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범벅을 만들면서 어머니가 신바람을 내셨으면 좋으련만.
영주는 좀 망연해진다. 어머니는 아직도 호박범벅을 만드실 수가 있을까. 이까짓 호박 따위로 어머니를 시험하려 들지 말아야한다. 이해해야 한다. 푸성귀를 다듬어 반찬을 만들고, 생선 비늘을 긁어 절이거나 조리고, 국이나 찌개 간을 보는 일을 반백년이 넘게 허구한 날 되풀이하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신바람이나서 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 재미없음의 핑계를 학생들의 질이나 자신의 실력 부족으로 돌릴 수도 있으련만 그녀는 지식이라는 것을 통틀어서 비하하느라 허탈해지기도 하고 울적해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아니꼽기 짝이 없는 정서불안증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아직도 새벽일까. 부유스름한 미명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돋이를 기다렸을까. 하영이 호텔에들 때 동해의 일출 같은 건 염두에 둔 바 없었다. 키를 받을 때동해의 일출을 볼 수 있는 방이라고 프런트의 아가씨가 생색내듯이 말하는 걸 듣고도 고맙다든가 잘됐다든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동해의 일출이란 딱딱한 말은 하영에게 아무런 연상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눈뜨자마자 모로 누워 줄창 창밖을 보고 있었던 것은 그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늙은이처럼 뭉그적대며 일어나 창가로 갔다. 완만한해안선과 넓은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였다. 여름날 툭하면 텔레비전 화면이 비춰주던 이름난 해수욕장이었다. 아직도 한낮의 늦더위는 복중 못지않건만 바닷가는 씻은 듯 정결하고 고요했다.
인적 없는 쓸쓸함에 이끌려 그녀는 부랴부랴 옷을 주워입고 방을 나섰다.

그 자리를 등지고 걷는 동안 줄창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모래사장에서 차의 지문을 지우기에 알맞은 바람이라고 하영은 생각했다. 어느 만큼 걸었는지 횟집 거리와는 분위기가 다른 거리가나타났다. 집집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간판이붙은 동네였다. 거의가 초당두부 간판이었다. 원조, 옛날, 진짜,
무공해, 완전자연, 할머니 솜씨 등 각기 다른 말로 자기 집 두부야말로 진짜배기 초당두부라는 걸 강조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하영에게 자신의 의지나 의식과는상관없는, 남을 해코지하는 어떤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명확해진 것은

어머니가 얼마나 완벽하고 당당하고 한결같이 인고의 세월을견디어냈는지는 친척간에도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그로 말미암아어머니에게 늘 따라다니는 품위에다가 위엄 같은 게 어릴 적엔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사춘기를 거치고 인생에 대해 뭘좀아는 척을 하고 싶어지면서부터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자존심 없는 사람을 가장 경멸스러워할 때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자존심이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가 자존심은커녕 배알도 빼놓은 여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자존심이란 적어도 익으면 돌돌 말리게 돼 있는 오징어 따위를 반듯하게 익히려고 일직선으로 꿰는 쇠꼬챙이하고는 달라야 할 것 같았다.

넌 연애결혼이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서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일러두는 건데, 혹시 첫날밤 네 신랑이 제 부모 잘 모셔야한다는 소리를 제일 먼저 하거나 계집은 또 얻을 수 있어도 부모는 또 얻을 수 없다는 식의 수작을 하거든. 그 자리에서 그 혼인파투 치고 나와도 나는 너를 내치지 않으마. 야단도 안 치마. 그쪽만 귀하게 기른 자식인 줄 알지 말거라. 너도 똑같이 귀하게 길렀어.

어머니 옷갈피에는 어디서 난 건지 흔히 향(香) 비누라고 일컫는 냄새 좋은 세숫비누가 구메구메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엔 옷장 버선 갈피마다에서 지폐가 쏟아져나왔다고 하더어머니는 향비누였다. 화장품을 살 때 선물로 얹어주는 작은향수병도 몇 개 마개가 헐겁게 닫힌 채 들어 있었다. 행여 늙은이 냄새가 날세라 그렇게 철저히 대비를 했던 것이다. 몸으로도마음으로도 추레해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던 어머니다운 자기관리였다.

후기 졸업식은 처음이었다. 후기 졸업식을 코스모스 졸업식이라고도 한다는 소리를 어디선지 들은 것 같지만 그 가냘픈 꽃들이 피어나게 할 산들바람이 스며들 여지가 있을 것 같지 않게 늦더위는 견고하고도 끈끈했다.

온몸 도처에서 개칠한 냉기를뚫고 열꽃처럼 피어나는 열망에 그녀는 으스스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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