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는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자신의 책 《우정의 정치학》에서 두 사람이 강조한 동질성 개념, 즉 ‘다른 자아‘로서의 우정이라는 개념이 철학적 관점에서 얼마나 문제가되는지 규명했다. 데리다는 우정에 대한 대부분의 고전적담론이 다른 사람, 즉 동일한 성향을 가진 - 그리고 동성의-두 사람 사이의 합일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동질성‘ ‘동성애‘ ‘동등한 가문 출신, 태생부터 동일한 공동체에의해 형성된 친화력‘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뜻이다."
서양 정신사Geistesgeschichte는 상류층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 간의 우정이 아닌 것은 전부 무시하고 폄하하고 조롱했다. 모든 증거에 반하는 폭력적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아마도 이런 우정이 가부장적 지배 구조에 위협이 될 거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또한 동질성에 근거하지 않고 삶의 다양성을 찬미하는 우정관이 어떤 폭발력을가졌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위트레흐트대학에서 진행된 비슷한 연구에서도 친구를 선택할 때 ‘제2의 자아‘라는 개념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수행하기는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학생들은 우정을 맺기 위해 서로 닮을 필요가 전혀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전혀 닮은 점이 없는데도 자신들이비슷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르시시스트의 재인식과 비춰보기 욕망에 굴복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한테서 자기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재발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만난 친구들을 돌이켜 보면, 친구의 숫자만큼이나 다들 개성이 제각각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고, 제약이 많은 사람도 있고, 사랑스러운 사람도 있고, 냉정한 사람도 있다. 흥분을 잘하는 사람도 있고, 재미없는 사람도 있다.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사람도 있고 짜증 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동일함의 이상에 부합하지 않고 누구와도 늘 화기애애하지는 않다. 우정이라는 단어의 의미론이나 시대에 뒤처진 우정의 이상은 현실 속 실제 우정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간단히 말해, 우정에는 그 어떤 규칙도 없고, 함축적이든명시적이든 어떤 규약도 없으며, 계약 같은 것도 존재하지않는다. 우정 문제에 관해서는 제재권을 가진 법도 없고 외부의 강제도 있을 수 없다. 단지 나와 상대방, 그리고 우리사이에 생겨나는 우정이 있을 뿐이다. 실재하는 것들만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우정은 완벽하게, 그리고 완벽하지 않게 우리의 삶에 얽혀 있다.
몇 주 동안 집에서 혼자 끙끙 앓으면서 계속 독서와 글쓰기로 소일하는 동안 나는 거의 살아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인생에 소중한 사람들과의 대화는 중단되지 않았다. 거리감과 친밀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 그들과의 대화로 세상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친밀함을 요구할 수 있었고 내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않았다. 근본적으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혼자 사는 삶에 외로움이 빠질 수 없다 해도 그런삶이 반드시 외로운 것은 아니다. 나는 혼자 있는 삶이 두렵지 않다. 종종 외로움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외로움을 결핍이 아니라 즐길 거리로 생각한다. 게다가 나는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내 집은 정확히 내 미적취향에 맞춰져 있다. 나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일상적 리듬을 따라가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내 취향에 대해 어느 누구한테도 변명할 필요가 없는 것도 좋다. 물론 나는 내 삶에서 무언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하지만 혼자 있는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프롬 라이히만에 의하면, 이런 회피 전략은 정신치료과정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외로움은 상대방 곁에 있을 때소위 ‘전염의 공포’라는 특별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심리치료사들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아주 미약한 외로움에 시달릴 때조차 자신의 외로움을 이야기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외로움이 사람들과 충분히 대화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비밀이 되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을 때 나는 충격적인 뉴스들을 검색했다. 특히 예전에 살아본 적이 있거나 한때 체류했던 국가의 뉴스들을 찾아봤다. 무능한 정치로 인해 많은 국가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에서는 위기 정책이 과거보다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듯했다. 뉴욕과 런던에 있는 친구들이 걱정됐지만 간간이 주고받는 이메일과 통화는 아무런 힘이없었다. 한때 내게 몹시 중요했던 뉴욕과 런던의 삶이 돌이킬 수 없는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클라인은 외로움을 느낄 때 종종 수반되는참을 수 없는 감각상실 현상에 대해 심리분석적 측면에서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혼자 던져졌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정신은 이 불가피한 실존적 외로움을 통찰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이정말로 이해받고 있고 자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다. 클라인은 이런 판타지가 붕괴되면서, 즉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허구가 무너지면서 외로움의 고통이 생겨났다고 했다. 또한 그 고통은 우리가 믿고 있던 판타지가 실은 허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나는 때로는 비교적 잘 대처했고, 때로는 잘 대처하지못했다. 어쩌면 그건 내가 느낀 외로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질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 소중한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경멸감으로 예방수칙을 철저히 무시하고 팬데믹을 가속화시키는 사람들에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아무튼 예외적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나는 끝없는 임시방편 조처들에 지쳐 비틀거리고, 숨을 죽인 채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특히 혼자 남겨졌을 때 힘들다. 언젠가는제 삶에서 늘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믿었던 친구한테서두 번째, 세 번째 줄로 밀려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것을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다. 입장을 바꿔 내가 그 상황이라도 비슷하게 했을 테니까. 세월이흐름에 따라 변하는 게 모든 우정의 속성이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혼자 사는 사람의 인생 전체는 폴린보스가 말한 ‘모호한 손실‘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는 없는, 또는 아직은 없는 파트너 때문에 슬퍼한다. 그들은 확신과 슬픔, 강박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응급처치 차원에서 둘이 함께하는 삶이라는 이념으로부터 결별을 시도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보류한다.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혼자 사는 삶을 고착시키는 발걸음을 내디디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친밀과 사랑에 관한 판타지에서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다. 부족하기는커녕 오히려 판타지 과잉 상태였다. 하지만 모호한 손실들과 포기해야 했던 인생 계획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내게 꼭 필요한 판타지들조차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판타지들을 계속 품고 가느니 차라리 그것들과 결별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게 더 의미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물론 나는 희망이 없다는 말이 내가 느낀 바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자문했다. 아무튼 나는 상황이 더 막히고 더 절망적인 것 같이 느꼈다. 이와 관련해 롤랑 바르트가 그의 책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에서 도입한 ‘아케디아Akedia‘라는 개념이 내 가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바르트는 원래 기독교에서 유래된 이 단어를 ‘답답함‘ ‘괴로움‘ ‘메마른 심장‘으로 해석했다. 그에게 아케디아는 사랑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흥미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는 아케디아를 사랑에 대한 ‘무관심과 사랑의 ‘무능력‘으로 정의하고 이 상태를 보다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어떻게 내 삶의 관대함으로혹은 사랑으로 돌아가야 할지 몰라서 두려워하는- 것. 어떻게 사랑하지?" 내가 느낀 게 바로 그거였다. 내가자문했던 것도 바로 그거였다.
나는 그건 동성애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믿는다. 여성 동성애자든남성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트랜스젠더든 상관없이 그는우리 같은 많은 사람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인다. 종종 아무리 좋은 의도였더라도 우리가 젊었을 때 자주 듣던 경고였다. 우리의 이질성이 우리를 사랑 없이 혼자서 살아가게할 거라는 이야기 말이다.
특히 동성애자들의 삶에서 수치심은 단순한 하나의 감정 이상이다. 이브 코소프스키 세지윅은 수치심을 일종의자유로운 급진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수치심이 자신의 몸에 대한 우리의 이해, 특정한 태도, 우리의 감정과 욕정 등거의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의 의미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세지윅은 동성애자의 수치심이 우리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의방식까지 규정한다고 했다."
수치심은 감출수록 더 커진다. 란차로테섬에서 나는처음으로, 팬데믹으로 인해 오랫동안 혼자 지내면서 겪은삶의 문제는 내가 오로지 내면의 대화에만 집중한 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마음속으로 나 자신을 비난하고 트집 잡고 창피해하고 있었던이다. 혼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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