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작가들이 첫 문장도 쓰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무릇 스토리란 한꺼번에 나오는것이며 게다가 곱게 다듬어진 문장들로 처음부터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럴듯한 첫 문장조차 떠오르지 않으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고,
포기하고 만다. 그러지 말자. 그건 마치 고운 ‘본차이나‘ 도자기를 보고 감탄하면서 그 은은하고 섬세하고 정교한 자태가 한번에 완벽한 모습으로 짠!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형식이나 장르와 관계없이 스토리는 스토리"다. 하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유형이 있어서, 끌리고 공감 가는 장르가 있다.

혹은 무언가 전하고 싶은 요점과 관련된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작가 스티븐 킹은 소설 《언더 더 돔》과 관련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처음부터 이 소설이 오늘날 세계가봉착한 심각한 생태적 문제를 다룰 기회라고 생각했다."2또는 실제로 ‘만약에‘라는 가상적 질문에 처음 관심이 꽂혔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만약에 변호사가 아주 사소한 거짓말도 전혀 하지 못한다면?"(영화 <라이어 라이어>> "만약에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볼 수 있다면?"(영화 <멋진 인생> 등이다.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이걸 여기까지 끌고 온이유가 무엇인가? 이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맴도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왜 여기에 관심을 쏟는가? 내가 이 아이디어에끌리는 이유를 파고들어 보자. 답이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아도걱정하지 말자. 아니면 처음 드는 생각이 ‘음, 생각해 보니 왠지 낮잠을 자고 싶네‘여도 괜찮다. 정답이란 건 없다.

지금 구상 중인 스토리에 당신이 왜 관심을 쏟는지 한 페이지이내로 적어 보자. 정답은 없다. 무엇이든 머리에 떠오르는 이유를 적으면 된다. 유치해 보여도 좋다. 해 보면 자신이 관심을가진 이유가 애초에 생각했던 이유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점 없이는 글을 써 나갈 수 없다. 요점이 있어야 비로소 스토리에서 다룰 문제를 구체화해 나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주인공에게 그 문제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니 안심하자. 사실 거의 모든 스토리는 클리셰에서 출발한다. 클리셰란 진부한 주제, 너무 익숙해서 고리타분하게느껴지는 것을 뜻한다. 그걸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게 스토리의역할이다. 영국 문인 새뮤얼 존슨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작가의 가장 매력적인 능력 두 가지는 새로운 것을 친숙하게 만드는 것과 친숙한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스럽게 스토리의 형태가 떠오른다. 그것은 아마도 깊은 상실감, 막심한 후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과 그 여파에 관련된 스토리일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충분히 살을 붙이되 간단명료하게 ‘만약에‘를 적어 보자. 산만하고 어수선해서는 안 된다. 첫 시도가 엉망이어도 걱정하지 말자. 계속 시도해 가며 뭔가 구체적이면서 맥락과 갈등이 있고 의외의 결과를 살짝 암시하는 ‘만약에‘를 만들어 보자. 한마디로, 당신이 말하려는 요점이 전해지게끔 만들면 된다.

알다시피 스토리와 플롯은 전혀 다르다. 스토리가 먼저고,
스토리는 인물에서 나온다. 그것도 단 한 명의 인물, 즉 주인공에서 나온다. 다른 모든 인물과 사물은 주인공의 스토리에 쓰려고 만드는 것이다. 소설의 힘은 작가가 주인공 속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세상은 온갖 사건들로 북적거려서, 거의 언제나(특히 아침에 눈을 뜨고 난 직후에는 더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우리의 생존은 자기 주변의 혼란상을 잘 이해하는 데 달려 있다. 여기서 이해란 흔히 말하는 일반적·객관적의미가 아닌 실질적 · 주관적 의미의 이해로서, ‘이게 나한테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행인 점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상상해 볼 수 있는 기본정보가 이미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당신의 스토리가 전하려는요점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생각해 봤을 것이다. 이제 생각해 봐야할 질문은 ‘내면이 크게 바뀜으로써, 즉 내적 변화를 겪음으로써 그 요점을 구현해 줄 수 있는사람은 누구인가?‘이다. 그 사람의 내적 투쟁이야말로 이런저런 결단을 낳아 플롯을 밀고 나가는 힘이다. 스토리의 본질은세상이 주인공을 어떤 ‘사건‘ 속에 밀어 넣느냐에 있지 않다.
주인공이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있다.

잊지 말자, 플롯이 주인공을 제약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의 관계여야 한다.

주인공이 두 명, 때로는 세 명이나 네 명인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라 해도 잘 보면거의 항상 내가 말하는 ‘핵심 주인공‘이 있다. 다시 말해 스토리의 ‘진짜’ 주인공이 있어서, 독자는 은연중에 그 사람의 눈을통해 나머지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중심인물이 몇 명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도 잘생각해 보면 그중에서 ‘더 중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물이 한 명 있는 게 보통이다. 비록 모든 중심인물이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고, 충분히 구체화되어 있으며, 결말에 이르러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곰곰이 되짚어 보면 한 인물이 바로 떠오른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동안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소설속 모든 것의 의미는 결국 그 인물에 의해 정해졌다.

다시 말해, 당신의 주인공은 ‘어중간한‘ 지점에서 출발하지않는다. 아주 특정한 지점에서, 아주 확고한 신념을 안은 채 출발하며, 당신의 소설이 할 역할은 그 신념을 뒤흔드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신념이 무엇이고 여정이 무엇이며 예상을 어떻게 깨뜨릴 것인지 궁리하기에 앞서, 여정이 시작되기 전, 자신에게닥칠 일들을 까맣게 몰랐던 그의 모습을 알아야만 한다.

늘 그렇듯이, 주인공의 행동에는 내적인 이유가 얽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주인공의 행동보다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다. 그 간단한 원리를 절대 잊지 말자.

모든 극의 본질은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 해럴드 헤이즈

인간의 뇌는 의미를 찾는 기계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이면의 원리를 알아내려고 하는 본능이있다. 우리는 ‘왜‘를 알고 나면 ‘무엇‘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반면 대부분의 다른 동물은 세상을 겉으로 보이는 대로 받아들인다. 오로지 사건에 반응하면서 살 뿐,
앞일을 꼼꼼히 계획하는 일은 없다. 인간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다른 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끊임없이 겉모습 이면을파고들면서 앞일을 내다보는 데 도움이 될 정보를 열심히 찾고, 무슨 일이 닥치든 잘 헤쳐 나갈 수 있게끔 준비한다. 그런면에서 "왜?"라는 질문은 진화가 인간에게 선사해 준 가장 정밀하면서 간단하고 유용한 생존 도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 살 무렵이면 사실이 아닌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이 대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피상적인 ‘무엇‘을대략 이해하고 나면 저절로 관심을 옮겨 훨씬 더 흥미로우면서모호한 ‘왜?’를 묻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이 인간의 생존에 가장 요긴한 도구일 뿐아니라 작가가 가장 애용하는 도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작가가 인물의 행동에 깔린 이유를 모른다면 그다음 행동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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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도, 플롯도, 심지어 ‘감각적 디테일‘까지도, 소설 속의모든 요소는 전깃줄과 이어져야 비로소 의미를 갖고 독자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다. 주인공의 내적 투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미려하게 쓰였다 한들, 아무리 겉보기에극적이라 한들 소용없다. 스토리를 중간에 멈춰서게 하고, 독자를 사로잡았던 마법을 깨뜨리고, 독자를 현실로 다시 튕겨보낼 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밑그림blueprint‘은 플롯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개요가 아니라, 스토리를 이루는 내.
적 · 외적 층들을 처음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게 종합한 것이다. 당신은 밑그림을 만들면서 동시에 소설을 써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밑그림 내용의 대부분은 완성된 소설에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도 버릴 게 없다. 흔히들 글을 쓰기 전에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전 조사와는 다르다.
이것이 바로 독자의 넋을 빼앗고 세상 보는 관점을 바꿔 줄 소설을 쓰는 비결이다.

스토리는 그래서 무섭다. 우리는 살면서 매 순간 알게 모르게 스토리에 홀리고 변화를 겪는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작가에게는 성공의 열쇠가 바로여기에 있다. 스토리의 힘이 왜 그리 강한지 이해한다면, 그리고 독자를 꼼짝없이 붙들고 독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작가의 무기가 과연 무엇인지 깨닫는다면, 그 힘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소설을 쓸 수 있다.

반면 스토리를 읽는 행위가 우리 삶에 초래하는 결과는 그리 뚜렷하지 않기에, 아무런 결과 자체가 없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스토리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도 음식과 섹스 못지않게 지대하고 운명적이며 생물적이다. 알고 보면 우리가 재미있는 스토리에 빠질 때 느끼는 쾌감, 밤새도록 책을 붙잡게만드는 그 쾌감은 헛된 것도, 무의미한 것도 아니요, 그저 쾌락을 위한 쾌락도 아니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도 아니다. 그쾌감은 생물적 미끼이자 우리를 사로잡는 덫으로서, 현실 세계를 까맣게 잊고 스토리의 세계에 몸담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스토리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바로 그 쾌감이다.

대니얼 길버트의 말을 빌리면, "감정은 중요하다는 말로는부족하다. 중요하다는 개념 자체가 곧 감정이다. 삶 속에서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이성적 결정을 전혀 내리지 못한다. 인간의 생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 스토리 속에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스토리를 읽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의미를전달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이므로, 소설은 주인공의 감정이 독자에게 직접 전해지게끔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스토리란,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가운데어려운 목표를 추구하는 누군가가 영향을 받는 과정, 그리고결과적으로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이다.

‘어려운 목표‘는 간단히 생각하면 이른바 ‘스토리 문제storyproblem‘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스토리는 점점 고조되는 한 가지 문제를 주인공이 불가피하게 마주하고 풀어 나가는 과정이중심이다. 쉽다면 문제라고도 할 수 없고, 스토리도 성립하지않을 것이다. 그저 피상적인 문제여서도 안 된다. 주인공이 번번이 자신의 어떤 내적 갈등과 씨름하게 만드는 문제여야 하며, 그 결과 주인공의 세상 보는 관점이 막바지에 크게 바뀌어야 한다.

스토리란 결국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수많은 소설이 그 점을 간과하는 탓에 실패한다. 우리가 스토리를 찾는 이유는 그저 흘러가는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주인공의 눈으로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 경험에매료된다. 호기심에 가득 차서, 그 경험이 가르쳐 줄 내밀한 정보를 갈구한다. 그렇다. 주인공의 내적 투쟁이 곧 스토리의 전깃줄이다. 그것이 우리의 관심에 불을 붙이고 스토리를 밀고나가는 힘이다.

우리는 글을 쓸 때, 그동안 교육받은 작문의 원리에 치중빠져든다.
하느라 이런 스토리의 힘을 보지 못한다. 아름다운 글의 힘으로 독자를 매혹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는다. 포장지를 선물로 착각하는 셈이다.

그리고 사실 처음에는 아무 고민 없이 막 써 내려가는 것이 아주 쉽게 느껴진다. 해방감마저 든다. 게다가 빈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모조리 쏟아 내다 보면 기분만 좋은 게 아니라 옳게 하고 있다는 확신마저 든다. ‘아, 이게바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가는 길이구나!‘ 하는 생각에 젖기 쉽다. 그러다가 임기응변의 짜릿함이 차츰 시들해지면서, 32페이지쯤, 아니면 127페이지나 327페이지쯤 가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3페이지밖에 못 가서 그렇게 되는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창의성의 고삐를 풀어 줄 것이 아니라, 스토리의기원이 되는 과거에 붙들어 매야 한다. 현재가 뿌리내릴 과거가 없다면,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밋밋하고 제각각이니 독자의눈에는 마구잡이로 보일 뿐이다. 그렇게 쓴 원고는 비록 근사한 대목이 군데군데 있을지라도 갈아엎고 다시 써야 한다.

가능할 턱이 없다. 뮤즈와 접신이라도 해서 완성된 책 내용을 불러 주는 대로 받아 적으면 모를까. 그런데 완성된 책이라고 하면 바로 다음에 소개할 글쓰기 관련 허구가 생겨난 원천이기도 하다. 비단 책뿐만이 아니라 영화, 연극, 신화 등이모두 그 기원이라 할 수 있다.

15 JEP SE아주 간단히 말해, 스토리란 누군가가 어떤 불가피한 문제와씨름하면서 바뀌어 가는 과정이다.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오랜 시간을 들여 매끈한 외관의 소설을 써낸다 해도 그저 이런저런 사건의 지루한 묘사에 그치고 말 뿐이다. 반면 그 원리를 깨우친다면 독자의 넋을 빼앗는 흥미진진한 소설을 쓸 수있다.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인 메디아스 레스‘는 문학적 기법이 아니다. 그냥 당연한 사실이다. 설마 소설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킬레우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미르미돈족의 왕 펠레우스의 아들로, 어느 선선한 봄날아침에 태어나………."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변함없는 사실은, 스토리의 전반부 없이 후반부가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반부에서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인공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가 반드시 정립되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우리는 주인공이 그 문제와 씨름하다가 결국 변화하게 만드는 플롯을 구상할 수 있다.

스토리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는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볼수 있고, 그럼으로써 예상 밖의 일에 미리 대비할 수 있다. 불의의 시나리오에 뒤통수를 맞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항상 스토리가 필요하다. 예상을 깨는 일은 늘 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이런저런 가상적 시나리오를 눈앞에 펼쳐 줄 작가가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최초의 별난 아이디어를 가지고 스토리가 될 만한 ‘만약에‘ 질문을 만드는 것이다. 쉬울것 같지 않은가? 무언가 평범치 않은 것을 상상하고, ‘만약에‘
라는 말만 앞에 갖다 붙이면 소설 쓸 준비 끝!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유치원 때부터 배운 글쓰기 방법이 바로 그거였다. 다좋은데, 그걸로는 안 된다는 게 문제다. 아무리 예상 밖의 전개를 상상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이야깃감으로 삼을 만한 ‘만약에‘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일단 어떤 패턴을 발견하면 머릿속에 그 패턴에관한 스토리를 만든다. 그런 패턴이 ‘왜‘ 생기며, 따라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는 스토리다. 그런 다음 그 모든것을 의식 속에서 까맣게 잊어버린다.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믿음직스러운 인지적 무의식 속에 그 정보를 넣어 두었기 때문이다. 인지적 무의식은 우리가 매일 맞닥뜨리는 평균35000건의 결정 중 거의 전부를 관장하는 우리 뇌의 일부분이다. 인지적 무의식 덕분에 우리의 의식은 부담을 덜고 그 대신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더 주시할 수 있다. 우리는뻔히 예상되는 일에 대해서는 구태여 고민하지 않는다.

요점이 있다면 밋밋한 ‘만약에‘도 스토리를 빚어 나가는출발점으로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출발점‘이다.
역시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착각했던 점인데, ‘만약에‘로 시작하는 질문만 가지고 스토리를 바로 쓸 수는 없다.

사족을 달자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누구나 아는 고전적스토리다. 그러니 당연히 어렵지 않게, 스토리의 핵심을 담은데다가 전하려는 요점까지 암시하는 ‘만약에‘를 짧고 강렬하게뽑아낼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내용이니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당신이 쓸 스토리의 방향을 미리 잡아야 한다는 뜻에서 예로 든거지, 꼭 이 예를 본떠야 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당신이 쓸 ‘만약에‘는 누구에게 보여 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고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딱 한 줄로 적지 않아도 된다. 서너 줄, 아니 다섯 줄이어도 좋다. 목표는 하나, 적절한 요점을 잡아 ‘만약에‘라는 질문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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켕가와 같은 암컷 갈매기들은 대연회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데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오징어와 정어리까지 준비된 호화판 축제였다. 그 사이에 수컷들은 벼랑 끝에 둥지를 틀고 암컷들은그 둥지에서 알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위협이 있어도 그 알들을 가슴에 품을 것이다. 조금 지나 알을 깨고 나온 새끼들에게 깃털이 나기 시작할 것이고, 그때가 이번 여정에서 가장 극적인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다. 저 아름다운 비스카야 창공에서 어린 새끼 갈매기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것 말이다.

"소르바스야, 저 배 보이지? 너, 저 배가 어디서 오는지 아니? 저배는 라이베리아에서 오는 거야. 그 나라는 아프리카에 있는데, 아주 재미있는 나라란다. 예전에 흑인 노예였던 사람들이 세운 나라거든. 나는 이 다음에 커다란 범선의 선장이 되어 라이베리아로 갈테야. 너도 데리고 갈게. 소르바스, 너는 훌륭한 바다 고양이가 될거야. 내가 확실하게 보증하지."

소르바스는 집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않았다. 꼬리를 바짝 세워흔들면서 총총걸음으로 생선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얼마 후,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이고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졸고 있는커다란 새의 앞을 지나쳤다. 그 새의 모습은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부리 밑에는 커다란 모이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소년은 고양이를 팔에 안으면서 토닥거렸다.
소년과 고양이의 우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우연히 시작된 둘 사이의 우정이 벌써 5년째 계속 되고 있었다.

몸집이 큰 검은 고양이는 모처럼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4주 동안은 내 세상이다! 그러나 이웃집에 사는 소년의 친구가매일 올 것이다. 소르바스에게 통조림 먹이도 주고 작은 자갈이 깔린 고양이 집을 깨끗이 청소해주러 말이다.

몸집이 큰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는 신나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앞으로 수 시간 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르바스는 마냥 즐거워할 수 있었다.

켕가는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쭉 폈다. 그러나 커다란 파도가 몸 전체를 덮어버렸다. 가까스로 물 위로 떠오른 켕가는 머리를 힘차게 흔들어 젖혔다. 눈앞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듯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켕가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오염된 바닷물의 기름 탓이라는 사실을.

캥가는 온몸의 근육에 경련이 일 정도로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마침내 기름 덩어리의 중심부를 벗어나 비로소 깨끗한 물과 만날수 있었다. 눈에 묻은 기름을 씻어내기 위해 머리를 물에 담그고 수없이 눈을 깜빡였다. 마침내 눈가의 기름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제야 캥가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다와 광활한 둥근 하늘 사이에 끼여 있는 몇 조각의 구름뿐이었다. 아레나 로하 등대의 갈매기 떼들은 이미 멀리, 저 멀리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켕가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켕가는 생각했다. 차라리 커다란 물고기의 입속으로 빨리 없어져버리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그는 은빛 날개로 하늘을 날며, 바다를 오염시키는 인간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이따금 정박 중인 대형 유조선들은 안개가 짙게 깔린 틈을 이용해서 탱크 속을 청소하기 위해 먼 바다로나갔다. 그들은 독한 유해 물질 수천 리터를 바다에 내버렸다. 그러면 거기서 쏟아져 나온 이물질과 찌꺼기는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바다 위를 둥둥 떠다녔다.

싱가는 힘없이 물 위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자신의 일생중 가장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죽음의공포에 떨면서 자문해 보았다. 혹시 죽음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모습의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고기 밥이 되는것보다 더 끔찍하고, 질식의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굶어 죽는 것이 아닐까? 그는 죽음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통 전체를 뒤흔들어댔다. 그 순간 깜짝 놀랐다. 기름에 젖은 날개가 몸에서 떨어진 것이다. 은빛 깃털은 검은 농축 물질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날개는 최소한 펼 수 있었다.

그는 몸이 무거워지고 날개의 움직임이 갈수록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더 이상 높게 날 수도 없었다. 이제는 지금의 고도를 다시 회복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켕가는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 힘을 다해 활갯짓을 했다. 얼마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켕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황금빛 첨탑 위를 날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르바스는 갈매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갈매기는 날개를 접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다지 우아한 착륙은 아니군."
소르바스가 점잖게 말했다.

"죽는다고? 그런 소리 마. 너는 단지 피곤하고 약간 지저분할 뿐이야. 그게 전부야. 그런데 이왕이면 동물원으로 날아가는 게 어떻겠니? 동물원은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아. 거긴 너를 도와줄 수의사들도 많아"

"새끼가 태어날 때까지 알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해줘."
갈매기가 가까스로 목덜미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새끼가 태어날 때까지 그 알을 보호해줄게."
"마지막으로,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약속해줘."
갈매기는 고양이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러자소르바스는 이 불쌍한 갈매기가 단지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소르바스는 앞발 한쪽을 천천히 쭉 폈다. 그리고 성냥개비 길이만 한 긴 발톱을 뽑아내어 그 도발자들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때, 이게 맘에 드니? 아직 이런 게 아홉 개는 더 있지. 네 척추에 매운맛 좀 보여줄까?"
소르바스는 매우 침착하게 위협했다.

세끄레따리오는 이렇게 말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꼴로네요는 나이를 알 수 없는 고양이였다. 어떤 고양이들은 식당 문을 연 햇수와 똑같은 나이라고 하고, 또 다른 고양이들은 그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었다고 했다. 그러나 꼴로네요의 나이는 전혀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곤경에 처한 많은 고양이들에게조언을 해주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조언이 어떤 문제를 꼭 해결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최소한 기운을북돋워 주는 역할은 했다. 꼴로네요는 비록 늙었지만, 아직도 항구의 모든 고양이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권위를 지닌 존재였다.

"무엇이든지 도와주겠네. 카로 아미코, 세끄레따리오! 우선 이친구에게 오전에 먹었던 ‘라자냐 알 포르노‘(오븐에 구운 라자냐 요리.
이탈리아 파스타의 일종)를 좀 대접하게나."

"그러지 말고, 우리 모두 같이 가지. 이 항구에서는 고양이 한마리의 문제가 곧 항구 고양이 전체의 문제니까."
꼴로네요가 근엄하게 말했다.

사벨로또도는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곳에 살고 있었다.
처음 보기에는 진기한 물건을 파는 무질서한 상점 같기도 했고, 불법 박물관 혹은 쓸모없는 기계들을 모아놓은 창고,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혼란스런 책들이 쌓여 있는 도서관 같기도 했다. 또는 이름붙이기조차 어려운 도구들을 발명한 어떤 발명가의 실험실 같기도했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한, 이상한 곳이었다.
이름하여 ‘항구의 하리 전시장‘

하리는 마스코트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침팬지 마띠아스였다. 마띠아스는 매표를 하면서 안전을 담당했고, 가끔씩나이 많은 뱃사람들과 체스를 두었다. 물론 썩 잘 두지는 못했다.
침팬지는 맥주를 즐겨 마셨고, 항상 거스름돈을 적게 주려고 했다.
또 다른 마스코트는 사벨로또도였다. 작고 바싹 마른 회색 고양이인데,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 있는 수천 권의 책들을 연구하는 데 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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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詩가 그리워
글씨를 써봅니다.
글씨를 읽어봅니다.
문득 내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어봅니다.
언젠가 잘라버린 내 팔,
베어진 그 부위의 기억이 소름돋습니다.
고통처럼 행복처럼 소름돋습니다.

그러면 다시 말해볼까.
삶에 관하여, 삶의 풍경에 관하여,
주리를 틀 시대에 관하여.
아니 아니, 잘못하면 자칭 詩가 쏟아질 것 같아
나는 모든 틈을 잠그고나 자신을 잠근다.
(詩여 모가지여,
가늘고도 모진 詩의 모가지여)
그러나 비틀어 잠가도, 새어나온다.
썩은 물처럼,
송장이 썩어나오는 물처럼.

답신을 기다리지는 않아요.
오지 않을 답신 위에
흰 눈이 내려 덮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응시할 뿐.
모든 일이 참을 만해요.
세포가 늙어 가나봐요.
가난하지만이 房은 다정하군요.
흐르는 이 물길의 정다움,
물의 장례식이 떠나가고 있어요.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내가 이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내가 꿈속에서 다시 한번만 돌아누울 때까지
내가 내 시야를 스스로 거둘 때까지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일찍이 나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하나이지만,
잠시 눈 감으면 다시 닫히는 벽,
다시 갇히는 사람들.
갇히는 것은 나이지만,
벽의 안쪽도 벽, 벽의 바깥도 벽이지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나는 나를 모르고
무지한 돌멩이처럼 채이면 차이는 대로
잠시 굴러갈 뿐, 굴러다가 멈출 뿐,
이 후반전 인생은맥도 긴장도 없이,
그러나 얼마나 두려운가,
속살 밑의 속살이 속살 위의 속살이 모르게
저 혼자 울부짖는.

미처 깨어나지 못한
내 머릿속 공장에서는 뇌세포들이
샛된 새소리들을 실[M] 삼아
꿈과 생시를 넘나들며
황홀한 환상의 숲을 짜고 있다.

창가에서
창가의 無의 침상에서
나는 한평생을 손짓으로
흘려, 흘려보낸다.

오늘 밤 깊고 깊은
골방의 심연에서
죽음은 불을 밝힌다.
불을 켜도 골방의 내부는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죽음만이 홀로
심장의 불을 켜들고
환히 녹으며 타오른다.

유혹이여 그때 스며들지 않았겠는가.
유혹이여 그때 스며들고 싶지 않았겠는가.
나는 안다너의 유혹에 내가 굴복했음을,
나의 유혹에 마침내 너의 유혹이 굴복했음을.

심혈을 기울여 해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한 사람이 죽고
심혈을 기울여 지구가 돈다, 돌 때,
나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계를 내다보고

당신의 외로움이 날 불러냈다.
내 그리움이 당신을 불러냈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만나찬란하구나.
이 밤의 숱한 슬픔의 천적들이 만나
다정히 꼬리를 깨물고 깨물리우는
이 밤 슬픔의 불꽃놀이여.
當代의 當代의 슬픔의 집합들이여,

우리 서로 비밀스런 추억을, 비밀스런 치욕을
아파라 아파라.
서로 몰래 밟으며, 짓밟으며

굴복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워
가장 강한 강함이든
가장 약한 약함이든
그것에 굴복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워

이 허약한 난간에 기대어
이 허약한 삶의 규율들에 기대어
내가 뛰어내리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내가 뛰어내려야만 하는
이 삶의 높이란,
아니 이 삶의 깊이란.

그리하여 이제 휘황한
고통의 춤은 시작되고,
슬픔이여 보라,
네 리듬에 맞추어
내가 춤을 추느니
이 유연한 팔과 다리,
평생토록 내 몸이
얼마나 잘
네 리듬에 길들여졌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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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혼자 지낸 이후에 내가 그 수치심을 어떻게느꼈는지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건 잘된 일이었다. 나는 혼자 사는 내 삶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이렇게 혼자 살게 될 것 같다고, 그리고 롤랑 바르트가 언급한 바 있는, 심장이 메마른 상태인 아케디아 같은 느낌을받았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파마라에서 뭔가가 내마음을 움직였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약간 느슨해져 있었다. 물론 팬데믹으로 인해 외롭게 지내는 동안 돌이킬 수없어 보였던 진실은 여전히 진실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강도는 조금 약해졌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말할 수 없었다. 그 삶이 실제로 깔끔하게 모범 사례들에 들어맞는지 아닌지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내게 선물해 주었다. 바로 확신이었다

인간은 원래 늘 외로운 존재였다. 인간은 외로움을 언제 어디에서나 느꼈기 때문에 기를 쓰고 이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외로움은 근대나 현대에 들어와 생긴 현상이아니다. 과거 시대와 문화에 대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
어떤 신앙적, 종교적, 사회적 이상향을 과거에 투영하든 상관없다. 이미 철학과 문학에서는 외로움이 늘 거론되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외로움은 피할 수 없는 실존적 경험이다. 어쩌면 꼭 필요한 경험이기도 하다.

요즘은 주로 ‘셀프케어 Self-Care‘라는 용어로 사용되는자기관리의 개념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다. 셀프케어라는 용어는 이제 우리 시대의 핵심적 자기 보수의 기술로 격상했을 뿐 아니라 자율 최적화라는 개념을 상당 부분대체했다. 현재의 셀프케어는 결코 급진적이지 않다. 오히려 집합 용어로서 스파를 비롯해 소셜미디어 다이어트, 아유베다 요가, 명상하기, 치료적 개입에 이르는 모든 행동을아우르고 있어 파악하기도 힘들고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다. 포괄적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을 의미하는 셀프케어는 오늘날 어디에나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으로는원래 우리가 세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셀프케어를 행하지 않는 게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놀랍게도 동시대인들이 하는 셀프케어의 핵심은 대부분 미국의 서정시인이자 수필가이자 정치적 행동주의자인오드리 로드한테서 가져온 것이다. 몇 주 동안 나는 오드리로드의 책을 다시 읽었다. 그녀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일기 에세이 《빛의 폭발: 암과 함께 살아가기》의 에필로그에서 셀프케어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했다.

그건 단순히 세상을 조금씩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더 나은곳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살아남는 것 대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관리는 철저하게 급진적인 이념이다.

모든 정신적 작업은 육체에서 시작된다.

팬데믹 시기에 경험한 바에 의하면 나는 디지털로 연결되는 관계들이 언젠가 우리 인간들의 실제 관계를 대체할 거라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린다. 전화로 혹은 줌으로 나랑 대화를 나눈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제일 그리워한 것은 사람들이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명확한 격리 상태, 명확한 외로움에 대해 하소연했다.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거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확실하게구축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모두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아마 우리 같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설령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젠98가는 그것을 수용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적어도 철학자 오도 마쿼드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에 따르면, 외로움의핵심은 그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외로움을 다스리는 우리의 능력, 즉 ‘외로움 처리 능력‘이다. 마쿼드는 ‘혼자 살 수있는 힘‘ ‘혼자인 것을 견딜 수 있는 능력‘ ‘외로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있을 때 비로소 정말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했다.

진실은, 고통의 감정들 역시 우리를 위해 무언가 선물을 준비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건 힘들다. 그리고 고통의 감정들에 사로잡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안간힘을 쓸 때는 그 감정들을 쉽게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고통의 감정들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배우지못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심리학자 클라크 E. 무스타카스는 외로움이 그것이 가져다주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항상 매우 긍정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몽테뉴를 잇는 수많은 철학자가 자기 인식에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이런 형태의 외로운 독백이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외로움 없이는 묵상하는 삶vita contemplativa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제야 비로소 어쩌면 우정의 유일한 원칙을 깨뜨린것은 바로 나였을지 모른다는 것을 명확히 깨달았다. 우정은 사회적 강요나 제도화된 의무가 아니라 자유를 바탕으로 한 관계이다. 친구는 나 자신의 소망과 기대, 혹은 요구에 따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 놀라운 자유야말로 친구 관계가 유지될 수있는 조건이다. 나는 자크 데리다가 우정의 사랑 선언이라고 했던 바로 그것을 무시했다. "나는 너를 떠날 거야. 나는그렇게 하고 싶어."

눈가에서 전에 없던 주름살이 몇 개 눈에 띄었다. 몇 분 동안 나는 뚫어져라내 얼굴을 쳐다보며 그 형태를 관찰했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피부를 살살 문지르며 주름살을 폈다. 그런데 서서히 당혹감이 물러가고 평온함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주름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주름살은 내 모든경험의 표식이었다. 주름살은 나의 경솔했던 행동들과 작년의 모든 심리적 기복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끝끝내 버텨내 이제는 지울 수 없는, 내 삶의 일부가 된 현실의 흔적이었다. 주름은 내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심지어 주름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다.

역사상 최초로 겨우 일 년 만에 위험한 바이러스의 백신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상상도 못 했던 의학적 발전에 감사하는 마음 대신 절망감만 커졌다. 몇몇 소수의 국가만 자국민들한테 더 일찍, 그리고 더 빨리 백신을 접종시키는 데성공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세상이 최고의 특권을 가진사람들한테 맞춰서 돌아가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사람들은 자신이 두 번째 계급으로 밀려나는 걸 참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희망의 빛이 하늘을뒤덮은 잿빛 구름을 뚫고 나왔다.

몇 년 전 어느 지인이 내게 사람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자꾸 가르치려 들었다. 마치 자기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만나기만 하면 그 말을하는 바람에 나는 오히려 반감이 들어 제대로 듣지 않았다.
모든 문제는 모름지기 충분히 노력하고 스스로 방법을 찾고 제대로 된 발걸음을 내디디고 최선을 다하면 잘 해결될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팬데믹의 압박 속에서 비로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불확실한 소식을 듣고도 무기력해지지 않고 그 소식들에 귀를 기울이고 계속 삶을 이어나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 방법이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정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미래를 믿어야 하고 미래를 위해일해야 하지만 삶을 온전히 다 쓸 수 있는 것은 단지 현재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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