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전반적으로 자유롭고 한결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애쓰지 않을것이다. 또 성공의 증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성스러운태도와 자기 자신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의식하는 만큼타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기 위해서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너그러움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상황은 타협의 연속, 승패를 결정해야 하는 전쟁, 일단 부여된 후에거부되는 자유로 수놓인다.
나이가 든 후에도 많은 사람이 더 분주하게 살아간다. 그들은 구경해야 할 것도 많고, 맛보아야 요리도 많으며, 관광해야할 지역도 많고,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도 많다고 생각한다. 이런 공복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회 활동을 할 때 디저트와 오늘의 요리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었던 사람도 이렇게 변한다. 휴가는 옹색하기 그지없어, 그들이 다시 일터로 나가기전에 원기를 회복하는 기간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의 열정을 되찾고 싶어 한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그들은 더는 지체하지 않는다.
나태함(이것도 느림의 한 형태일까?)의 원인은 어떻게 변호할 수 있을까? 나태함은 일종의 전략, 즉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리라 생각하며, 불만을 사지 않기 위해 아예 행동하지 않겠다는 타산적인 계산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나태하면 결국 마비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느린 사람은 원하면 언제든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차분하게 보이라는 충고를 곧잘 받는다. 이런 사회적 명제는 우리가 느림에 부여하는 기본적인 존재 방식이 아니다. 이 충고는 긴장을 완화해야 할 상황에나 어울리며 사회성과 공생을 순조롭게 촉진하고, 즐거움을추구하는 경우에나 필요하다. 따라서 이 충고에 따르는 삶은하나의 방법이고 수단이지, 우리 자신이나 세상의 진실을 탐구하는 삶은 아니다.
‘느림과 독창성‘. 영감을 받은 사람은 최적의 기간 내에 최적의 해결책을 생각해낸다. 그는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며, 꾸준히 창조적인 행동을 해낸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영감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신속하게 대답한다면, 그것은 경험으로 습득한 지식 덕분이다. 새로운 방향을 창안해내고, 자신을 바꿔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빠름은 자신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모른다. 그러나 느림은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당혹스러워하고, 자신이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곧잘 지루한 훈계로 나타나는 선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사는 시대의 조건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는 끊임없이 변하고, 그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이런 변화들은 우리에게 대단한 적응능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속히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느리면 살아남지 못하거나 아무도 원하지 않는 소외된존재로 전락한다. 민첩하게 움직여야 승리한다. 느림은 전통적인 사회, 경직된 사회에서나 이해될 수 있는 태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속도보다 박자와 유연성 및 다른 선수들과의 조화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사람들이 찬양했던 ‘카이로스(적절한 순간)‘가 더 중요하다. 이는 직관적인 요소지만, 훈련을 통해 더 갈고닦을 수 있는 능력이다. 훈련은 경기의 의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구체화할수 있지만, 그 자체로 충분하지는 않다.
나는 다른 이유에서도 기민함을 찬양하기가 망설여진다. 말에의미와 형태를 부여하는 단어들이 언제나 예측된다면 기민함은 본래의 특성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그런 말보다 과거에존재한 표현을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진중하게, 때로는 답답할정도로 새로운 표현을 찾아내려고 심혈을 기울인 말을 더 좋아한다. 그런 말을 만나면, 나는 지금까지 시도한 느림에 대한찬양에서 다시 한번 위안을 얻는다.
따라서 연속성보다 불연속성을 중시하고, 신중한 태도보다돌발적인 행동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듯하다. 철학의 불확정성이란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나는이런 돌발적인 기습의 원칙에 정반대의 원칙, 하지만 그 역시제도화된 원칙을 견주어보려 한다. 바로 망설임의 원칙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회와 반박, 준비와 후퇴 등이 당사자의 마음속에서 맴돈다는 원칙이다. 우리가 이런 망설임을 거의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나는 그런 망설임의 흔적들을 떨쳐내고 싶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침묵의 늪에 몰아넣었다. 세상이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뛰어난 노래를 부르는 걸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덕분에 우리는 세상에 가득했던 신들, 강과 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신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또 현대 과학은 원자를 숫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세상을방정식과 십진법으로 환원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몇 걸음만더 내디디면 세상의 입을 완전히 부리망으로 씌울 수 있다.
이제부터 나는 더는 우물쭈물하지 않을 것이다. 매사에 조심하는 태도를 버릴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느림의 예찬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밀고 나갈 것이다. 느림은 내가 세상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삶의 방식이기때문이다.
문화의 과잉에 대한 불평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있을까? 이런 불평은 어떤 사람이 너무 지적이거나 너무 친절하다고 혹은 너무 예쁘다고 비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문화의 과잉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경계심을 품어야 한다. 문화의 영역이 아닌 영역들까지 침범하면서 문화 자체와 어떤 면에서문화를 벗어난 분야까지 탈진시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또 문화의 소멸을 한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마당에 문화의 과잉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개인은 온갖 형태의 몰수와 조작 및 반드시 떨쳐내야 할 막연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발언권과 욕망을 빼앗길 수 있다. 문화는 사치품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심심풀이를 위한오락거리도 아니다. 문화는 내가 나 자신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문화는 우리가 더큰 행복을 얻기 위해 소유하고 사용하는 재화의 집합체만이아니다. 문화는 우리를 창조의 과정에 끌어들여서 우리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우리에게 제안된 것을 받아들여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실업으로 삶의 형편이 어려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반드시 불합리한 행동을 강요당하지는 않는 듯하다. 오히려 은퇴자들즉 경제활동에서 은퇴한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열정을 뜨겁게 드러내 보인다. 따라서 그들이 뒤늦게라도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하다.
공간을 문화적으로 점령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몰지각하게 시간마저 점령하겠다고 공언했다. 고대 문명을 넘어 문명의 요람까지, 더 나아가서는 선사시대의 발전 단계까지 밝히겠다고 나섰다. 또 세상을 떠난 후로 영생의 안식을 얻었으리라 추정되던 죽은 사람들까지 되살려냈다. 고대문화의 대열병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었는데! 우리는 제단과 석기, 두개골과 유골, 동굴을발굴해내면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재활용하며, 거기에서 인류를 위해 최대한의 이익을 끌어내려 애썼다. 그것들이 우리를태어나게 해주지 않았던가. 따라서 내 생각에 우리는 경건한마음으로 조용히 그 유물들을 생각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것들은 우리에게서 그런 감사의 행위를 당연히 받을 만했다.
이런 불안감이 정당한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문화제국주의의 불안한 징조들을 지적해왔다고 생각한다. 현재 존재하는다양한 형태의 차별에 문화적인 차별까지 더해질 수 있다는징조들 말이다.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문화는 약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위험과 위기에 직면할때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에 다가가야 하는 순간을 뒤로 미루는 핑계와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 지구를 내보이며 자랑하고, 지구의 모든 부를 발굴해내려는 갸륵한 욕심에 지구를 약탈하지만 않는다면 불안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요즘에는 자주 사용되지 않지만 ‘지각하는 사람‘ 이란 표현은 과거에 경멸적인 의미로 쓰였다. 지각하는 사람은 우연히 늦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학교생활과 소풍 약속 시간, 성당 예배 시간에 정확히 나타나지 못하는 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집단의 질서에 해를 끼쳤지만, 그 대가로 악의없는 질책을 받는 것으로 끝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가악의적으로 지각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그는 학교가 시작하는 날부터 다른 학생들보다 늦게 도착했고, 그 못된 습관을 결단코 버리지 못했다.
느림은 그 자체로는 어떤 가치도 없다. 우리가8 불필요하고 헛된 계획에 힘을 쏟지 않고 우리 사회 내에서 명예롭게 살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느림이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끝내느냐는 그다지중요하지 않다. 수직적인 접근 방법을 어떤 의미에서의 수평적인 시각으로 바꿔보자. 예컨대 우리에게 제안되는 것에 개입하는 정도에서, 움켜잡지 않고 살짝 건드리기만 하겠다고맹세해보자. 그럼,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현재의 모습, 앞으로 선택하기로 합의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본연의 속도로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릿하게 우리를 향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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