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혼자 지낸 이후에 내가 그 수치심을 어떻게느꼈는지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건 잘된 일이었다. 나는 혼자 사는 내 삶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이렇게 혼자 살게 될 것 같다고, 그리고 롤랑 바르트가 언급한 바 있는, 심장이 메마른 상태인 아케디아 같은 느낌을받았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파마라에서 뭔가가 내마음을 움직였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약간 느슨해져 있었다. 물론 팬데믹으로 인해 외롭게 지내는 동안 돌이킬 수없어 보였던 진실은 여전히 진실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강도는 조금 약해졌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말할 수 없었다. 그 삶이 실제로 깔끔하게 모범 사례들에 들어맞는지 아닌지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내게 선물해 주었다. 바로 확신이었다

인간은 원래 늘 외로운 존재였다. 인간은 외로움을 언제 어디에서나 느꼈기 때문에 기를 쓰고 이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외로움은 근대나 현대에 들어와 생긴 현상이아니다. 과거 시대와 문화에 대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
어떤 신앙적, 종교적, 사회적 이상향을 과거에 투영하든 상관없다. 이미 철학과 문학에서는 외로움이 늘 거론되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외로움은 피할 수 없는 실존적 경험이다. 어쩌면 꼭 필요한 경험이기도 하다.

요즘은 주로 ‘셀프케어 Self-Care‘라는 용어로 사용되는자기관리의 개념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다. 셀프케어라는 용어는 이제 우리 시대의 핵심적 자기 보수의 기술로 격상했을 뿐 아니라 자율 최적화라는 개념을 상당 부분대체했다. 현재의 셀프케어는 결코 급진적이지 않다. 오히려 집합 용어로서 스파를 비롯해 소셜미디어 다이어트, 아유베다 요가, 명상하기, 치료적 개입에 이르는 모든 행동을아우르고 있어 파악하기도 힘들고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다. 포괄적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을 의미하는 셀프케어는 오늘날 어디에나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으로는원래 우리가 세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셀프케어를 행하지 않는 게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놀랍게도 동시대인들이 하는 셀프케어의 핵심은 대부분 미국의 서정시인이자 수필가이자 정치적 행동주의자인오드리 로드한테서 가져온 것이다. 몇 주 동안 나는 오드리로드의 책을 다시 읽었다. 그녀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일기 에세이 《빛의 폭발: 암과 함께 살아가기》의 에필로그에서 셀프케어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했다.

그건 단순히 세상을 조금씩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더 나은곳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살아남는 것 대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관리는 철저하게 급진적인 이념이다.

모든 정신적 작업은 육체에서 시작된다.

팬데믹 시기에 경험한 바에 의하면 나는 디지털로 연결되는 관계들이 언젠가 우리 인간들의 실제 관계를 대체할 거라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린다. 전화로 혹은 줌으로 나랑 대화를 나눈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제일 그리워한 것은 사람들이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명확한 격리 상태, 명확한 외로움에 대해 하소연했다.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거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확실하게구축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모두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아마 우리 같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설령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젠98가는 그것을 수용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적어도 철학자 오도 마쿼드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에 따르면, 외로움의핵심은 그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외로움을 다스리는 우리의 능력, 즉 ‘외로움 처리 능력‘이다. 마쿼드는 ‘혼자 살 수있는 힘‘ ‘혼자인 것을 견딜 수 있는 능력‘ ‘외로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있을 때 비로소 정말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했다.

진실은, 고통의 감정들 역시 우리를 위해 무언가 선물을 준비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건 힘들다. 그리고 고통의 감정들에 사로잡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안간힘을 쓸 때는 그 감정들을 쉽게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고통의 감정들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배우지못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심리학자 클라크 E. 무스타카스는 외로움이 그것이 가져다주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항상 매우 긍정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몽테뉴를 잇는 수많은 철학자가 자기 인식에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이런 형태의 외로운 독백이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외로움 없이는 묵상하는 삶vita contemplativa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제야 비로소 어쩌면 우정의 유일한 원칙을 깨뜨린것은 바로 나였을지 모른다는 것을 명확히 깨달았다. 우정은 사회적 강요나 제도화된 의무가 아니라 자유를 바탕으로 한 관계이다. 친구는 나 자신의 소망과 기대, 혹은 요구에 따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 놀라운 자유야말로 친구 관계가 유지될 수있는 조건이다. 나는 자크 데리다가 우정의 사랑 선언이라고 했던 바로 그것을 무시했다. "나는 너를 떠날 거야. 나는그렇게 하고 싶어."

눈가에서 전에 없던 주름살이 몇 개 눈에 띄었다. 몇 분 동안 나는 뚫어져라내 얼굴을 쳐다보며 그 형태를 관찰했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피부를 살살 문지르며 주름살을 폈다. 그런데 서서히 당혹감이 물러가고 평온함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주름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주름살은 내 모든경험의 표식이었다. 주름살은 나의 경솔했던 행동들과 작년의 모든 심리적 기복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끝끝내 버텨내 이제는 지울 수 없는, 내 삶의 일부가 된 현실의 흔적이었다. 주름은 내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심지어 주름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다.

역사상 최초로 겨우 일 년 만에 위험한 바이러스의 백신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상상도 못 했던 의학적 발전에 감사하는 마음 대신 절망감만 커졌다. 몇몇 소수의 국가만 자국민들한테 더 일찍, 그리고 더 빨리 백신을 접종시키는 데성공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세상이 최고의 특권을 가진사람들한테 맞춰서 돌아가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사람들은 자신이 두 번째 계급으로 밀려나는 걸 참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희망의 빛이 하늘을뒤덮은 잿빛 구름을 뚫고 나왔다.

몇 년 전 어느 지인이 내게 사람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자꾸 가르치려 들었다. 마치 자기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만나기만 하면 그 말을하는 바람에 나는 오히려 반감이 들어 제대로 듣지 않았다.
모든 문제는 모름지기 충분히 노력하고 스스로 방법을 찾고 제대로 된 발걸음을 내디디고 최선을 다하면 잘 해결될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팬데믹의 압박 속에서 비로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불확실한 소식을 듣고도 무기력해지지 않고 그 소식들에 귀를 기울이고 계속 삶을 이어나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 방법이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정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미래를 믿어야 하고 미래를 위해일해야 하지만 삶을 온전히 다 쓸 수 있는 것은 단지 현재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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