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밤이 지나간 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우리는 생각한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날 때 세상에는 지혜가 가장 흔해진다고 그때야말로 우리가 지혜를 모을 때라고. 평범하고 흔한그 지혜로 우리는 세상을 다시 만들 것이라고.
우리의 산책은 늘 그 나무 아래에서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어. 5단지 초입에 서 있던 마로니에, 그 앞에 이르면 나는 그 나무의 둥치에 붙은 ‘칠엽수과 칠엽수Japanese Horse Chestnut‘라고쓰인 이름표를 찾아 읽었고, 너는 코를 킁킁대며 주위를 맴돌았어. 때로 산책도 버거울 정도로 몸과 마음이 힘든 날도 있었지만, 그 나무 아래에 서면 언제나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래, 모두 잊자 잊어버리자. 지금 우리에게 좋은 것들만 생각하자. 아무리 어두워도 마로니에 아래에서의 생각은 환했고, 밤하늘을 가린 잎사귀의 잎맥은 더없이 또렷했지.
지루한 장마가 끝난 뒤, 그간의 습기를 모두 날려버릴 듯 내리쬐던 햇살을 받으며 그 인형이 빨랫줄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나는 기억하고 있어. 우리가 찾아낸 그 인형을 너는 무척 좋아했지. 나이가 들수록 너는 한 마리의 소도 잃지 않으려던 조상의 본능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어. 그게 비록 딸랑대는 인형에불과했어도 그 인형을 물고 핥고 던지면서 너는 놀았고, 그럴때마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지. 깊은 밤, 잠에서 깨었다가 네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있었어. 다시 잠들려고눈을 감으면 불이 꺼진 거실에서 이따금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 그러면 모든 게 안심이었어.
그 사람과 살던 집에서 나와 그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나는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어. 그때는 너도 내 곁에 없었으니까 네가 어찌나 걱정되던지. 너의 안부를 물으려면 그 사람에게 연락해야 했는데, 그게 그 사람을 힘들게 했나봐. 때로 연락이 되지 않으면 온갖 생각이 다 들었고, 네가 잘 있는지 확인하러 가야만 했어. 옛집에서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너는 내게냉담했지. 마치 내가 너를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러면서도그 상황이 혼란스러운지 그 사람과 나 사이에서 눈치를 봤어. 못 본 사이에 너는 더 상냥해졌고, 작은 애정에도 고마워하는개가 되어 있었어. 그건 나이가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버려질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궁금이와 함께 웃는 나무도 거기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
어느 오후, 수업이 끝난 뒤 각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무척 더웠던 모양이다. 그 친구가 수영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LP를 사서 나눠 듣자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다들 좋아했다. 하굣길이니 당연히 수영복은 없었다. 우리는 빨가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경부선 철교 아래, 수심이 깊은곳이었다.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 때의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1984년 여름, 내 몸을 감싸던, 다리 아래의 검고 차가운 물.
그날 다리 밑까지 함께 간 친구들은 담배를 나눠 피웠다. 그러려고 어두운 철교 밑으로 간 것이었다. 그 친구는 내게도 담배를 건넸다. 마치 브라이언 아담스의 앨범을 복사한 카세트테이프를 건네듯이. 나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어둠 속의 아이들이 깔깔 웃었다. 친구들이 피우는 담배 불빛이 어둠 속에서빨갛게 타들어갔다. 그 어둠 속에서도 시냇물은 쉬지 않고 흘렀으리라. 눈물이날 것만 같은 밤이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조금씩 변해갔다.
꿈이 없는 사람의 자유이용권은 25개의 보어덤과 23개의 디스어포인트먼트와 16개의 다크니스를 맛보는 티켓에 불과할 테니까. 이 삶은, 오직 꿈의 눈으로 바라볼 때, 다른 불순물 없이 오롯하게 우리의 삶이 된다.
낯선 여름이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쓴 채 여름을 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날씨마저 이상해 기상관측 이래 가장긴 장마가 찾아왔다. 비는 내렸다 하면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보다 더 큰 재앙이 올 거라는 예언이 인터넷을 떠돌았고, 거기에 호응하듯 전염병은 더욱 번져갔다. 확진자가 급속히 늘어나자 수도권의 식당과 주점은 저녁 아홉시까지로 영업시간이 제한됐다. 팬데믹 이후 첫번째 여름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언젠가 엄마의 의상실에서 낯설다고도 낯익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TV에서 보던 연예인들의 얼굴을실제로 보니 신기하기만 했다. 엄마는 그들에게 데면데면했다. 낯선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하던 평소의 태도와는 너무 달랐다. 어딘가 겸연쩍은 듯한 표정이었달까. 반면 그들은 마치어제 다녀간 사람들처럼 살가웠다. 한 여자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는 체를 했다. 여자는 뒤에 서 있는 남자들을 돌아보며 "벌써 이렇게나 컸네"라고 말했다. 그녀의 서울말은 마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혼선이 심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엄마와내가 사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그런 노랫소리 같았다.
그런 하나 마나 한 대화를 조금 더 나누다가 그들은 전화를끊었고, 은주가 "주소지를 찾아가면 뭐가 남아 있으려나"라고혼잣말할 때, 그도 혼자서 생각하던 것을 계속 생각했다. 그러니까 비행기를 타면 삼십삼 년 전, 그가 엄마 뱃속에 있던 시절의 장소로 이동할 수 있듯 시간을 거슬러 삼십삼 년 전으로도되돌려 보내주는, 말하자면 타임머신 같은 기계가 있다면 어떨까 싶은, 소년 같은 몽상을 하지만 이내, 그렇다면 자신은 태어나고 엄마는 아직 죽지 않은 세계로 가겠지. 자신은 없고 엄마만 있는 세계로 가고 싶기야 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기전 엄마가 그에게 만약 당신이 죽고 난 뒤의 세계가 있는 게사실이라면 당신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열어볼 수 없다니까. 그게 규칙이야. 과거는 통조림 속에 들어 있고, 우리에게는 따개가 없어. 그러니 누구도 과거를 바꿀수는 없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 스파게티 인생론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였다.
그건 귀에 들리는 그대로 따라 되뇌면서 외국어를 익하는 학습법 중의 하나였는데, 그녀는 동시통역을 잘하기 위해말하는 사람의 말투뿐만 아니라 몸짓까지도 흉내내야 하는 자신의 일을 섀도잉이라고 일컬었다. 나는 섀도잉에 대해 더 알고 싶어져 그녀를 따로 만났다.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말을, 서로의 행동을, 서로의 표정을 따라 하게 됐다. 그녀에게 사귀자고 말했을 때, 나는 섀도잉에 대해 다 알게 됐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지긋지긋했습니다. 이게 다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비행기에 올라타 티켓에 인쇄된 자리를 찾아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 문이 닫혔습니다. 그 순간 그때까지의 현실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방송활동을 할 때도 종종공황장애가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황상태가 어떤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발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것은 깊고도 완전한 암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손으로 옷에 묻은 것들을 툭툭 털어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어났습니다. 문득 제 눈앞으로 더없이 생생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깊은 안도감과 함께 완전한평화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승무원에게 고맙다고 말하니 그가환하게 미소를 짓더군요. 저는 그를 안았습니다. 그의 육체뿐아니라 감정과 이성까지도 모두 안을 수 있었습니다. 머릿속은놀랄 정도로 고요했습니다.
관계라는 건 실로 양쪽을연결한 종이컵 전화기 같은 것이어서, 한쪽이 놓아버리면 다른쪽이 아무리 실을 당겨도 그전과 같은 팽팽함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한 번 더 그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과연 어떨까? 여름 환한 빛 아래, 어떤 사람은 곧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속에서정든 동네를 떠나고, 어떤 사람은 창밖의 나무들을 바라보며그녀를 동정한다면, 그 푸른 나무들 사이로 수업을 마친 아이가 돌아온다면, 마치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사람처럼 다시 그아이를 맞이할 수 있다면.
지금 나 역시 그 바다의 한복판에서 표류 중이다. 그 바다 위로 천년 전의 푸른 무덤들이 마치 다도해의 섬들처럼 군데군데 솟아있다.
사랑이란 제 쪽에서 타인을 바라볼 때의 감각이었다. 그것에는 절대적인 크기가 없었다. 멀어지던 그 순간부터 그녀의살갗이 와 닿을 때의 촉감이나 자신을 쓰다듬던 손길은 전혀되살아나지 않았다. 멀어지던 바로 그 순간부터 풍화는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목소리는 어땠는지, 심지어는 그 얼굴이 어떻게 생겼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됐다. 지훈은 그녀의 강의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누구도 스스로존재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이 폐허는 끝이 아니야. 이건 이 집의 가장 어린 영혼, 새로운 시작이야. 알겠니? 그다음은 바람과 빛이 새어드는 소리, 그리고 다시 피셔-디스카우의 노래가 이어졌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그그늘 아래에서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그때까지도 지훈의 앞에서는 한 여자가 울고 있었다.
생의 첫 해트트릭은 그토록 대단한 일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시합을 하던 일요일이었다. 세번째 골이 들어가는 순간 기태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만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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