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다."
이 동어반복tautology에는 주어와 술어 사이의 극적인불일치가 전제되어 있다. 주어인 ‘나‘와 술어인 ‘나‘는 다른
‘나이다. 주어와 술어 사이에 개입하는 이질성이 없다면어떤 문장도 문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동어반복은정보량이 제로이다.

구체성의 층위에 고착될수록 시의 언어는 죽음에 가까워진다. 맥락의 복잡성과 복합성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시의 언어는 해탈에 가까워진다.
시인은 조금씩 죽음 또는 해탈에 접근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시가 없다.

해탈은 주체에 대한 실재의 과잉 지배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끝내 해탈하지 않고삶의 긴장을 견디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해탈하고 싶은 밤이 있다. 말하자면시가 불가능한 밤이.
인간의 언어를 잃고 싶은 밤이.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변증법의 회로에 갇히지 않는것. 타인 지향형 인간이 되지 않는 것. 해탈하려 애쓰지 않는 것, 해방이나 자유가 먼 미래에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않는 것.
그렇게 메모를 해둔 적이 있지만 나의 일상과 현실에서평상심은 그냥 다음과 같은 뜻에 가깝다; 일희일비하지않고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좋아하던 것을 계속 좋아하는 것. 그러다가 조금씩 천천히 마모되는 것. 시간이지나 희미해지는 것. 그리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단 하나의 말‘에 도달하려는사람이다. ‘단 하나의 말‘에 도달하는 순간 그 도달이 착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 사람이다. 도달하고 싶다는 열망과 도달했다는 착각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겠지만,
그 열망과 착각 이후에는 다시 공허가 찾아올 것이다.
인간의 언어에 대한 공허를 느낀다고 선언하는 것은 쉽다. 시와 삶의 궁극에 공허가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쉽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렇게 덧붙여두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시를 쓴다고. 공허에도 불구하고, 공허와 함께 시를 쓰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단 하나의 말‘과 더불어.

진선미는 서로 다른(즉, 자율적인) 영역에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 매력적인 것은 진리의 자율성, 윤리의자율성, 미적 자율성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다. 각각의 자율성들이 다른 영역과 부딪쳐 스파크를 일으키는 순간, 궁극적으로는 각각의 자율성들이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파괴하고 소각하는 순간 자율성 자체가 제거되는 순간. 말하자면 특정한 맥락 속에서 필연적으로 서로 연결되는 순간.

삶은 누구에게나 고유하다. 고유하다는 것은 대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도있지만,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고대 철학자의 말도 있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다른 각도에서 둘 다 옳은 말이다. 어떤 측면에서 우리는 과거의인간들이 살았던 삶을 반복하면서 동시에 전례 없는 삶을살아가고 있다. 그 자체로 대체 불가능하며 새로운 삶을.

그런데 그 필연은 결국 우연의 나비효과에 불과한 것은아닌가? 우연의 나비효과란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두려운것은 아닌가? 1914년 사라예보에서 황태자를 살해한 고교생의 이름은 프린치프였다. 프린치프는 ‘원리‘ 또는 ‘원칙‘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마치 사소한 우연인 듯 우리에게 ‘신의 원리’를 환기시킨다

안전한 삶에 대한 혐오. 안전한 문화주의에 대한 부정.
미시마라는 인간은 그런 정신의 구현이다. 그는 자신을끊임없이 경계로 몰고 가서 그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는자신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던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과잉 결정, 그것이 쇼와시대 일본의 자기부정과 맞물려 미시마를 시대적 아이콘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테러하우스를 둘러보고 나오면 어쩐지 우울하고 참담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게다가 드물게 해가 좋은날이었다.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데, 언드라시 거리의 풍경은 환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그 이질감을견디기 어려웠다. 그날은 술을 많이 마시고 밤의 부다페스트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아름다운 중세풍의 건물들. 여전히 습하고 서서히 살을 에는 공기. 공기라기보다는 일종의 기분. 밤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먼 길 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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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 소설의 진실은 발언되고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 시선들 사이에서 마치 에피파니처럼 자신을힐끗, 보여주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이제 진실은 올바르거나 감동적이거나 잠언적인 문장으로 재현되지 않으며대표되지도 않는다. 진실은 언제나 1인칭이나 3인칭으로씌어진 문장 너머에서, 바깥에서, 심연에서, 건조하고 잔인하며 아름다운 방식으로, 우리를 습격한다.

하지만 다음 생과 달리 다음 소설은 가능하다. 어떻게해서든 다시 한 편의 소설을 살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문득 누군가눈을 뜨고 누군가 걸어 다니고 누군가 사라져버리는 세계를, 말하자면 매번의 사랑과 적의와 이별을, 또 사라질 에우리디케를, 다시 겪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인생이 커다란 전쟁터라면, 시인이란 이런 사람인지도모른다. ‘인생이 커다란 전쟁터‘라는 바로 그 은유를 파괴하는 사람. 삶을 구성하는 전제들 자체와 싸우는 것이 그의 일이므로.

하지만 영원과 무한에 정신을 헌납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기억할 것. 압생트를 마신 낭만주의 -상징주의자들의 탁자에서 밤하늘의 진실을 깨달았다고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시 쓰기는 우물에 가까울 것이다. 우물은계속 퍼내야만 물이 차오른다. 퍼내지 않으면 차오르지않는다. 그냥 두면 말라버린다. 그는 끊임없이 물을 퍼낸다. 초조하게 우물 바닥을 바라본다. 거기 해쓱한 제 얼굴이 보일 것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시 쓰기는 저수지와 같을지도 모른다.
오래 천천히 고이도록, 언어와 영혼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 내리는 비를 가만히 받아 모아야 한다. 오랜 시간이지난 뒤에 그곳에 차오르는 것이, 단지 흙탕물에 불과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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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은 소멸하면서 동시에 그 소멸에 의해 탄생한다.
불꽃은 살아 있는 것을 태워서 생과 멸의 차이를 지운다.
시베리아의 불꽃에는 인간이 수행하는 언어화와 의미화를 끝없이 유예시키고 무력화시키고 부정하는 힘이 숨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교차하는 시간과 공간 자체이고, 의미와 의미의 격렬한 투쟁이고, 정의와 불의가뒤섞이고 혼재된 역사의 이미지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 바깥의 무구하고 무정하며 물질적인 세계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힘의 모습인지도.

PR그 도시의 북구인들은 저 격변의 후유증과 밥벌이의 곤핍으로 거칠고 앙상했으나, 한편으로 그네들의 삶에는 전세기적前世紀的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낯선 향기가스며 있었다. 그것은 혁명과 몰락의 시대를 온몸으로 거쳐 온 이들의 체취이자, 가망 없이 피로한 삶을 문학과 종교에 의탁해온 이들의 향기였다.

총살 직전, 사형수들은 한꺼번에 ‘구원’된다. 황제의 은사로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는 선언문이 낭독된 것이다.
방금까지 죽음을 앞두고 있던 사형수들은 유배형으로 감형된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목숨을 구한다.
그 순간의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느낌이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격렬한 안도였을까. 환희였을까. 그도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배신감이었을까. 아마 그 자신도 온전히 기억을 복원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이미 삶의 감각이 소진되어 죽음에 가까운 상태였을 테니까.
봉건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애초부터 총살형을 집행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지하 서클 멤버들을 놀라게 할 목적으로 일종의 ‘연극‘을연출한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 자체보다는, 아직 소설이 아닌 무엇을떠올리는 일을 나는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가령 하루오라는 인물에 대해 쓰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오라는 사람이머릿속에서 문득 눈을 뜨는 순간을. 눈을 뜬 하루오가 미소를 짓거나 걸어 다니는 순간을. 그러다가 문득 사라져버려서 나를 외롭게 만드는, 그런 순간을.

그런 의미에서 내러티브는 살아 있는 것의 존재 방식이아니다. 우리의 삶은 의미와 목적과 결과와는 무관한 수많은 ‘디그레션‘으로 가득하다. 실은 그 ‘디그레션‘들 자체가 삶이라고 해야 한다. 삶은 삶이 존재하는 구체적 순간들의 평등한 집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깨닫지 않으면 현재도 느낄 수 없고, 진짜 삶도 느낄 수 없다. 심지어 삶의 의미와 무의미조차도.

바흐친이 즐겨 다루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역시 그런 의미에서만 ‘사랑의 소설‘일 것이다. 그의 소설은 분노와 증오와 질투와 사랑이 동시에 들끓는, 인간의 것이기때문이다. 소위 아가페적 사랑은 도스토옙스키의 것이 아니고, 소설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 ‘동시에‘라는 것은 얼마나 힘에 겨운 일인지, 모순적 상황의 수락과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위해 자신을 기투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어쩌면 그것은, 가능하다거나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넘어서서, 단지 글쓰기라는 실천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정신적지향인지도 모른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무지개나 신기루와 같은, 하지만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삶은 사실 무엇으로도 승화되지 않는다. 그것 자체이기때문이다. 삶은 어떤 종류의 아이러니도 모른다. 그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삶은 불가피하게 그 직접성으로만 존재한다. 시적 승화도 불가능하고 소설적 아이러니도 불필요한 지점, 그곳이삶의 현장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질문을 답습하는 것, 알려져 있는 답안을 반복하는 것.
알랭 바디우의 생각을 따르자면, 이런 반복에서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바디우적 의미의 사건은 그 자체로이미 창조적이다. 기존의 공통 지평과 공통 감각을 와해하고 ‘다른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 바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진리‘는 어딘가에 정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형태로만, 또는 사건을 통해서만 발생한다.
반대로 스토리텔링 코드에서는 사건이 대개 공통 감각의 경계 내에서 움직인다. 독자의 기대를 적절한 수준에서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히어로물을 보는 이유는 ‘새로운‘ 영웅 서사를 기대하면서 동시에 익숙한 권선징악 코드를 향유하기 위해서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클로즈업으로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면 비극의 요소가 강해지고, 롱숏으로 거리를 두면 희극의 요소가 강해진다고.
당연하게도 삶이 그 자체로 비극이거나 희극인 것은 아니다. 삶은 차라리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희비극적 어긋남 속에서 흘러간다. 시선이 바뀌면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고 각도가 바뀌면 희극과 비극이 뒤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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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팽이는 나를 비웃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내 앞에서 돈다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누가 나의 이름으로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나는 한밤 내 운다.

뭇 발에 밟히어 진탕이 될 때까지눈을 희다고만 할 수는 없다.
눈은우모처럼 가벼운 것도 아니다.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내 손은 외국산 베니어를 만지면서귀가하는 길목의 허름한 자유와뿌리 깊은 거리와 식사와거기 모인 구리빛 건강의 힘을 쌓아 둔다.
톱날에 잘려지는 베니어의 섬세쾌락의 깊이보다 더 깊게파고 들어가는 노을녘의 기교들.
잘 한다 잘 한다고 누가 말했어.
한 손에 석간을 몰아 쥐고빛나는 구두의 위대를 남기면서늠름히 돌아보는 젊은 아저씨.
역사적인 집이야, 조심히 일하도록.

사랑을 보듬고 울고 있는 사람들, 한 하늘과한 세상의 목마름을 나누어 지니면서저렇게 저렇게 용감한 사람들, 가는 사람들.
아직은 똑똑히 우리도 보고 있어야 한다.

시를 쓸 때는 언제나 굶주림으로, 술이 깬다음날 새벽의 목마름으로, 저 혼자 억울한 자유로,
그렇게 나는 나의 예술을 키워 왔다.
내 시는 무디어 칼을 무찌르지 못하지만어리석게 어리석게 나를 이겨 낸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 녘엔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불로 만나려 한다.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곁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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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조롱하거나 파멸시키는 진짜 바보는 자신을 모르는사람이야. 난 너무 오랫동안 그런 인간이었어. 당신도 너무오랫동안 그런 인간이었지. 이젠 그러지 마. 최고의 악덕은경박함이야 깨닫는 것은 뭐든 옳은 법이지.
*****ᆞ체면을 잃고 몰락한 인간이 되어 죄수복을 입고 이 캄캄한 감방에 앉아서 나는 자책하고 있어. 괴로워서 마음이 술렁이고 잠을 설치는 밤에, 고통스럽도록 지루한 낮에 나 자신을내 삶을 완전히 장탓하지.
· 지적이지 못한 우정이******악하도록 허용했으니.
.

그럼에도 이 회고록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놀라운 묘사는 우리에게 불쾌감보다는 감동을 준다. 와일드의 글은 강박적인 반복의 괴로움을 반영하면서-지성은 흔들리고 미사여구는 무거워진다-고립 상태에서의 통찰이 가져오는 갑갑함을 전력으로 재현한다. 따라서범위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글 자체가 속박된 삶의 등가물이된다.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은 자기 관찰의 훌륭한기록이다. 『심연으로부터』처럼, 신경증적인 정체停滯 자체를구현함으로써 강박적 글쓰기라는 비난을 피한다. 내적 유배의농축물이자 자멸의 정수.
드퀸시의 고독은 자신과 연결될 수 없기에 타인과도 연결될 수 없는 영혼의 고독이다. 이 주제는 다음 세기까지 쭉 이어져, 간접적으로만 아는 것도 말할 줄 아는 작가들이 외로움의진정한 본질을 근원적으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최고의 회고록들이 나왔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발견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이 나의 직업이었다. 그래야만 우리의 한계를 알고 연민으로 삶을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과거라 해도 과거를 건드리면, 이미 다 끝나버려 바꿀 수 없지만 지금의 정신 속에 보이지 않게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주위를 맴돌고 주르르 미끄러지며 우리를 터무니없이 외롭게 만드는 공포가 일어날 때도 있다.

아프리카는 내 어린 시절의 숨결이자 삶이었다. 그 땅은 여전히 내 가장 어두운 공포의 숙주이자, 언제나 흥미롭지만 한번도 완전히 풀어본 적 없는 수수께끼들의 요람이다. …………바다처럼 무자비하고, 그곳의 사막들처럼 타협을 모르며가혹함과 베풂에 절제가 없다. 모든 인종에게 많은 것을 주면서,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다. ・・・・・・ 하지만 아프리카의 영혼, 온전함, 느리면서도 거침없는 삶의 맥동은 고유하며 이리듬이 너무도 독특하기에, 어릴 적부터 그 규칙적이고 끝없는 박자에 물들지 않은 이방인이라면 제대로 체험할 수가 없다. 음악도 스텝의 의미도 모른 채 마사이족의 출전 무용을 구경하는 사람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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