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전반적으로 자유롭고 한결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애쓰지 않을것이다. 또 성공의 증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성스러운태도와 자기 자신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의식하는 만큼타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기 위해서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너그러움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상황은 타협의 연속, 승패를 결정해야 하는 전쟁, 일단 부여된 후에거부되는 자유로 수놓인다.

나이가 든 후에도 많은 사람이 더 분주하게 살아간다. 그들은 구경해야 할 것도 많고, 맛보아야 요리도 많으며, 관광해야할 지역도 많고,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도 많다고 생각한다. 이런 공복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회 활동을 할 때 디저트와 오늘의 요리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었던 사람도 이렇게 변한다. 휴가는 옹색하기 그지없어, 그들이 다시 일터로 나가기전에 원기를 회복하는 기간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의 열정을 되찾고 싶어 한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그들은 더는 지체하지 않는다.

나태함(이것도 느림의 한 형태일까?)의 원인은 어떻게 변호할 수 있을까? 나태함은 일종의 전략, 즉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리라 생각하며, 불만을 사지 않기 위해 아예 행동하지 않겠다는 타산적인 계산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나태하면 결국 마비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느린 사람은 원하면 언제든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차분하게 보이라는 충고를 곧잘 받는다. 이런 사회적 명제는 우리가 느림에 부여하는 기본적인 존재 방식이 아니다. 이 충고는 긴장을 완화해야 할 상황에나 어울리며 사회성과 공생을 순조롭게 촉진하고, 즐거움을추구하는 경우에나 필요하다. 따라서 이 충고에 따르는 삶은하나의 방법이고 수단이지, 우리 자신이나 세상의 진실을 탐구하는 삶은 아니다.

‘느림과 독창성‘. 영감을 받은 사람은 최적의 기간 내에 최적의 해결책을 생각해낸다. 그는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며, 꾸준히 창조적인 행동을 해낸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영감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신속하게 대답한다면, 그것은 경험으로 습득한 지식 덕분이다. 새로운 방향을 창안해내고, 자신을 바꿔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빠름은 자신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모른다.
그러나 느림은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당혹스러워하고, 자신이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곧잘 지루한 훈계로 나타나는 선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사는 시대의 조건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는 끊임없이 변하고, 그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이런 변화들은 우리에게 대단한 적응능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속히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느리면 살아남지 못하거나 아무도 원하지 않는 소외된존재로 전락한다. 민첩하게 움직여야 승리한다. 느림은 전통적인 사회, 경직된 사회에서나 이해될 수 있는 태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속도보다 박자와 유연성 및 다른 선수들과의 조화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사람들이 찬양했던 ‘카이로스(적절한 순간)‘가 더 중요하다.
이는 직관적인 요소지만, 훈련을 통해 더 갈고닦을 수 있는 능력이다. 훈련은 경기의 의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구체화할수 있지만, 그 자체로 충분하지는 않다.

나는 다른 이유에서도 기민함을 찬양하기가 망설여진다. 말에의미와 형태를 부여하는 단어들이 언제나 예측된다면 기민함은 본래의 특성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그런 말보다 과거에존재한 표현을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진중하게, 때로는 답답할정도로 새로운 표현을 찾아내려고 심혈을 기울인 말을 더 좋아한다. 그런 말을 만나면, 나는 지금까지 시도한 느림에 대한찬양에서 다시 한번 위안을 얻는다.

따라서 연속성보다 불연속성을 중시하고, 신중한 태도보다돌발적인 행동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듯하다.
철학의 불확정성이란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나는이런 돌발적인 기습의 원칙에 정반대의 원칙, 하지만 그 역시제도화된 원칙을 견주어보려 한다. 바로 망설임의 원칙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회와 반박, 준비와 후퇴 등이 당사자의 마음속에서 맴돈다는 원칙이다. 우리가 이런 망설임을 거의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나는 그런 망설임의 흔적들을 떨쳐내고 싶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침묵의 늪에 몰아넣었다. 세상이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뛰어난 노래를 부르는 걸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덕분에 우리는 세상에 가득했던 신들, 강과 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신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또 현대 과학은 원자를 숫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세상을방정식과 십진법으로 환원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몇 걸음만더 내디디면 세상의 입을 완전히 부리망으로 씌울 수 있다.

이제부터 나는 더는 우물쭈물하지 않을 것이다. 매사에 조심하는 태도를 버릴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느림의 예찬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밀고 나갈 것이다. 느림은 내가 세상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삶의 방식이기때문이다.

문화의 과잉에 대한 불평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있을까? 이런 불평은 어떤 사람이 너무 지적이거나 너무 친절하다고 혹은 너무 예쁘다고 비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문화의 과잉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경계심을 품어야 한다. 문화의 영역이 아닌 영역들까지 침범하면서 문화 자체와 어떤 면에서문화를 벗어난 분야까지 탈진시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또 문화의 소멸을 한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마당에 문화의 과잉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개인은 온갖 형태의 몰수와 조작 및 반드시 떨쳐내야 할 막연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발언권과 욕망을 빼앗길 수 있다. 문화는 사치품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심심풀이를 위한오락거리도 아니다. 문화는 내가 나 자신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문화는 우리가 더큰 행복을 얻기 위해 소유하고 사용하는 재화의 집합체만이아니다. 문화는 우리를 창조의 과정에 끌어들여서 우리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우리에게 제안된 것을 받아들여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실업으로 삶의 형편이 어려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반드시 불합리한 행동을 강요당하지는 않는 듯하다. 오히려 은퇴자들즉 경제활동에서 은퇴한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열정을 뜨겁게 드러내 보인다. 따라서 그들이 뒤늦게라도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하다.

공간을 문화적으로 점령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몰지각하게 시간마저 점령하겠다고 공언했다. 고대 문명을 넘어 문명의 요람까지, 더 나아가서는 선사시대의 발전 단계까지 밝히겠다고 나섰다. 또 세상을 떠난 후로 영생의 안식을 얻었으리라 추정되던 죽은 사람들까지 되살려냈다. 고대문화의 대열병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었는데! 우리는 제단과 석기, 두개골과 유골, 동굴을발굴해내면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재활용하며, 거기에서 인류를 위해 최대한의 이익을 끌어내려 애썼다. 그것들이 우리를태어나게 해주지 않았던가. 따라서 내 생각에 우리는 경건한마음으로 조용히 그 유물들을 생각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것들은 우리에게서 그런 감사의 행위를 당연히 받을 만했다.

이런 불안감이 정당한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문화제국주의의 불안한 징조들을 지적해왔다고 생각한다. 현재 존재하는다양한 형태의 차별에 문화적인 차별까지 더해질 수 있다는징조들 말이다.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문화는 약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위험과 위기에 직면할때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에 다가가야 하는 순간을 뒤로 미루는 핑계와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 지구를 내보이며 자랑하고,
지구의 모든 부를 발굴해내려는 갸륵한 욕심에 지구를 약탈하지만 않는다면 불안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요즘에는 자주 사용되지 않지만 ‘지각하는 사람‘
이란 표현은 과거에 경멸적인 의미로 쓰였다. 지각하는 사람은 우연히 늦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학교생활과 소풍 약속 시간, 성당 예배 시간에 정확히 나타나지 못하는 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집단의 질서에 해를 끼쳤지만, 그 대가로 악의없는 질책을 받는 것으로 끝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가악의적으로 지각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그는 학교가 시작하는 날부터 다른 학생들보다 늦게 도착했고, 그 못된 습관을 결단코 버리지 못했다.

느림은 그 자체로는 어떤 가치도 없다. 우리가8
불필요하고 헛된 계획에 힘을 쏟지 않고 우리 사회 내에서 명예롭게 살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느림이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끝내느냐는 그다지중요하지 않다. 수직적인 접근 방법을 어떤 의미에서의 수평적인 시각으로 바꿔보자. 예컨대 우리에게 제안되는 것에 개입하는 정도에서, 움켜잡지 않고 살짝 건드리기만 하겠다고맹세해보자. 그럼,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현재의 모습, 앞으로 선택하기로 합의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본연의 속도로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릿하게 우리를 향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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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극한 상황까지 치닫고 싶었고, 피로감 덕분에 그런극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가 솔직하게 인정한 피로감이었고,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피로감이었다. 그러나 공평하기 위해서는 도시까지도 ‘피로하게 만들어야 했다. 우리가잔혹하기 때문도 아니었고, 도시의 약점을 잡아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곳 주민들이나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도시의 진정한 얼굴을 우리에게드러내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면 적어도 우리 자신의목소리를 듣지 않는 효과가 있다. 예컨대 주변에서 흔히 충고하는 ‘우리 몸의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이 잘못된 충고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몸이 대상과 주체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먼저 대상으로서 몸은 결코 완전히 우리 자신이 아니며, 우리가 몸을 보살피는 모양새를 띤다. 한편, 주체로서의 몸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우리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우리 각자가 대화에서 차례로 주도권을 쥐는 것처럼, 듣기도 대화에서 소극적인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상대의 말이 어렵지 않게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창조적인 내면성과 주의력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듣지 않으면, 결국 같은 말이지만 건성으로 들으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것과 다를바 없다. 하지만 타인의 말, 모든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걸 사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북하게 느껴질 때가 적지 않다. 그래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내 말에만 귀 기울여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리스도는 너를 위해서 그렇게 피를 흘리셨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좋아한다.

여하튼 존재론적인 경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안에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 공간은 순전히 내 노력으로만 마련될 수있다. 폴 리쾨르 * 같은 철학자들은 이런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서, 얼핏 생각하면 모순되는 표현, 즉 ‘적극적인 수용성 réceptivitéactiv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런 권태 못지않게 우리가 조심하고 피해야 하는 또 하나권태가 있다. 이 권태의 영향권에 든 사람은 어떤 것에도 감동하지 못한다. 그는 뭔가에 관심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무엇(과일, 사람, 건물 등)에 몸을 던져 달려드는 적극성이 없다. 따라서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공연,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을 소개해줘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가 과거에는 그런것들을 좋아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런 것들에 대한 의욕을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상황을 힘들어하지만 벗어날수 없다. 그의 의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시각장애인을 나무라고 말을 하지 못한다고 실어증 환자를 질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지진 등 어떤 것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가 사서 고통을견디는 이유는 그의 가치관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고통을 몸으로 직접 느끼며 저항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살아갈 도시, 밥벌이를 위한 직업, 평생을 함께할 미래의 반려자와 친구를 선택할 때 지혜의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선택한 도시가 조그만 충격에도 뒤흔들리고, 무책임한 말을 쏟아내며, 매일 아침 새로운 얼굴을 드러내고, 문화적 활동들을 끊임없이 계획한다면, 또 도시가 장벽을 높이 쌓아가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는 다시 저항의 깃발을 치켜든다면, 당신은 봇물 터지듯 닥쳐오는 사건을 피할 수 없게 되고결국에는 그런 상황에 길들여질 것이다. 따라서 아무 사건도일어나지 않고 달콤했던 시간, 다시 말해서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아 순수하게 시간만 흘러가던 시간을 까맣게 잊게 될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권태의 원인은 현재의 우리 위치에 대한 현기증에서 비롯된다. 또한, 여러 사람이 확신하며 즐겁게비슷한 상태에 있게 될 때, ‘불확실‘, ‘전부‘와 ‘전무‘라는 상황앞에서 겪는 그런 번민은 사라진다.

나는 내게 허용된 자유를 지키고 싶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나 자신과 관련된 것에서 변화를 도모한다. 어떤 제약도 없이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내가 어떤 근본적인 권태에 몰두했다는걸 깨달으면, 그런 나를 질책한다. 권태롭다는 것은, 우리가 상대에게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걸 어떤 식으로든 알리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고 지금도 많은 선물을 아낌없이 받는 내가 그런 세상을 권태롭게 대했다면 나는 배은망덕한놈이 된다. 또한, 진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불만을 터뜨리는 응석받이 꼬마처럼 행동하는 셈이 된다. 이런 자책이 있고 나서도 나는 다시 속임수에 놀아나며 이리저리 채인다. 결국 나는 다시 권태에 의지하게 된다. 권태만이 나를 노예처럼 부렸던 세상의 힘들로부터 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는 활기찬 생명력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순수한 충동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충동이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하고 그러지 않는 것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만을 기억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절제된 권태를 권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어떤 편견도 없이 권태를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미래는 두 가지 방법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두 방법은 각각다른 철학으로 뒷받침된다. 하나는 의지주의적 방법으로, 이방법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약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미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자주적으로 우리 자신을 미래의 시간에 투영해본다. 우리가이루어내려는 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거리가 미래라 일컬어진다. 미래의 계획을 포기한 사람은 짧은 시간의 폭에 갇혀버린다. 이런 경우에 기다림은 물건이 배달되는 시간, 혹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용해야 하는 교통수단과 지름길을합산한 시간이란 뜻이다.

벌그러나 기다리던 행복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다른 모든 즐거움에 대해서는 하나의 징조를 정해두었다.
봄이 정말로 돌아왔을 때, 다시 말해서 오월에야 문을 여는 술집이 있다. 단골손님은 물론이고 뜨내기손님도 저녁이면 시원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팔월의 숨 막히는 열기도 없다. 한여름에도 그곳 기온은 견딜 만하다. 튀긴 요리를 먹을 수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춤까지 출 수 있다. 강물은 청록빛을 띠어, 물고기가 무척 많을 거라는 생각까지 떠오르게 한다.
사람들은 쌍쌍이 강변을 거닌다(모두가 합법적인 관계일까?).
별들이 그 술집의 오색 등불 위에서 흔들리며 단골손님들의얼굴을 환히 비춘다.

성당에서 의자 사용료를 받는 여자들과 어둑한 성당에서 행해지는 그들의 하찮고 비천한 역할과 편협한 사고방식을 대놓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그들의 사고방식을 세밀히 조사해서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고약한냄새를 풍기고 때로는 콧수염까지 듬성듬성 보이던 그녀들은자신들에게 맡겨진 성직을 충실히 이행하며 그렇게 늙어갔을것이다. 그녀들의 몸에 양초 냄새와 짙은 백합 향이 배고, 대체로 그녀들이 거의 씻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성당에서 가장 덜 영광스럽더라도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부분이그녀들의 몸에 스며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믿음을 유지한 채 계속 사랑하기를 바라며, 두 손을 이리저리 분주하게 놀리지 않고 다소곳이 모은다.
기도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한길을 택하고, 옅은 빛이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해주기를 바라는것과 같다.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사물과 사람이 존재하는 걸 깨닫는다. 우리는 이런 깨달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와 다른 존재를 발견하면 오싹한 한기가 밀려오고 그런 충격에서 회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것, 즉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레디메이드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언어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언어를 찾아내거나 언어에서 몇몇 요소의 위치를 바꿔놓을 뿐이다."

예컨대 사월의 화창한 아침에 한 남자가 분홍빛 포도주를앞에 두고 카페 테라스에 혼자 앉아 있다. 그는 아직 포도주에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하늘은 청명하고, 거리에는 정겨움이 넘쳐흐르며, 누구도 귀찮게 굴지 않았다. 그 때문에만 그가 행복하게 보였던 것일까? 분홍빛 포도주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분홍빛 포도주가중대한 역할을 하며 그날 아침의 특별한 다른 요인들과 겹쳐졌기 때문일까? 테이블에 놓인 투명한 잔은 햇살을 받아들이며 경쾌한 세상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질서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든 그 역할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하지 않고 포도주잔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듯하다.

시의 역할이 존재의 일부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이고, 시가 때로는 인간과 장소와 계절의 미묘하고 은밀하며 감동적인일치에서 잉태된다면, 일상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풍습 자체가시적인 행위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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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나는 누구였고, 지금은 누구인가? 언제 내가 내 운명을 저버렸고, 언제부터 내 운명을 받아들였던가?"
요컨대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자신에게 주어진 인간 조건에과감히 맞서보라는 뜻이다.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들, 이 땅에존재하지 않게 될 때 영원히 어둠에 묻혀버릴 사람들의 이미지를 간직하기 위해서 그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라는 뜻이다.

기계가 인력의 많은 부분을 대신하게 되면서부터 여가 사회를 재정비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사회학자들, 특히 앙드레고르스*처럼 유토피아를 꿈꾼 학자들은 한가한 시간을 새롭게 활용하는 법을 제안했다. 사회학자들은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제안들에는 약간 빡빡한 면이 있었다. 새로운 문화를 맞이한 시민들의 하루하루는 다양하고 매력적인활동들로 채워져서, 지금의 우리 사회가 편안하고 한가롭게보일 지경이었다. 무사태평하게 이것저것을 집적거린다는 건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마르크스도 일찌감치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에는 사냥꾼도 될 수 있고 몽상가도 될 수 있으며낚시꾼도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의 글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띠었고, 여가에도 실제 생활과 똑같은 압력이 가해질 거라는 걸 예측하지 못했다.

사르트르는 이런 상황을 일찍이 지적하며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모두에게 책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문자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끝없이 더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결의를 다지거나, 반대로 끝없이 계속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어 낙담하게 된다는 의미다. 전자의 경우라면, 초인은 더는 엘리트에게만 한정된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이상이 아니다. 곧우리 대부분이 체격과 지능, 의지와 능력에서 인간의 한계를넘어서게 될 것이다. 이미 새 세대는 정보통신기기를 다루는데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인간의 몸을정교하게 조작해서 몸의 힘을 다시 만들어가는 중이다.

한가로이 걷는다는 것은 시간을 멈추는 게 아니라, 시간에 떼밀리지 않고 그 흐름에 순응한다는뜻이다. 한가로이 걷기 위해서는 여유로움이 전제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주목하라. 주목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는가?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있는가?..…더욱 냉철하게 관찰해야 한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낯선도시에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주변 전체가 낯선 곳으로 변하고, 눈앞의 공간이 도시, 도로, 건물, 인도··· 라고 불린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한가롭게 걷는 사람은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기적과 성지를 새롭게 찾아내려는 계획에 참여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경이로운 숲을 거닐듯이도시를 산책하며 영감을 얻는 예술가들과 다르다. 예컨대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발걸음이 닿는 대로걷다 보면 나는 항상 그곳에 와 있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거의언제나 그곳에 간다. 이 막연한 현상, 즉 나에게 그곳에 가라고부추기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한가로이 걷기‘는 산책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물론 한가로이 걷기도 흔히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소화에 도움이 되고, 맑은 공기를 허파에 가득 채울 수 있어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ㄴ무엇보다 일반적인 길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도시를 등지는 출발점이 아니라 우리를 대화나 명상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점이었다. 도시와 공원과 구역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의 생각이 달아나고 주의력이 분산되는 걸 막아주는울타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반면에 유명한 유적들은 우리 입씨름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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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잡을 수 없이 수다스러워지다가 무엇에 놀란 것처럼 입을다물었다. 수다가 걷잡을 수 없었던 것보다 더 지독하게 수치심을걷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실수로 중인환시에 속바지를 까내렸다가치켜올린 것처럼 황당하고 망신스러웠다. 다행히 그가 내 치부를본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속으로 그럴 리가 없어, 저 자식은시방 능청을 떨고 있는 거야라고 은근히 겁을 먹고 있었다.

그래 난 당신처럼 딸만 있는 주제에 천연덕스럽게 행복한 체할 수있는 남자가 이 땅에 있다는 게 께름칙한 걸 떨쳐버리지 않으면 미치겠단 말야, 이런 눈빛으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뭐 이런여자가 다 있나 진저리가 난 티를 감추지 않다가 용케 자제하고 냉정한 얼굴이 됐다. 나는 그가 억지로 가다듬은 냉정 뒤에 지친 듯 희미한 연민이 번득이는 걸 본 것처럼 느꼈지만 어째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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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따뜻한 말이 피워 낸 봄이었다. 문을 닫기 전에 나는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내가 나가자마자불을 끈 방 안은 어두침침했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시선은 하염없이 내 뒤를 좇고 있었다. 오래 햇빛을 보지 않아 희디흰 어머니의 얼굴은 이지러진 데 하나 없는 보름달 같았다. 내 걸음걸음보름달의 환한 빛이 고여 있었다.

나중에 술집에서 장을 만났을 때, 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죽었을 때, 모두 그녀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소. 아무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장의 표현에 따르자면, 장은 일곱 살짜리 아들과 함께 이 세상에 "덩그렇게 남겨졌다.".

장의 아들은 열두세 살 때부터 이미 록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특히 록 밴드 파셀(PARCEL)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장은 아들이열다섯 살이 되던 날, 아들을 데리고 파셀의 콘서트에 갔다. 나중에 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콘서트날과 우리 아들의 생일이 같은날짜였다는 게 정말 기막힌 우연 아니오?" 사람들은 그날 이후로장이 변했다고 말한다. 한은 이렇게 말했다. "소장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것 같아."

"오늘은 첫날이라 스타벅스에서 모인 거고, 다음 스터디부터는학교 세미나실 빌려서 모이는 거 맞죠? 스터디 모집할 때 학교에서 할 거라고 올려놓고 이렇게 하루 전에 장소 바꾸는 건 경우가아니라고 보는데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은호에게 따지듯 묻고 있었다. 은호는 진땀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사과까지했다. 예약이 마감되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앞으로는 미리 예약을 해서 학교에서 스터디를 하도록 하겠다며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서울에 다니러 온 엄마는 내 자취방에 누워 태어나서 이렇게 좋은 이불은 처음 덮어 본다고 말했다. 사람은 역시 베풀고 살아야한다고, 어렵게 사는 동생을 거둔 은덕이 돌아왔다고 말하는 엄마에게서 이모를 험담하고 은근히 따돌리던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수 없었다.

그일 때문에 우리가 헤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더 이상 복구가 어려운 수준으로 관계가 망가졌을 때 이별이라는 수순을 밟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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