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화를 내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거든요. 거짓말을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거짓말이냐에 따라서 심장이 크게 뛰기도 하거든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다들 그랬으니까."
의사가 말했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온 뒤, 기태는 의사가 말한 대로 연습을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연습.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마음을 쏟지 않는 연습. 그러나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들투성이였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태는 어떤 일이든 받아들였다. 이해할 수 없어도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기태의 생명은 그렇게 연장됐다. 납득하지 못하는 순간, 기태의 삶은 중단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과 비슷했다.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워할수록 더 미워하게 된다. 매 순간 관계가 호의와 악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지금도 양양행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 언니와 손을맞잡았을 때, 미래가 달라졌다고 믿고 있다 했다.

그게 시작이었어. 그 여름 매미 소리를 따라가면 언제나 꿈속의 헌책방에 갈 수 있었지. 거기서 나는 작가의 이름이 아직적히지 않은 소설을 읽고 그 책에 내 이름을 적었어. 그렇게 꿈의 소설들이 쏟아져나왔다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고말고요. 소설가의 재능이란꿈꾸는 것이 전부다. 꿈꾸는 능력은 꿈을 현실로 만든다. 하지만 꿈 같은 현실이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이 선물에 나는 지금까지도 만족하고 있다.

나는 끄덕였다. 그럴 때, 나도 뭔가 좋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찬 선생이 나를 찾아온 지금처럼. 1972년 7월 16일, 다시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동료와 함께 바다로 뛰어든 찬 선생처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검은 밤바다를 가로지르는 찬 선생의 몸이 하얗게 반짝였다.

겨울 내내 거리의 눈은 쌓여간다. 아이의 키만큼 눈은 자란다. 어른의 키만큼 겨울이 깊어지는 만큼 더 높고 더 단단하게.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사랑하고 증오하고 기뻐하고 원망한다.
어떤 연인들은 삶이 그대로 멈추기를 바란다. 그들의 바람대로겨우내 쌓인 눈은 녹지 않는다. 겨울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인다.

내 일생의 2, 3, 4쿼터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내 몫의 숨을 한 번에 내쉬었다. 결국 나는 예정대로 여든 살을 채우고 죽었지만, 사람들은 내가 실연의 아픔으로 스무 살에 요절했다고들 말했다.

"다르게 말하면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리고 그 사실을 제가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저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영향을 받는 만큼 그 사건이나 죽은 아이들의 의미도 달라질테고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책임감이에요. 그 사건에 기꺼이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겠다는 것."

나는 눈을 감고 달빛도 없는 어둠 속을 걸어가는 주희를 상상했다. 발치를 비추는 작은 불빛이 흔들린다. 하늘에는 하얗게 은하수가 펼쳐져 있다. 조금 더 걸어가면 너른 공터가 나오고 주희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천문대 연구원의 지시에 따라바닥에 눕는다. 제일 먼저 거문고자리, 독수리자리, 백조자리를찾아 그 세 별자리의 가장 밝은 별들을 연결해 ‘여름의 대삼각형‘을 만드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고 나서도 밤하늘을 계속 바라보라고, 그러다보면 처음에는 안 보이던 별들이 하나둘 눈에보이기 시작한다고 연구원은 설명한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밤하늘을 관찰하는 태도를 학생들이잊지 않도록, 어쩌면 책임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게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그 선생님은 그런 사진을 우리에게 찍어주신 게 아니었을까요?"라고 주희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이 세상이 온전히 내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이세계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엄마가 아이를 바라보듯 자연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돌볼 수밖에 없다. 돌보는 사람에게 이 세계는 딱총나무에 물과일이 맺히는 것과 같은 놀라움으로 가득한곳이다. 이 세계가 그런 곳이라면,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 모든것을 잃어버리는 일과 같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자연 속에서 온전히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이 온통 인간의 것으로 차 있다면 나는 기지개를 켜지 못했을 것이고, 온갖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을것이다. 나에게 인간은 제약인 반면, 자연은 자유다.
인간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나, 자연은 나를 이 세상에 만족하게 한다.

4115-생각과 마찬가지로, 엄마가 죽을 수 있다는 연락도 제멋대로찾아온다. 느닷없이 떠오르는 나의 생각처럼 세상에는 이해할수 없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이건누구의 생각일까? 세상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나는 걸어야만 한다.

반면, 걷기는 전혀 애쓰지 않아도 된다. 걷지 못할 만큼 몸과마음이 힘들 때도 있지만, 대개는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별노력 없이, 수월하게. 그럴 때 걷기는 사랑과 닮아 있다.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술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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