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유로 그곳에 가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썼다. 책방에는 다리가 가느다란 식탁 의자가 있었고, 그녀는 거기에 앉아 구매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날 다 읽는 건 어려웠으므로 그녀는 다음날에도, 그다음날에도 책방의 식탁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주인은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책방 주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계산대에 가만히 앉아서 손님이 오는지 가는지 신경쓰지 않던 모습을 그런 주인 덕분에 나는 책방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 또한 그 책방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 나는 반가웠다.
‘이것은 내가 서른네번째로 쓰는 자기소개서다‘라는 첫 문장 뒤로 그녀는 자기소개서에 쓸 수 없었던, 혹은 자기소개서에 썼으나사실이 아니었던 내용에 대해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아이를 낳고퇴사한 첫째 언니,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서른다섯이 되면 더이상고용될 수 없으리라는 불안을 지니고 사는 둘째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녀는 자신의 삶이 두 언니들과 어떻게 다를 것인지궁금하다고 썼다. 면접장에서 전원이 남성인 회사 간부들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는 말도 있었다. ‘나의 삶에는 특별할 것이 없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이런 자기소개서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글은 그런 식으로 끝났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순응주의, 능동적인 순종. 그런 말들에서 나의 글이,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발표자의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이라는 말은 나를 모욕하지 않으려는 배려였을 뿐, 그녀가 속으로는 분명 다른 판단을 내렸으리라고 짐작했다. 나는 그때 강의실을 둘러싼 이상한 열기를 기억한다. 그녀의발언에 대한 지지와, 한편으로는 분명한 반감이 뒤섞인 공기를. 그 학기 내내, 그녀의 수업시간에는 그런 긴장감이 돌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정윤은 당신이 써간 글을 자주 칭찬했다. 텍스트의 내용을 잘파악하여 정리했고 접근이 신중하다고 했다. 반대로 그녀는 희영의 글에 대해서는 완곡하게나마 매번 비판했다. 이 주장에 대한객관적인 근거가 뭐죠? 상대를 설득하지 못하는 글은 강요가 될수밖에 없어요. 논리의 비약이 잦아요. 그때마다 희영은 정윤의조언을 노트에 메모했다.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그런 말에는 언제나 힘이 있었다고. 이건 여성 문제가 아니다, 더 큰 억압의 문제다, 라는 식의 논리는언제나 강했고 다수를 설복할 수 있었다. 정윤이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논의조차 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정윤은 수면으로 올려놓고자 노력했다. 정윤이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희영의 주제는 회의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은 아직도 그날 밤을 기억한다. 희영이 써온 긴 글을 처음읽고 받았던 충격을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차갑게 언 발의 감각을 느끼며 그녀의 글을 읽던 스물에서 스물하나가 되어가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신은 입을 다물고 희영의 감정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편집부에서 가장 가까웠던 정윤을 빼앗긴 심정일지, 회의 시간마다희영의 주장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용욱에 대한 거부감일지. 어쩌면 희영은 그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정윤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정윤에게 열등감을느끼고, 정윤이 자신보다 더 돋보이는 것을 경계했던 용욱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는지도 모른다고.
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기지촌 활동가들이 만든 소식지를 읽으며 마음이 끌렸다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그곳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는 희영의 얼굴을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당신은 희영이아까웠다. 희영의 재주가, 희영의 능력이 그런 활동으로 낭비되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가게를 나와 희영의 집으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걸으면 걸을수록 공간이 더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높은 건물이 없지. 밤에 정말 어둡다. 당신과 희영 앞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희영의 집은 벽돌로 지은 삼층짜리 다세대주택의 꼭대기 층이었다. 신발을 벗고 장판에 발을 디디니 발바닥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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