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범벅을 만들면서 어머니가 신바람을 내셨으면 좋으련만.
영주는 좀 망연해진다. 어머니는 아직도 호박범벅을 만드실 수가 있을까. 이까짓 호박 따위로 어머니를 시험하려 들지 말아야한다. 이해해야 한다. 푸성귀를 다듬어 반찬을 만들고, 생선 비늘을 긁어 절이거나 조리고, 국이나 찌개 간을 보는 일을 반백년이 넘게 허구한 날 되풀이하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신바람이나서 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 재미없음의 핑계를 학생들의 질이나 자신의 실력 부족으로 돌릴 수도 있으련만 그녀는 지식이라는 것을 통틀어서 비하하느라 허탈해지기도 하고 울적해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아니꼽기 짝이 없는 정서불안증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아직도 새벽일까. 부유스름한 미명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돋이를 기다렸을까. 하영이 호텔에들 때 동해의 일출 같은 건 염두에 둔 바 없었다. 키를 받을 때동해의 일출을 볼 수 있는 방이라고 프런트의 아가씨가 생색내듯이 말하는 걸 듣고도 고맙다든가 잘됐다든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동해의 일출이란 딱딱한 말은 하영에게 아무런 연상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눈뜨자마자 모로 누워 줄창 창밖을 보고 있었던 것은 그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늙은이처럼 뭉그적대며 일어나 창가로 갔다. 완만한해안선과 넓은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였다. 여름날 툭하면 텔레비전 화면이 비춰주던 이름난 해수욕장이었다. 아직도 한낮의 늦더위는 복중 못지않건만 바닷가는 씻은 듯 정결하고 고요했다.
인적 없는 쓸쓸함에 이끌려 그녀는 부랴부랴 옷을 주워입고 방을 나섰다.

그 자리를 등지고 걷는 동안 줄창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모래사장에서 차의 지문을 지우기에 알맞은 바람이라고 하영은 생각했다. 어느 만큼 걸었는지 횟집 거리와는 분위기가 다른 거리가나타났다. 집집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간판이붙은 동네였다. 거의가 초당두부 간판이었다. 원조, 옛날, 진짜,
무공해, 완전자연, 할머니 솜씨 등 각기 다른 말로 자기 집 두부야말로 진짜배기 초당두부라는 걸 강조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하영에게 자신의 의지나 의식과는상관없는, 남을 해코지하는 어떤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명확해진 것은

어머니가 얼마나 완벽하고 당당하고 한결같이 인고의 세월을견디어냈는지는 친척간에도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그로 말미암아어머니에게 늘 따라다니는 품위에다가 위엄 같은 게 어릴 적엔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사춘기를 거치고 인생에 대해 뭘좀아는 척을 하고 싶어지면서부터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자존심 없는 사람을 가장 경멸스러워할 때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자존심이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가 자존심은커녕 배알도 빼놓은 여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자존심이란 적어도 익으면 돌돌 말리게 돼 있는 오징어 따위를 반듯하게 익히려고 일직선으로 꿰는 쇠꼬챙이하고는 달라야 할 것 같았다.

넌 연애결혼이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서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일러두는 건데, 혹시 첫날밤 네 신랑이 제 부모 잘 모셔야한다는 소리를 제일 먼저 하거나 계집은 또 얻을 수 있어도 부모는 또 얻을 수 없다는 식의 수작을 하거든. 그 자리에서 그 혼인파투 치고 나와도 나는 너를 내치지 않으마. 야단도 안 치마. 그쪽만 귀하게 기른 자식인 줄 알지 말거라. 너도 똑같이 귀하게 길렀어.

어머니 옷갈피에는 어디서 난 건지 흔히 향(香) 비누라고 일컫는 냄새 좋은 세숫비누가 구메구메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엔 옷장 버선 갈피마다에서 지폐가 쏟아져나왔다고 하더어머니는 향비누였다. 화장품을 살 때 선물로 얹어주는 작은향수병도 몇 개 마개가 헐겁게 닫힌 채 들어 있었다. 행여 늙은이 냄새가 날세라 그렇게 철저히 대비를 했던 것이다. 몸으로도마음으로도 추레해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던 어머니다운 자기관리였다.

후기 졸업식은 처음이었다. 후기 졸업식을 코스모스 졸업식이라고도 한다는 소리를 어디선지 들은 것 같지만 그 가냘픈 꽃들이 피어나게 할 산들바람이 스며들 여지가 있을 것 같지 않게 늦더위는 견고하고도 끈끈했다.

온몸 도처에서 개칠한 냉기를뚫고 열꽃처럼 피어나는 열망에 그녀는 으스스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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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 대신 아직도 손님 사이를 누비며 인사치레하기에바쁜 장조카며느리를 눈으로 찾았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잽싸게 큰동서를 찾아낸 둘째는 큰일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올라갈 걱정도 안 하고 바보처럼 느릿느릿 답답한 동작으로 비프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내 걱정을 했다.
"아직은 늦지 않았을 거야. 지금부터라도 서두르면・・・・・

역까지 저희들끼리 이렇게 찧고 까부느라 더는 나한테 끼어들새를 주지 않았다. 대구역에서 주차장이 만원이라고 휙휙 호루라기를 불며 진입을 막는 것을 기화로 그들은 나를 짐짝처럼 내려놓기만 하고 가버렸다. 부창부수해서 얼씨구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표를 살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걱정보다는 우선 그 눈꼴사나운 수작에서 놓여난 것만 해도시원해서 살 것 같았다. 형국이 형석이 내외는 내 앞에서 저러지는 않는다고, 내 자식들 두둔하고 싶은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도 밖의 그를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멋쟁이일 뿐아니라 체중관리도 잘한 것 같았다. 배도 안 나오고 다리도 길고걸음걸이는 여유 있고도 늠름했다. 나는 선반 위에 얌전히 개켜진 채로 있는 그의 트렌치코트를 쳐다보았다. 같은 상표는 아니지만 나도 꽤 괜찮은 바바리코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놈의 폐백만 아니었으면 나도 그걸 입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지금보다 적어도 십 년은 젊어 보였을 것이다.

그가 식구처럼 아낀다는 진돗개얘기를 하자 나는 마치 개 소리만 들어도 알레르기를 일으키는사람처럼 요란스럽게 질색을 했다. 그 모든 짓거리들이 그렇게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여북해야 자정이 넘었는데도 벌써 서울인가 싶었을까.

그의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직함 없이 이름 석자하고 집과 사무실 전화번호만 들어 있는 간결한 명함이었다. 내가 그에 대해 뭘 안다고 나는 그게 그답다고 여겨져 더욱 호감이간다. 뭐 하는 사무실인지는 그닥 궁금하지 않다.

거울이 크지 않았다. 거기에 하반신만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나는 세 번 임신했고 삼남매를 두었지만 실은 네 아이를 낳아 셋을 기른 거였다. 세번째임신이 쌍둥이였다. 그중 아우를 돌 안에 잃었다. 쌍둥이까지 밴 적이 있는배꼽 아래는 참담했다. 볼록 나온 아랫배가 치골을 향해 급경사를 이루면서 비틀어짜 말린 명주빨래 같은 주름살이 늘쩍지근하게 처져 있었다. 어제오늘 사이에 그렇게 된 게 아니련만 그 추악함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욕실 안의 김 서린 거울에다 상반신만 비춰보면 내 몸도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또한 욕조에 잠겨서나 나와서나 내 몸 중에서 보고 싶은 곳만 보고 즐기려는 마음도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급히 바닥에 깔고 있던 타월로추한 부분을 가리면서 죽는 날까지 그곳만은, 거울 너에게도 보이나 봐라, 하고 다짐했다.

해가 바뀌니 환갑해였다. 낳은 해의 육감이 한 바퀴를 돌아온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육갑을 한다‘는 게 결코 칭찬이 아닐 텐데 너도 나도 내 앞에서 육갑을 하려 들었다. 설날 아침 큰아들도 전화로 세배를 대신한다며 그 얘기부터 했다. 나더러 회갑잔치 대신 미국 구경을 오라는 거였다. 나만 좋다면 잔치는 칠순으로 미루고 그렇게 하기로 저희들 삼남매끼리는 벌써 합의를본 모양이었다.

"요는 네 에밀 시집을 보내겠다는 게냐, 시방."
"사랑하시잖아요? 살기가 어렵거나 모시겠다는 자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하는 재혼, 얼마나 근사해 누가 뭐래도난 엄마를 변호하고 자랑스러워할 거야."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사랑 타령을 하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만보았다. 속으로는 제까짓 게 사랑에 대해 뭘 안다구, 사랑이 별거라던? 인생 그 자체일 뿐인 것을, 이렇게 가볍게 만들려고 할수록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긴 했다.

정열이라 지금 조박사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그게 없었다. 연애감정은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정욕이 비어 있었다. 정서로충족되는 연애는 겉멋에 불과했다. 나는 그와 그럴듯한 겉멋을부려본 데 지나지 않았나보다. 정욕이 눈을 가리지 않으니까 너무도 빠안히 모든 것이 보였다. 아무리 멋쟁이라고 해도 어쩔 수없이 닥칠 늙음의 속성들이 그렇게 투명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내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드러날 기름기 없이 처진 속살과 거기서 우수수 떨굴 비듬, 태산준령을 넘는 것처럼 버겁고 자지러지는 코곪, 아무 데나 함부로 터는 담뱃재, 카악기를 쓰듯이 목을빼고 끌어올린 진한 가래, 일부러 엉덩이를 들고 뀌는 줄방귀제아무리 거드름을 피워봤자 위액 냄새만 나는 트림, 제 입밖에 모르는 게걸스러운 식욕,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 된 끝없는 잔소리, 백 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인색함, 그런 것들이 너무도빤히 보였다.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는 것은 사랑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면 안 되리라.
겉멋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재고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 곧 미국 갈 수속중인데 될 수 있으면 오래 머물 거란 얘기를 하고 나서 그의 반지 낀 손 위에다 내 손을 정성스럽게 포개면서, 한 번 과부 된 것도 억울한데 두 번씩 과부 될지도 모르는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완곡하게 말한다는 게 심하게 들리지나 않았을까.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것도읽어낼 수 없었다.

그 동네를 원주민 동네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초가집이나조선 기와집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60년대에 유행한 슬래브집들이 수리를 안 해 퇴락한데다가 좁고 더러운 골목길 때문에실제의 나이보다 훨씬 더 낡고 흉흉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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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오늘의 종교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의 주인공으로오늘의 세계를 누리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전생을 묻거나 내생을알고자 하면, 침묵으로 답변하신 큰 스승이시다. 연기법칙과 중도사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여주시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서 윤회하는 존재이다[生輪廻] 살아서 극락정토를 누리는 주체임[現生淨土]을 잊지 말일이다.

‘당생윤회(當生輪廻) 현생정토(現生淨土)‘이다. 사바세계를 떠나 정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곳이 곧 정토요 만나는 사람이 그대로 부처이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다. 선지식은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요 착한 벗인 것이다. 깨달음을 신비주의로 몰아가지말 일이다.

깨닫기 이전에도 사람이요 깨달은 이후에도 사람이다. 깨닫기 이전엔 ‘눈, 귀, 코, 입, 몸, 뜻‘으로 경계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는사람이지만, 깨달은 이후엔 오온(五蘊)과 육경(六)에서 집착하지않는 자유로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임제록』에서 말하고있는 참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상과 철학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간다. 그러므로 우리네 삶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고 빛과 어둠이 뒤엉키며종교의 신앙마저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열 명의 애인이 있어도채울 수 없고 주머니가 빵빵해도 허기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집착하지 말 일이다.
사람이 앓는 모든 병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내가 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듯 그 누구도 나의 것이 영원히 될 수 없을 터이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한말뚝에 두번 넘어진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 사람을 잘못 사귄 뒤의 후유증이다."
"잠못이룬자에게 밤은 길고피곤한자에게 길은 멀다."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뀌고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린다."
"집착은 키울수록 병이 되고 욕심은 버릴수록 아름답다."

탈무드』에서는 "친구는 두세 급 위로 사귀고,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있어도 두 눈은 하늘의 북극성에 두어야 한다."라고 했고,
또한 『백범어록』에서는 "손바닥으로 태산을 움켜쥐어 호랑이가손바닥에서 울게 하고, 입으로 바다를 들여 마셔 고래가 뱃속에서놀게 하라."는 말씀도 만날 수 있다.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뀐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린다.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있거나 관습의 벽을 깨지 못하면,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줄탁동시(醉啄同時)처럼 어미닭과 알 안의 병아리가 동시에 알의 껍질을 깨뜨려야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의 탄생이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의 빗장이 닫혀 있으면 어둠이 몰려올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어야 시야가 트이고 빛의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이 열리면 세상도 열리기 때문이다. 마음은 또 하나의 요술단지이며, 넓히면 우주를 담고 좁히면 바늘 하나 꽂을곳이 없는 것이다.
마음 넓히는 게 수행의 기본 덕목이다. 큰 바다는 또랑물을마다하지 않는다. 바다처럼 큰마음으로 차별 없이 받아들이며 살일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연속인 것이다.
거친 말과 행동에는 어둠이 몰리고, 부드러운 말과 행위에는 빛이모여들게 된다. 살펴보면 미운 자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입장바꿔 헤아려보면, 버리고 멀리해야 할 미운 자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삶은 경쟁이다. 전쟁놀이이자 파워게임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낙오자의 길을 걷게 된다. 전쟁놀이에서 패배하면 암흑의 터널에갇히게 된다. 파워게임에서 힘의 논리에 밀리게 되면 이용당하는자로 살게 된다.

"비구들이여 전도(傳道)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아 처음도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논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가르쳐라.
또한 원만무결하고 청정한 내용을 말하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지만, 법(法)을 듣지 못한다면 더욱 악(惡)에떨어지고 말리라. 그들이 법의 드러난 진리를 들으면 깨달음에 이를 게 아니겠는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베라의 장군촌으로 가겠다."

"세상에서가장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것이다."
"다른사람에게 쉽게 열어주지 않는 문을 그대에게만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스승이자벗이다."
"사막이 아름다운것은어디쯤에 오아시스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과 꾸밈이 없어야 친구이고 감춤과 드러냄이 없어야 도반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스승이요 착한 벗이 되는 것이다. 부모처럼 챙겨주고 형제자매처럼 받아들이는 버팀목 디딤돌이 친구의 힘이자 빛인 것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벽암록』 7칙에 있는 공안(公案)입니다. 혜초라는 이름의 구도자가 법안 선사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그대가 혜초로구나‘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대는 혜초가 아니로구나."

한 선객이 내게 물었다.
"스님을 가운데 두고 큰 동그라미를 그려놓을 경우 스님께서는 그 동그라미의 선(線)을 지우지도 넘어오지도 말고 밖으로 나올수 있으십니까?"
하여, 내가 말하였다.
"스님께서 먼저 선을 넘지도 지우지도 말고 내 있는 곳으로들어오시구려. 그럼 그때 내가 나가리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獅)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의 경전 중에 가장 오래전에 결집된 것으로 알려진, 『숫타니파타의 사품(蛇品)에 담겨 있는 구절이다. 세상에 떠다니는크고 작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이고 싶다. 촘촘히 엮여 있는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머물이 없는 바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살이가 고단하고 팍팍해도, 남의 탓이 아닌내 탓으로 갈무리하며 진흙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살고 싶다

‘중(中)‘은 ‘정(正)‘인 것이다. ‘가운데 중(中)‘으로 헤매지 말고
‘누릴 중(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중(中)과 정(正)에는 변두리와모서리, 좌(左)와 우(右)도 없는 것이다. 대(對)와 변(邊)에서 자유로운 것이 중(中)이요, 사(邪)와 미(迷)에 얽매임이 없는 게 정(正)이기때문이다. 발길 닿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요 정토(淨土)이며, 만나는사람이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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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마음이 몹시도 아프구나. 이 세상에는 그 어느 것도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란다. 우리처럼 이렇게 만나면 이내 헤어지는 아픔 속에서 나날이 철이 들고, 철이 들면서 서서히 사라져가는것이란다. 너와나그리고 우리 모두는……"

인생은 여행이라며 끊임없이 떠나가는 여행이라며, 아마도그럴 수 있다. 드러누운 채 뼈만 남긴 나무의 뿌리처럼 여행지에서사라져갈 운명일 수 있다. 그래도 돈황석굴의 부처님처럼 잔잔한미소 속에 사라질 수 있다면, 녹두죽도잣죽도 마다하며 누운 땅을온돌방 삼아 사라질 수 있다면, 머물없이 살다가 자유롭게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노인이 앉았다가 젊은이로 바뀌고, 고운 얼굴에서 미운 얼굴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도 시간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황량한 벌판을 지날 때도 있고 옥수수밭, 해바라기꽃밭을 지날 때도 있다. 강물에 멱감는 아이들도 볼 수 있고 염소떼를 몰고 가는 목동도 볼 수 있다. 건널목에서 만나는 풍경도 지역에 따라 사람의 차림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다.

장수와 관련하여 한마디 덧붙이자면, 예전 장수하는 노인들은 보약을 먹거나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습관처럼호미나 괭이를 들고 들에 나가 일을 했을 뿐이다. 틈이 나는 대로잡초 뽑는 일을 하였고 허드렛일을 찾아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던것이다. 그들 장수 노인들에 있어 부지런함은 보약이었고 운동이었으며 장수비결이 되었던 것이다. 장수 노인들은 한결같이 규칙적인 생활에 즐기는 음식을 소량으로 섭취하며 긍정적인 마음 자세로 이웃 돌봄과 나눔을 실천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행복은 느끼는 것이요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따라 눈높이에 따라 행복의 현주소가 바뀔 수 있다. 같은 환경, 같은 처지임에도 사람에 따라 행복과불행을 느끼는 마음의 온도는 다른 것이다. 세상의 절반은 빛이요절반은 어둠이다. 절반은 행복하고 절반은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텅 빈 충만‘에 이른 자를 선지식이라 한다. 선지식이란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 될 수 있고 아무에게나 착한 벗이 될 수 있는사람이다. 누구나 행복인, 자유인, 선지식이 될 수 있다. 벗어버리자, 집착의 병을 놓아버리자,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이르는 곳마다 행복하게 자유인이 되어 살아볼 일이다.
20세상은 마음 열린 자, 그들만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이 효령과 충령 사이에서, 술주정뱅이 행세로 주유천하하며 천수를 누릴 때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약이 되었을터이다. 흥선대원군도 술주정꾼이나 투전꾼 행세로 상갓집 개취급을 받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이 또한지나가리라‘를 뼛속까지 새기며 훗날 한나라의 전권을 손아귀에 넣는 꿈을 키웠으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누구에게나 약이 되고 힘이 되는 참좋은 말씀이다. 좌절과 실망과 어둠 속에서 헤맬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주술 삼아마음에 새길 일이다.

나지도않고 멸하지도 않으며(不生不滅)항상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며(不常亦不斷)같지도않고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亦不異)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來亦不去)

속이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다. 드러내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는다.
비어 있으나 가득하고, 가득하나 비어 있다. 지음[作]이 없으나 작용(作用)이 있고, 작용이 있으나 머물이 없다. 보고 듣고 오고가는것이 오고가고 보고 듣는 것일 뿐 더함도 덜함도 없다. 하나를 보여도 열을 보이는 것이요, 열을 보여도 하나를 감추지 않는다. 빛과 어둠이 둘이 아닌 하나이나 그 하나에도 머물지 않는다. 진리는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다.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드러나있다. 물처럼 공기처럼 내 곁에 있다.

삼매에 이르는 길은 마음챙김과 행위 멈춤의 간절심에 달려있다. 일주일을 잠들지 않아도 피곤하거나 나른하거나 육체가 흔들리지 않는다. 정신세계는 더욱 빛으로 충만해 가뿐한잔잔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삼매에 들어 밤낮의 며칠을 환히 밝히지 않고서는,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진리가 입으로만 몰리는 가짜수행자들은 삼매의 세계를 까마득히 잊고 있을 터이다. 마치 전설의 세계처럼 느낄 터이다.

장미꽃은장미 줄기나 잎이나 대궁이나 뿌리에서 찾을수없다.
뿌리와 줄기와 대궁과 잎이 건강할 때,
그리고 그 기능이 작동될 때 장미꽃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햇볕과 흙, 수분과 바람, 자양분이알맞게 골고루 갖추어져 있을때 장미 줄기는 자라고줄기가 건강할때 장미꽃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중도(中道)‘는 유교의 ‘중용(中庸)‘과 다르다. 중용이 유교의오덕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머물러 있다면, 불교의 중도는열린 세상의 열려 있는 진리와 한몸임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중(中)‘을 가운데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중은 ‘정(正)‘이다.
하여, 중(中)에는 버려야 할 변두리가 없고 모서리가 없는 것이다.
발길 닿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 앉아 있는 곳이 정토의 극락세계인 것이다.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처럼 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용수보살의 ‘팔불중도(八不中道)‘처럼, 생김도 없고멸함도 없으며 옴[]도 없고감도 없는 것이다. 같음과 다름이없고,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 것이다. 불교의 중도는 진정한의미에서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오늘의 주인공임을 일깨우는 인간선언인 것이다.
‘가운데 중(中)‘으로 읽지 말 일이다. 중(中)은 정(正)이다. ‘누리는 중(中)‘으로 받아들여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사무치게 살필일이다. 탄생의 첫 외침인 ‘천상천하유아독존‘도 또 다른 중도의외침임을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대(對)와 변(邊)에서 자유로운 게중(中)이라면, 미(迷)와 사(邪)에 얽매임이 없는 게 정(正)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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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와 ‘마시기‘도 기본적인 욕구의 표현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그보다 문화적인 욕구를 의식하고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기본적인 욕구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기와 소스 등 배를 불려주고 원기를 되찾게 해주는 실질적인것에 현혹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먹을 것을 앞에 두면 마냥 행복해하며, 세상의 무분별한 소동은 물론이고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하소연도 무시한다. 그저 의자에 앉아 식물성 음식과 동물성 음식의 상호보완성을 따지며,
이 세상에서 근절할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어가고, 느릿한 소화과정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다른 하나는 모든 흥분 상태가 배제되는 휴식으로, 앞의 휴식보다 더 확실한 휴식이다. 이 휴식에는 어떤 일을 끝냈다는만족감마저 표현되지 않는다. 마음이 평온할 때나 갈등을 일으킬 때도 의식에 영향을 주는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이런 휴식 상태에 이르는 것은 무척 어렵다. 어떤 요소를 인식하면 그에 합당한 이미지가 우리 마음에 그려지게 마련이다. 예컨대수천 년 전부터 요지부동인 산들의 지층,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달리 그 위의 고원지대에 평평하게 펼쳐진 호수를 생각해보라.

결론적으로 약간 씁쓸하지만, 지식인들은 순박한 사람들에게 허용된 이런 형태의 휴식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 지식인은 정의로운 중년의 친구다. 또 증거를 끈질기게 파헤치며 개념을 규명하고,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론적인 대책들을 강구한다. 지식인이 수면의 상품화를 맹렬히 비판하고, 하물며 낮잠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새삼스레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식인은 인간이 냉정함을 되찾고, 세상의 흐름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 데 인간의 위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약함을 혐오하는 듯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하루에게 내 약속을 어기는 때가 있다.
밤에서, 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 때가 그렇다. 시작이 어그러지면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시작하는 게 부끄럽다. 하지만 내일이면 또 다른 새벽이 어김없이 내게 찾아올 것이다.

또한, 느림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도 말하면서 ‘느리게 살아가는 법을 소개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처럼 ‘어떻게 느리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고 일목요연하게 쓰여지지 않아 선뜻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대로 느리게 읽으면서, 다시 말해서 목표를 세우지 말고 시간에도 쫓기지 않으면서 여유 있게 읽다 보면, 얼마든지 자기 나름대로 느리게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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