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처럼 빳빳하게 얼어 있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은 금방눈물을 뚝뚝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곤란하고 서러워보였다. 서러워서 곤란하고 곤란해서 서럽고, 바람은 점점더 차가워지고 다시 더 곤란하고 서럽고 서러워서 곤란하고, 이 과정이 반복될 것이 빤한 날씨였다. 에라 모르겠다.
마침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계단도 마침내 끝났다. 다 내려가서 숨을 참으며 살며시 할머니를 내려놓았다. 드디어 얼지 않은 땅에 발을 디딘 할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도 같이 쓸어내렸다.
침대에서 문 사이의 그 좁다란 공간에 침대와 이불처럼 반질반질하고 고운 얼굴을 한신혼부부가 무릎을 웅크린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얼굴들도 하도 이불처럼 새것 티가 나게 반질반질 고와서, 게다가어떤 사람들만이 풍길 수 있는 정결함 때문에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신혼부부구나, 하고 눈치챌 수 있었다. 참 고운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친구들이 데리러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웃는 새댁의 얼굴은 말갛고 곱고 눈부셨다. 그리 덩치가 크지 않은신랑은 어떻게 평소보다 몇 배 무겁기 마련인 술 취한 사람을 업고 예까지 왔는지 장군처럼 늠름해 보였다.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고 앞으로도 기약 없다. 그저, 부디 그들이 그 침대가 떵떵거리며 제 자리 찾아 위용을 자랑할 수 있는 몇 십 평짜리 넓은 집에서 잘 살기를. 레미안이니 브라운스톤이니 이런 데 가서 여봐란 듯이 살라고 세속적으로까지 빌어주고 싶을 만큼 참 정다운 무릎을 가진 부부였다.
으로 출동한 모양이었다. 노래 소리와 마이크에 대고 뭐라고 고래고래 흥을 돋우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커지기만하는 게 아니라 열기가 시시각각 끓어올라 뚝배기처럼 도통 식을 줄을 몰랐다. 마이크에 대고 소리치는 사회자의 신명도 커져만 갔고, 얼쑤 좋다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져만 갔다. 그리고 누군가 단단히 털리고있다는 내 의심도 뭉게뭉게 커져만 갔다.
팔순 때도 이웃들이 깜짝 놀라 홍보관으로 착각할 만큼 시끄러운 잔치를 벌일 수 있기를, 그리고 고성방가로 착각하고 분노하며신고한 나같이 덜 떨어진 이웃이 다시는 없기를 빌었다. 할머니 축하드려요. 내내 건강하세요. 누구나 칠순은 한 번인데 제가 참 그것도 모르고 죄송해서 어쩌나. 팔순 때는절대 고성방가로 신고 안 할 테니 꼭 팔순잔치 하셔요. 네. 부디 오래 사시고 건강하게 구순까지 치르셔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그분을 즉시 찾아가서 옆에 앉혀놓고 간절하게 물어보고싶다. 대민 상담 40년의 경력으로 보셨을 때, 이 남자는 어떤가요? 저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나요? 그 어떤 용하다는점술가나 노련한 정신과 의사보다 훨씬 신뢰가 가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저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어떤 남자와 헤어지는 것보다도, 그 집과 헤어지는 게더 힘들었다. 참 고마웠다. 그 다정한 침묵. 지겹도록 많은 구질구질한 고독을 내려놓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질질 짜며 눈물을 흘렸던 리놀륨 장판의 무늬 하나까지도, 벽지의 얼룩 하나까지도 그토록 사랑했다. 잘 있거라, 사랑아. 아니, 잘가라 사랑아.
자전거를 타고 회사에 가려고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는하도 가파른 경사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앞뒤 브레이크를 꽉잡으며 젠장 이건 뭐 시간을 달리는 처녀도 아니고, 하고투덜대던 언덕. 올라올 때는 이를 악물며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내가 이놈의 동네 뜨고야 만다. 하고 허망한 결심하루에도 몇 번씩 하던 그 언덕. 없다, 이제는.
도대체 나는 왜 이놈의 회사를 죽어라 다녀야 하나. 여기 다니다가 좋은 날 다 보내는 거 아닌가,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했다고 좋아했더니 이건 정말 첫 작품이 유작이 될 판이고, 왜 저 책상에 앉아 있는 인간은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그때 나는 확실히, 막힌 하수도 뚫듯 꼭 내려야 할 심화로 가득해 있었다.
나의 입을 것을 해결해준 것은 수년 동안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였고, 그나마 기분 좀 낼 때면 동대문 도매상가에가는 정도였다. 그러니 브랜드 제품이라고는 온 옷장을 들었다 털어도 없고 그나마 옛날 남자친구가 뭐라나 하는 크리스털 브랜드 귀걸이를 선물한 적이 있는데 정말 거지같이 헤어지고 난 다음, 야 이 망할 자식아 평생 그러고 폼 재고 살아라, 하면서 랜디 존슨 같은 기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어딘가 타지 않는 쓰레기 노릇이나 잘 하고 있겠지. 어쨌거나.
좀스럽기 짝이 없는 마음보를 한탄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이게투쟁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냐며 죄책감에 빠졌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구두는 내 마지막 보루 같은 거였다. 왜이래 나 미우미우 하이힐 있는 여자야, 하는 이십대 여자로서의 마지막 허영이었다. 내 능력으로 손에 쥘 수 있는 허영의 딱 한계치이기도 했다.
나 때문에 그녀는 참 눈부시게 웃었다. 아, 나는 도넛답게주책스런 눈물이 나려고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 미소 덕분에 텅텅 빈 둥그런 구멍이 아주 조금 작아졌다. 도넛이 신통한 짓 하고 도넛이 도넛 구멍 메우는 그런 희한한 날도 있었다. 용감한 KTX 여승무원의 그 꿋꿋한 미소 덕분에 도리 나는 1센티미터 정도 구원을 받고. 요즘도 이놈의 구멍사이가 유난히 퀭할 때마다 아끼고 아껴서 꺼내보는 녹슨철탑 위 당신의 눈부신 미소, 고맙고 또 고마웠어요.
오천원어치만 포장해달랬는데 터질 듯한 봉지를 할머니는 건네줬다. 그걸 안주 삼아 산꼭대기 내 방에서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다. 순대는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다.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그 집에서 내가먹어온 것은 순대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차마 감당이 안돼서 펄펄 날뛰다 못해 미친 개 같던 젊음을, 고달프고 외롭고 거친 혼자살이와 돈벌이의 어리광을 그 식탁 위에 조용히 내려놨었다는 것을. 아이고 이쁜이가 왔구나, 아가야많이 먹어라, 하는 그 말에 넘치도록 위로를 얻어왔다는 것을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그 집에서 내 맘대로 정한 내지정석에 앉아 있으면 아무리 가난하고 춥고 외로워도 꼭따사로운 봄날 같았다. 그토록, 따사로운 순대국이었다.
요즘 레드니 마늘이니 갖은 맛을 낸 치킨들이 많지만 만약 당신이 고전적인, 극히 평범하지만 맛있는 치킨을 원한다면 약수역에 있는 이십 년 된 림스치킨을 찾아보실 것,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금호동에 사시는 아줌마, 보고 싶다. 극히 평범하지만 맛있는치킨도 다시 먹고 싶다.
조금씩 줄였다는 항변에 의사선생님은 독을 한 컵마시나 한 병 마시나 뭐가 다르냐고 대꾸했다. 사실 그 말이 맞았다. 그리고 억울할 것도 없었다. 평생 마실 술을 지난 십 년 동안 죄다 마셔버렸으니까. 내 몫뿐이 아니라 평생술한잔 입에 대지 않고 살아오신 부모님 몫까지 카드빚당겨쓰듯 싹 쓸어 마셨으니 끊어도 억울할 것 없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이를 악물고 버틴다. 그 좋아하는 술을 어떻게 끊느냐고, 같이 술 마시고 싶다고 간 크게 말해주는사람들이 있어서 고맙기는 한데 사실은, 너무 사랑해서 차마 가까이 갈 수 없는 마음을 아십니까. 이 애절한 마음을.
향미의 소고기탕면의 칼칼하면서도 독특한 국물은 고수를 듬뿍 넣으면 더욱 술 한 잔을 부르는 맛이 되고, 동파육은 돼지고기 비계를 느끼하지 않게 삶아 젓가락으로 부드럽게 쪼개질 정도로 연한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만두를 살짝 찢어서 그 위에 고기 한 점 없어 먹으면 밀가루 음식이건 비계건 기름기건 평소에 건강이 어쩌고 저쩌고 내가뭐라고 떠들었건 말건 으허허허허 내가 뭐랬건 오해입니다. 하는 식으로 마구 주워먹게 된다. 그게 ‘향미‘의 마력이다.
하는 것이 요즘 기륭전자에 가보지 못하고 알량한 돈만 보내느라 못 가보는데, 미미식당 생각만 해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릴 지경이다. 고지혈증이고 콜레스테롤이고 다 엿이나 먹으라지, 나는 그날 먹은 음식들의 이름도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저 얼른 입에 넣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정말로, ‘미미식당‘이었다. 정말로 아름다울 미에 맛미자를 쓴다. 아름다운 맛이었어요. 사장님.
유난히 추운 날 아침부터 만두가 먹고 싶어서 터덜터덜갔더니 아줌마는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만두를 상자에넣어주시곤 갑자기 손 좀 내밀어보라고 했다. 손을 내밀자아줌마는 찜통에서 찐빵 하나 꺼내 쥐어주며 말했다. "날이 추워서 손이 시리니까 잡고 집에 가면서 먹어." 과연 손은 따뜻했다. 찐빵은 손난로처럼 보들보들한 제 몸으로 따스하게 손을 덥혀주었다. 집에 가도 따뜻해서 아버지가 기뻐하며 드셨다. 나는 김치만두를 먹었다. 아버지도 나도, 사소하게 행복한 날이었다. 아버지는 지금 천국에서 만두처럼 포근하게 계실까. 오늘도 혜성분식은 시장이 모두 잠든 새벽 다섯시에 혼자 불을 밝히고 있고 찜통은 따뜻하느라 바쁠 것이다.
다 아는 얘기겠지만, 나는 성격이 나쁘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 만한 내공을 갖춘 인물이 전혀 못 된다. 어리지도 않은 나이에 이젠 좀 죽어도좋을 혈기만 펄펄해서 마음에 안 드는 꼴을 보면 웃으면서 여유 있게 화내기는커녕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있는악 없는 악 다 써서 벼락같이 화를 내지 않고는 못 배긴다. 화를 내고 내고 또 내도 모자랄 일천지, 그냥 귀를 막고 나는 별일 없이 산다 하기에는 이놈의 혈기가 아직 덜죽어서, 아주 이놈의 혈기가 웬수 중의 웬수다. 한쪽에서는 비정규직 신나게 자르고 잡 쉐어링 하자면서 젊은 애들보고만 콩 한쪽도 나눠 먹으라고 윽박질렀고 저쪽에서는 마음대로 운하 파고 그러거나 말거나 가난한 아버지들은 가난한 죄로 타 죽어버렸고, 예쁘고 돈 없고 빽 없는 여자 연예인은 손 타다 죽어버렸고, 일제고사가 어쩌니 저쩌니 난리통에 선생질하던 친구가 잘려버렸고…………종종 속상해하는 것만으로 하루해가 다 가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힘겨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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