수 호숫가에서 체류할 때 만난 나의이 새롭고 작은 ‘네트워크‘에서 특히 좋은 인상을 준 태도들 가운데 하나는 기본적이고 사려 깊은 친절이었다. 베를린의 일상에서는 종종 아쉽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친절은종종 지루하고 솔직하지 않은 태도라는 의심을 받는다. 게다가 왠지 고루하고 딱딱하고 시대에 뒤처진 개념 같아서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정신에는 맞지 않는다. 만약 사회가당연하게 구성원들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면 어쩔 수 없이필요한 사람만 친절한 사회가 될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이미 많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입혔다. 때로는 고의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부주의해서, 물론 나 자신도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었다. 내가항상 사람들한테 친절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상대방이 보여주는얼굴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절대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인생 행로를 걸어왔는지, 그들이 날마다 무엇과 씨름하는지 절대 알지 못한다. 겉으로만 보면 사람들은 늘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강해 보인다.

자존심 때문에 세상에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머지 자신은 고통을 전혀 안 느낀다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게 고통을 목도하고 그것과 씨름하기보다 훨씬 더 쉽다. 하지만 무릇 감정이란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느끼고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한다. 혼자 사는 삶은 때로는 아프고때로는 아프지 않다. 제대로 혼자 살기 위해서 때로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새로운 방법이 있을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때로는 호수나 산을 찾아갈 용기를 내야 한다. 겨울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어야 하고, 나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친절한 사람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자부심에 여러 종류가 있듯이 혼자살 수 있는 방법들 또한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외로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법이다.

우정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핵심 중 하나는정체성에서 드러나는 동질성이라는 개념이다. 나는 이것을대학 시절 첫 강의를 함께 들은 몇몇 친구들과의 만남에서경험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후로 늘 우정은 생각이같은 사람들, 즉 세상을 동일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살아오면서 비슷한 경험을 쌓고, 정치적으로도 동일한 입장을 대변하고, 심리적, 정서적 가치관과 전기적 배경이 비슷한 사람 간의 관계로 정의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진정한 우정은 ‘동질성과 일치‘를 통해 생겨난다. 즉 우정은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거꾸로‘친구’에게서 ‘분리된 제2의 자신‘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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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행동이 있는 반면에………… 사회가침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있다. 사회는 명명할 수 없는 이런 것들을느끼는 사람들에게 고독과 불행을 안겨준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서서히 그 침묵이 깨진다. 그 감정들이 이름을 하나씩 획득하고 마침내인정을 받게 되는 반면, 그 아래로 또 다른 침묵이 형성된다.
《세월》, 아니 에르노

아마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은 ‘도덕적 상처‘일 것이다. 이것은 종군기자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대한 연구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심리적 상처로 인해 현실이해에 장애가 생긴 것을 의미한다. 주로 심각한 사건을 함께 겪어야 했으나 본인은 개입할 수 없는 경우에 발생한다.‘ 비록 우리 삶이 전쟁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 가지 비슷한 딜레마가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러운 사건들을 추적하는데, 이때 대부분이 무기력에 빠진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나의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을나의 도덕적 기준에 대한 고통스러운 공격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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